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57화
그녀는 마검의 악마를 증오하지 않는 유리엔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며칠 전에 꿨던 꿈이 떠오른다. 웃으며 말하던 시체. 네가 감히 나를 사랑하느냐고, 비웃던 시체.
감정이 범람하며 이성의 벽 너머로 넘실거렸다. 그 파도가 손끝까지 닿았다. 아메시스트에 올려둔 손이 떨렸다. 그녀는 반쯤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검을 뽑았다.
그것을 유리엔을 향해 겨누는 순간, 그녀는 다른 문제를 깨달았다.
똑바로 겨눈 칼끝이 유리엔의 가슴께에 있다. 온기 없는 금속의 너머에 하얀 남자가 서 있다. 사람을 베기 위해 만들어진 물건을 그녀가 쥐고, 그를 향해 겨누고 있다.
칼. 하얀 남자. 퍼져나가던 붉은 피. 죽음. 분수대의 앞, 시체의 산, 그녀가 죽인 남자, 감기지 못했던 눈동자. 단번에 연상되는 악몽 같은 기억.
심장이 공포에 질려 발작하듯 뛰었다. 호흡이 가빠진다.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빠져나갔다. 칼끝이 주체할 수 없이 떨렸다. 눈에 눈물이 고이며 칼끝 너머 유리엔의 모습이 흐릿하게 뭉그러졌다.
[야, 너 왜 그래?]
마검 바르데르기오사. 살의. 악의. 몸을 물들이고 조종하던 것들. 마검의 음성을 듣자마자 손끝에 살의가 휘감기는 것 같은 진득함이 느껴졌다. 검게 물들어가는 환상이 보였다.
에키네시아는 진저리를 치며 손에 들려 있던 검을 내팽개쳤다. 금방이라도 비명을 내지를 것 같은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그리고 뒤로 물러섰다.
“에키네시아?”
그녀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 유리엔이 당황하며 그녀 쪽으로 다가왔다. 에키는 그가 다가오는 만큼 물러났다. 그러자 그는 더 이상 다가오지 않았다. 그녀만큼이나 희게 질린 얼굴로, 차마 더 다가오지는 못하고, 그가 그녀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에키네시아.”
달래듯 애달픈 목소리. 그 부름에 담긴 것을 읽어낼 정신이 남아 있지 않았다. 에키는 정신없이 고개를 저었다. 더 물러났다. 유리엔이 이를 악무는 게 보였다. 그가 무어라 말하려는 찰나.
에키와 유리엔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골짜기 아래 어둠 속에 시뻘건 불빛들이 하나 둘, 형형한 짐승의 눈알처럼 떠올랐다. 우우거리는 함성, 거친 발소리, 그 소음들 사이로 사나운 명령이 깃발처럼 솟았다.
“마녀! 마녀를 끌고 와!”
유리엔이 몸을 낮추며 골짜기 쪽으로 다가갔다. 에키는 스스로 내팽개쳤던 아메시스트를 다시 주웠다. 그러면서 고여 있던 눈물을 빠르게 홈쳐냈다.
그녀의 심장은 아직도 미친 듯이 뛰고 있었고, 검을 쥐는 손에도 떨림이 남아 있었지만, 얼굴은 침착함을 되찾았다.
감정이 덮쳐온다 해서 움직여야 할 때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이었다면, 에키네시아는 시간을 되돌려 두 번째 기회를 얻기는커녕 진작 마검에게 먹혀버렸을 것이다.
그녀는 빠르게 자신을 가다듬었다. 호흡을 고르고 아메시스트를 쥔 채 골짜기 쪽으로 다가갔다.
아래의 분위기는 집단 광기에 가까워져 있었다. 횃불을 치켜든 사람들이 십여 명. 커다란 어른들 사이에 작은 어린아이가 널브러져 있었다.
거친 밧줄로 만든 올가미가 아이의 목에 걸려 목줄처럼 잡아당겨졌다. 다듬어주지 않아 짐승의 털처럼 엉망으로 얽힌 긴 잿빛 머리카락이 힘없이 흔들렸다. 뒤에 있던 노인이 아이에게 발길질을 하며 소리를 질렀다.
“이 빌어먹을 년! 네년 때문에 내 아들이 죽었어!”
“우리 마을에 무슨 짓을 한 거야!”
“새끼 마녀! 네 어미도 네가 잡아먹은 거지?”
“기름 가져와, 기름! 마녀는 태워 버려야 완전히 죽으니까!”
주동자로 보이는 남자가 흥분한 어조로 횃불을 흔들어댔다. 불그레한 불빛 아래로 드문드문 드러나는 얼굴들은 모두 악귀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사람들 중 몇이 나무통을 짊어지고 와 허름한 쉼터에 기름을 가득 뿌렸다. 주동자가 한 손으로 아이의 멱살을 잡고 들어올렸다.
그 모든 것들을 확인하고 정황을 파악한 유리엔이 성검을 고쳐 쥐었다. 그가 빠른 어조로 말했다.
“에키네시아, 저 아이가 엘기오사의 오너일 거다. 사람들은 내가 막을 테니, 그대에게 아이를 부탁해도 되겠나?”
“예, 로드.”
에키는 짧게 답했다. 그는 그녀를 돌아보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흔들리던 그녀를 보아놓고도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지 않는다. 그녀가 하겠다고 대답한 이상, 의심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그가 튀어나온 바위나 나무를 밟으며 골짜기 아래로 뛰어내렸다. 거의 추락하는 것 같은 속도였다.
에키 역시 그를 뒤따라 내려갔다. 아이보리색 드레스가 어둠 속에서 펄럭였다.
그사이 주동자는 아이를 기름 범벅인 쉼터 안쪽으로 집어 던졌다. 문을 닫고, 아이가 나오지 못하도록 문 앞에 나무통과 바위를 끌어다 막는다. 쉼터째로 불을 질러 아이를 태워 죽이려는 모양이었다.
[기분 좋다! 엄청 강렬하네.]
마검이 흥얼거리듯 말했다. 바르데르기오사가 좋아할 만한 악의와 살의가 골짜기 가득 넘실거리겠지. 에키는 눈살을 찌푸렸다. 손의 떨림이 완전히 사라지고 심장은 다른 이유로 뛰기 시작했다.
혹여 저 아이가 기오사 오너가 아니라 해도, 눈앞에서 어린아이가 타 죽는 꼴을 지켜볼 생각은 없었다. 마음이 급해졌다.
유리엔이 먼저 아래에 도달했다. 남자 하나가 쉼터에 불을 붙이기 위해 횃불을 가까이하고 있었다. 유리엔은 앞뒤 가릴 것 없이 랑기오사를 집어 던졌다. 성검은 남자가 들고 있던 횃불 윗부분을 정확하게 베고 지나가 땅에 박혔다.
“으헉!”
남자가 끄트머리만 남은 횃불을 들고 식겁해서 주저앉았다. 갑자기 날아온 하얀 검에 놀란 사람들의 시선이 검이 날아온 방향으로 향했다.
“뭐, 뭐야?”
“어디서 갑자기 검이…….”
어둠 속에서 흰 제복을 걸친 유리엔이 나타나자 그들은 귀신을 본 듯한 낯이 되었다. 무지한 사람들은 창천기사단의 제복이나 문장을 알아 보지 못했지만, 그의 외양만으로도 그가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불안한 목소리가 그들 사이에서 떠돌았다.
“누, 누구…….”
유리엔이 그들 쪽으로 다가갔다. 급하지 않은 걸음이었다. 그 여유로운 태도가 묵직한 압박감이 되어 주위를 눌렀다.
서리가 내릴 것처럼 싸늘한 눈이 사람들 사이를 훑었다. 시선이 마주치는 사람마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이거나 눈을 피했다.
그는 혼자고 마을 사람들은 열 명이 넘으니 호기를 부려볼 만도 하건만,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가 지나가도록 비켜섰다. 이글거리던 광기 위로 얼음 같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는 느릿하게 그들 사이를 가로질러 땅에 꽂혀버린 랑기오사를 다시 쥐었다. 그러곤 쉼터를 등진 채 서서 주저앉은 주동자를 내려다보았다.
주동자는 40대쯤 되어 보이는 중년 남자였다. 유리엔은 그에게 검을 겨누지 않고 그저 늘어뜨리고만 있었지만, 남자는 목덜미에 칼이 들어온 듯한 표정을 지었다. 유리엔이 건조한 어투로 물었다.
“어느 마을의 주민들인가?”
“뉘, 뉘, 뉘십니까?”
“나는 창천기사단장이다. 너희가 어느 마을 소속이냐고 물었다.”
“창, 창천……?”
얼빠진 되물음이 곧 술렁거림이 되고, 경악이 되기까진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창천의 문장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무지하더라도 창천기사단이 어떤 곳인지 정도는 다들 알고 있었다. 웅성거리는 이들을 무시하고 유리엔은 주동자를 응시하며 조용히 말했다.
“세 번 묻게 하지 마라.”
내려다보는 시선이 무거웠다. 주동자는 침을 꿀꺽 삼키고 간신히 대답했다.
“저, 저희는, 고, 고트 마을에서 왔습니다. 여기서 북쪽에 있는……”
에키는 유리엔이 마을 사람들을 상대하는 사이 쉼터의 창문을 부수고 있었다. 검기를 쓰지 않고 바위와 나무통으로 막은 문을 여는 건 어려워서 창을 부수는 게 빨랐다. 나무 덧창을 내리치는 아메시스트에 기름이 흠뻑 묻어났다.
그녀는 금세 부서진 덧창을 치워버리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안쪽은 완 전한 어둠이었다. 그녀가 부순 창에서 밖의 횃불들이 비추는 빛이 어른어른 새어 들어왔다. 에키는 그 빛으로 내부를 확인했다.
아이는 모퉁이에 웅크린 채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 동그랗게 말린 몸이 조그마했다.
그녀는 일부러 기척을 죽이지 않고 아이에게로 다가갔다. 구두굽이 또각거리는 소리가 날 때마다 아이의 어깨가 흠칫흠칫 떨렸다. 가느다란 목에 여전히 밧줄로 만든 올가미가 걸려 있었다.
에키는 어린아이를 대하는 데에 능숙하지 않았다. 어린애 같은 마검에 익숙하긴 했지만, 실제 어린아이는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잔뜩 겁을 먹은, 조금 전에 불타 죽을 뻔한 아이를 막무가내로 끌고 나가서는 안 된다는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억지로 데리고 나갔다간 안 그래도 공포에 떠는 아이가 충격을 받을 것이다.
밖에 유리엔이 있으니 불이 붙을 일도 없다. 그녀는 우선 아이를 안심시키기로 했다. 아이의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드레스 자락이 바닥에 닿으며 고인 기름이 묻어 더러워졌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가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를 냈다.
“괜찮아. 해치지 않아.”
아이가 부들부들 떨더니 벽 속으로 파고들어 가고 싶은 것처럼 움직였다. 손으로 벽을 긁어댔다. 긁은 곳에 핏자국이 남았다. 공포에 질려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었다. 말을 알아듣긴 한 건지도 모르겠다.
에키는 잠깐 고민하다가 아주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지저분하고 상처투성이인 아이의 발에 레이스 장갑을 낀 손이 닿았다. 움찔하며 아이의 발가락이 오므라들었다.
벽 모퉁이에 쪼그린 터라 더 이상 물러날 곳도, 발을 감출 곳도 없었다. 아이의 온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울음을 참는 것처럼 흐으으 하는 신음이 새어 나왔다.
“나는 너를 구하러 왔어.”
그녀가 속삭이듯 말하며 손으로 아이의 발을 감쌌다. 새의 날개가 알을 품듯 바짝 마른 맨발을 덮었다. 얇은 장갑 너머로 그녀의 체온이 전해졌다. 그 상태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난 에키네시아 로아즈라고 해, 에키라고 부르면 되고. 그냥 언니라고 불러도 돼. 너는 이름이 뭐니?”
그 말에 아이가 파묻고 있던 머리를 조금 들었다. 방어 자세를 취하듯 머리를 가리고 있던 팔뚝 사이로 켕하게 커다란 회색 눈동자가 보였다.
‘회색 머리카락, 회색 눈동자……. 솔이구나.’
전 대륙을 떠돌아다니는 나라 없는 민족, 솔. 그들은 일정한 거주지 없이 방랑하며 점술이나 기예, 음악, 잡화 팔이 등으로 살아가는 유랑민족이었다.
집단을 이루지 못한 이방인은 쉽사리 배척받으며, 보호받지도 못한다. 차별과 범죄의 대상이 되기도 쉬웠다.
대충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겠다. 저 마을에 뭔가 안 좋은 일이 있었고, 솔족 어린아이인 이 아이가 원흉으로 몰린 거겠지.
자세한 건 조사해 봐야 알겠지만 맥락은 뻔했다. 타인을 증오한 적이 한 번도 없어야 사용할 수 있는 엘기오사의 오너일 아이를 향해 마녀라니, 기가 찰 일이었다.
“이름을 가르쳐줄래?”
에키는 아이의 눈을 마주하며 다시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