검을 든 꽃 58화
부서진 창으로 새어 드는 불빛으로, 아이는 자신 앞에 쪼그려 앉아 있는 여자를 살펴보았다.
여자는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프릴로 휘감긴 아이보리색 드레스, 선명한 보라색 눈동자. 어깨 아래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은 달콤한 사탕 같은 분홍색이었다.
아이는 이렇게 예쁘고 귀해 보이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도시의 진열장 안에서 보았던 정교한 인형 같았다. 그런 사람이, 자신의 발을 감싸고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구하러 왔다고, 나를? 내 이름을 묻고 있어. 나는 이미 죽은 걸까? 코를 찌르는 기름 냄새는, 생생하고 끔찍한데.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아이는 멍하니 그녀를 보다가 우물우물 대답했다.
“샤이…….”
“샤이? 이름이 샤이야?”
아이가 미미하게 끄덕였다. 에키는 아이의 떨림이 줄어든 것을 알아차렸다. 내심 안심하며 아이를 향해 다른 손을 내밀었다.
“언니랑 같이 나가자, 샤이.”
“어, 어디로……?”
“안전한 곳으로, 여기는 기름이 많아서 위험하니까, 얼른 나가야 해.”
“하, 하지만 밖에, 사람들이, 있잖아요. 다들 화가 나서…….”
샤이가 울먹이며 속삭였다. 에키는 웃으며 답했다.
“괜찮아. 내가 지켜줄게. 아무것도 겁내지 않아도 돼.”
일상적이고 평이한 어조였다. 아무렇지도 않게 나오는 말이 되레 강한 확신을 주었다.
기름 냄새가 맴돌고 횃불의 불그레한 빛이 불길하게 일렁거리는 낡아 빠진 헛간과는 어울리지 않는, 그녀의 완벽하게 치장한 모습은 비현실적이었다. 그 모습도 그녀의 말에 기묘한 무게를 더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녀 곁에 있으면 평온할 것만 같은.
샤이는 홀린 듯이 손을 뻗었다. 허공을 더듬으며 조금씩 다가오는 작은 손을 에키가 맞잡아 주었다. 눈물범벅인 소녀의 눈에 빛이 들어오는 순간.
허공이 일그러졌다. 갈라진다. 닿았다. 회색 머리카락 끝이 가장 먼저. 그리고 곧이어 빨려들듯 아이의 몸 전체가. 막 닿았던 손이 미끄러져 떨어져 나갔다.
에키는 눈을 치뜨고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늦었다. 아이의 바로 뒤에 생겨난 공간의 일그러짐은 단번에 아이를 집어삼켰다. 곧이어 유리구슬처럼 일그러진 공간이 커진다. 아이의 손 대신 허공만 잡아챈 에키는 욕설을 내뱉으며 범위 밖으로 물러났다.
“빌어먹을 결절!”
생기랄 땐 안 생기고! 대상을 찾을 수 없는 울분이 확 솟구쳤다.
회귀 이전엔 불타 죽었던 성녀를 살리려 하자 그 변화를 감지한 라키아기오사가 나타난 모양이었다. 바르데르기오사가 추측했던 대로, 무언가를 바꾸려 하면 할수록 결절이 생길 확률도 높아지는 듯했다.
결절은 급속도로 커졌다. 벌써 건물 안쪽을 거의 다 집어삼켰다. 생겨난 장소가 무고한 어린애 하나를 태워 죽이려고 기름을 퍼부은 헛간이니 안쪽 상황도 끔찍할 터였다.
에키는 부풀어 오르는 결절을 피해 벽에 딱 붙은 채로 고민했다. 이걸 어쩌지.
‘어쩌긴 어째. 들어가야지. 지켜 주겠다고 약속했잖아.’
고민은 순식간에 끝났다. 어지간해선 그녀는 죽지 않는다. 전쟁터에 생겼던 결절도 별문제 없었지 않나. 그러나 저 솔족 어린아이는, 샤이는, 결절 안에 홀로 남았다간 확실하게 죽을 것이다.
에키는 샤이의 손을 쥐었던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 아이는 작고 말라 있었다. 엘기오사의 오너, 성녀. 이런 지경에 이르러서도 아무도 증오하지 않는다는 게 가능할까.
에키는 생각을 그만두고 아메시스트를 고쳐 쥐었다. 그러나 그녀가 뛰어들기 전에, 부서진 창으로 유리엔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에키네시아? 무슨 일……!”
그는 물거품에 비친 것처럼 굴절된 내부를 보자마자 그것이 결절임을 알아보았다. 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에키는 멈칫했다. 제 발로 결절에 들어가는 모습을 그에게 보일 수는 없는데. 또 넘어지는 척이라도 해야 하나. 짧은 순간 갈등이 일었다.
하지만 그녀의 고민은 금세 무의미한 짓이 되어버렸다.
결절과, 사라진 아이와, 벽에 붙어 선 에키네시아를 모두 확인한 유리엔은 한 팔로 창틀을 짚고 단번에 창을 뛰어넘었다.
잠시 눈이 마주쳤다. 하늘색 눈동자가 그녀를 바라본다. 눈이 깜박였다. 씁쓸한 미소가 찰나 스쳐갔다. 그리고 그는 에키가 반응할 틈도 없이 결절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유……!”
에키는 얼이 빠져서 그의 이름을 부르려다 삼켰다. 피가 얼어붙는 기분이 들었다.
미쳤어? 미쳤냐고, 그 안에 뭐가 있는 줄 알고 그렇게 들어가! 아무리 마스터고 기오사 오너라지만, 결절 내부는 세계와 다른 법칙으로 돌아간단 말이야!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해. 죽을지도 모르는데, 제 발로 결절에 들어가?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거야? 겁이 없어? 내가 당신을 어떻게 살려냈는데!!
비명 같은 생각이 휘몰아쳤다. 머리가 핑 돌며 아파 올 정도로.
그 와중에 그녀는 마음속의 저울에 두 가지를 올렸다. 마검의 악마임을 들킬 위험을 감수하고 그와 샤이를 지키러 들어가는 것, 그리고 들키지 않는 대신 결절 밖에서 얌전히 기다리는 것.
저울은 올린 것이 허무할 정도로 단번에 기울었다. 고민하는 게 우스운 일이었다. 에키네시아는 결절 안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세 명의 기오사 오너를 집어삼킨 결절이 급속도로 범위를 넓혔다. 그 굴절된 공간은 횃불을 들고 몰려 있던 마을 사람들과, 골짜기 안쪽 전체까지 탐욕스럽게 먹어치운 다음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 *
결절 내부로 들어서는 순간 훅 하고 열기가 끼쳐 왔다. 에키는 팔뚝으로 얼굴을 가린 채 눈을 가느다랗게 떠보았다.
“……예상은 했지만.”
[끝내준다!]
골짜기에서 분리된 결절은 골짜기의 지형 그대로였다. 물론 내부의 모습은 완전히 달랐다.
골짜기 안에 있던 나무들이 원래보다 세 배에서 네 배까지 커졌다. 꼭대기는 까마득한 높이까지 치솟고 줄기는 신전의 기둥보다도 굵어졌다. 높고 굵은 기둥처럼 나무들이 빽빽이 솟아 길목을 막으며 시야를 가리자 결절 내부는 거의 미로처럼 보였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나무의 줄기와 가지는 모두 숯처럼 새카맣게 변했고, 나뭇잎은 한 장 한 장이 모두 타오르는 불로 변했다. 머리 위의 나뭇잎들이 모조리 불꽃이었다.
후끈할 정도로 끼쳐 오는 열기는 그 불꽃 나뭇잎들 때문인 듯했다. 에키는 낙엽처럼 떨어지는 나뭇잎을 재빨리 피했다. 바닥에 닿은 나뭇잎은 구르다가 기름에 닿아 불씨를 피워 올렸다. 확 하고 불꽃이 솟았다.
“기름까지 있어?”
그녀는 질겁하여 바닥을 살폈다. 흙바닥에 기름이 좁은 폭의 시냇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나뭇잎에서 옮겨 붙은 불이 기름의 줄기를 따라 불길이 되어 흘렀다.
기둥 같은 나무들에 이어 언제든 불길로 변할 수 있는 기름 길까지. 마물은 안 보이는데 지형 자체가 가관이었다.
‘여기서는 오래 못 버티겠는데.’
에키는 인상을 쓰며 생각했다. 마물이 없더라도 먹을 것이 없으면 결절이 열리기까지 버티기가 힘들다. 식량이 될 만한 게 함께 빨려 들어 왔어야 결절 내부에 먹을 것이 존재하는데, 이 결절은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나무가 다 불붙은 쇠기둥 꼴이 되어버렸고 바닥에 기름 시냇물까지 흐르니 혹 식량이 있더라도 다 타버릴 것이다. 물도 없을 확률이 높았다.
내부에서 버티는 게 무리라면 저번 흰 까마귀 협곡의 결절에서처럼 시작점을 찾아내서 기오사로 찔러보는 수밖에 없다.
다행히 시작점이 어딘지 확실히 알고 있으니 찾기만 하면 될 터였다. 쉼터 안, 샤이가 웅크리고 있던 등 뒤의 모퉁이에서 결절이 시작되었으니까.
‘그나마 다행인 게, 굳이 바르데르기오사를 꺼내지 않더라도 유리엔의 랑기오사나 샤이의 엘기오사가 있다는 점이네.’
일단 불의 미로만 보일 뿐, 마물이나 기괴한 생물 같은 건 보이지 않으니 마스터인 것도, 마검도, 숨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역시 들어오길 잘했다. 그녀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유리엔이나 샤이나 마물이 아니라 굶주림과 갈증으로 죽었을지도 모른다.
사방은 불꽃 나뭇잎이 타닥거리는 소리 외에는 조용했다. 에키는 아메시스트를 뽑아 쥔 채 걸음을 옮겼다. 감각을 있는 대로 곤두세우고 인기척을 찾았다.
한동안 안을 헤매던 에키는 이 결절이 생각보다 위험하겠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말 미로잖아, 이건.’
계속 막다른 곳이 나왔다. 나무가 까마득히 높고 하늘은 똑같은 불바다라 여기가 어디쯤인지도 모르겠다. 골짜기 안쪽의 지형은 일주일 넘게 내려다봐서 익숙한데도, 어디가 어딘지 분간이 가질 않았다.
[주인아, 어쩐지 계속 같은 곳을 빙빙 도는 느낌인데? 내 착각이지?]
“착각이 아닐걸.”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에키는 제자리에 멈춰서 잠시 고민했다. 그 순간 그녀의 귀에 가냘픈 비명소리가 들렸다. 어린 여자아이의 비명. 이 결절에 있을 어린아이는 샤이뿐이다.
에키는 소스라치게 놀라 고개를 들었다. 비명은 짧게 한 번 난 이후 들리지 않았다.
“샤이! 샤이! 어디니?”
그녀는 비명이 난 쪽으로 다가가며 소리 높여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감각을 있는 대로 넓혀봤지만 걸리는 게 없었다. 아니, 탐지 범위가 평소보다 좁아진 느낌이었다. 눈 근처에 가리개가 덮여 시야가 좁아진 느낌과 비슷했다. 숯 바른 철벽같은 나무 탓인지 이 결절 자체의 특성인지 잘 모르겠다.
그녀의 부름에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에키는 초조해졌다. 비명이 들려온 방향을 새카맣고 커다란 나무가 막고 있었다.
그녀는 나무에 손을 짚으며 귀를 기울이려 했다.
“으, 큭.”
손을 대자마자 떼어냈지만 늦었다. 얇은 장갑은 순식간에 타버리고 손바닥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화상이었다.
겉보기엔 그저 검기만 한 나무 기둥이 손대는 순간 익어버릴 정도로 고온인 듯했다. 이 정도로 뜨거우면 닿기 전에 알아차릴 수 있는 게 정상인데, 손이 완전히 닿기 전까지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 정상적인 세계와 별개의 법칙에 지배받는 공간인 탓이다.
“망할 결절, 가지가지 하네.”
[야, 너 왼손 못 쓰겠는데?]
“이 정도면 쓰려면 쓸 수 있어.”
에키는 고통을 참으며 화상을 입은 손을 늘어뜨렸다. 다행히 왼손이었다. 오른손으로 드레스 안쪽의 풍성한 패티코트를 일부 찢어 왼손을 대충 감았다. 그러면서 계속 귀를 기울이고 감지를 시도했지만 깜깜하기만 했다.
“샤이! 들리니? 샤이!”
한 번 더 불러봤지만 여전히 무반응이었다.
유리엔이라면 이런 결절에서 굶주림 말고는 목숨이 위험할 일이 없겠지만 샤이는 무력한 어린애였다. 뭔가 큰일이 난 건 아니겠지. 몹시 불안해졌다.
돌아가며 길을 찾을 시간은 없었다. 에키는 오른손의 아메시스트를 들었다. 혹시 몰라 그냥 휘둘러봤지만 예상대로 검게 변한 나무 기둥에는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그녀의 실력이라면 칼 한 자루만 가지고도 어지간한 금속까지 베어낼 수 있는데도.
그녀는 별 수 없이 마나를 끌어올렸다. 검에 보랏빛이 어른거렸다. 아메시스트는 맞춤 제작 명검답게 마나를 잘 받아들였다.
에키가 검기를 덧씌운 검을 기둥을 향해 휘둘렀다. 조금 전과 달리 나무 기둥은 순두부처럼 부드럽게 잘렸다.
너무 깔끔하게 잘려서 잘린 그대로 넘어지지 않고 얹혀 있었다. 그녀는 구둣발로 나무의 윗부분을 걷어차 넘어뜨렸다. 높은 굽 덕에 발이 데일 일은 없어서 다행이었다.
기둥을 넘어서 건너편으로 가도 샤이는 보이지 않았다. 에키는 두 번 더 그 짓을 반복한 끝에 간신히 샤이를 찾아냈다.
“저게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