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꽃-56화 (56/211)

검을 든 꽃 56화

그날부터 유리엔과 에키네시아의 야숙생활이 시작되었다. 하루씩 번갈아가며 밤을 새느라 서로 마주하는 시간이 그렇게 길지는 않았다. 아침과 저녁을 함께 먹는 정도였다. 그러나 그 길지 않은 시간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들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유리엔은 에키의 남동생인 란셀리드가 기사에 대한 로망이 있지만 검술에 재능이 별로 없어서, 검술은 교양 수준으로만 하고 영지 경영을 배우는 데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은근히 적성에 맞아서 란셀리드가 상업과 교역, 농업과 광업에까지 두루두루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도 들었다.

그는 에키로부터 니콜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다. 니콜이 그녀에게 가족이나 다름없는 언니라는 것, 어릴 적에 에키가 니콜에게 짜증을 많이 부렸었다는 것도 들었다.

에키의 부모님이 연애결혼을 했고 지금도 금슬이 좋다는 이야기는 듣다가 무슨 생각을 한 건지 뺨을 약간 붉히기도 했다.

에키는 유리엔이 디트리히와 꽤 허물없는 친구 사이라는 것과, 부단장인 바론이 그의 로드였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디트리히가 본래 평민 출신으로, 재능을 높이 산 귀족의 후원을 받아 귀족의 성을 받고 사관학교에 들어왔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바론이 예전에 결혼하여 어린 딸과 아내가 있는 유부남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그리고 유리엔이 열여섯 살에 제국 황실을 떠나 아젠카에서 살기 시작했다는 것, 사관학교 입학 최소연령인 18세까지 거의 혼자 아젠카에서 지냈다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아비로부터 증오를 받고 있다거나 형제에게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는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았다.

그녀는 한가할 때면 유리엔이 나무 토막을 조각하며 시간을 보낸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밤새도록 골짜기의 쉼터를 내려다보고 있으면 지루해질 수밖에 없는데, 그 시간마다 유리엔은 작은 나무토막을 골라 쥐고 단도로 그것을 깎아무언가를 만들곤 했다.

말이나 토끼 같은 동물 모양, 검이나 방패나 갑옷의 모형, 조그만 나무나 집. 대강 깎아내는 데도 제법 정교한 나무조각들이 쌓여갔다.

그저 시간을 보내기 위한 용도여서인지 유리엔은 조각한 것을 모으지는 않았다. 에키가 그와 교대해서 그가 앉아 있던 나무 그루터기 근처를 뒤지면 조그만 조각들이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곤 했다.

에키는 쉼터를 지켜볼 때마다 마검과 이야기를 하거나, 유리엔이 만들어 버려둔 조각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다.

일주일째 되던 날, 그녀는 조각 더미에서 익숙한 모양의 작은 검을 발견했다. 손바닥만 한 그 검은 아무리 봐도 랑기오사였다. 축소 모형이라 해도 될 법했다.

에키는 그것을 한참이나 만지작거렸다. 성검 랑기오사를 보면 자연스럽게 유리엔이 연상된다. 그와 랑기오사는 무척 닮아 있었다.

이 조각은 버리기엔 아까웠다. 그녀는 결국 그것을 손수건으로 감싸서 챙겼다. 그런 그녀를 지켜보던 마검이 부루퉁하게 말을 꺼냈다.

[있잖아, 주인아. 너는 왜 유리엔만 이상하게 대해? 걔만 특별 취급하고, 걔가 준 검도 특별 취급하고, 난 이해가 안 가.]

“특별한 사람이니까.”

[걔가 뭐가 특별한데? 네가 죽였던 사람이 걔 하나뿐인 것도 아니고, 걔가 네 가족인 것도 아니잖아.]

에키는 턱을 괴고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고민했다. 솔직하게 말을 해야 하나. 마검이 이해할 수 있을까. 그녀가 침묵하자 바르데르기오사는 칭얼거리듯 졸랐다.

[뭔데? 뭐야? 나 진짜 궁금해. 내 전 주인은 그러지 않았단 말이야.]

“그 사람에겐 특별한 사람이 없었어?”

[가족은 엄청 아꼈어. 가족 말고는 그런 사람이 없었고.]

“……가족을 왜 아끼는지는 알아?”

[음, 전 주인이 가르쳐줬는데……. 인간은 인간에게서 태어나니까, 자길 낳아준 사람이나 같은 배에서 태어난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는 건 당연하다고 그랬어. 근데 가족을 죽이고 싶어 하는 인간도 있잖아? 나한테 쌓이는 살의 중엔 그런 것도 많은데. 그래서 사실 잘 모르겠어. 인간은 가족을 정말로 아껴? 모두 가족을 아끼면서도 죽이고 싶어 하는 거야?]

쉽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에키는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오른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장갑으로 가려진 문양은 눈 감고도 그려낼 수 있을 만큼 익숙했다.

그녀는 바르데르기오사와 9년이 넘는 시간을 함께 지냈지만, 도저히 마검을 좋아할 수 없었다. 버릴 수 있다면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마냥 미워하지도 못했다. 사람을 죽이고 싶다며 그녀를 충동질할 때조차, 마검은 미성숙한 어린아이 같았으니까.

기오사의 자아는 기본적으로 잠들어 있는 상태라고 들었다. 각성하지 않는 한, 그 자아는 깨어나지도 무언가를 경험하지도 못한다.

그렇다면 그녀까지 합해서 고작 두 번 각성해 본 바르데르기오사는 실제로 어린아이나 다름없지 않을까.

그녀는 오른손을 말아쥐며 천천히 설명했다.

“인간이 단순하지 않아서 그래. 어떤 성격이냐에 따라 다르고, 자라난 환경에 따라서도 다르고, 가진 신념에 따라서도 달라지고, 심지어 같은 사람이라 해도 늘 똑같지는 않거든. 무슨 일을 겪느냐에 따라 완전히 바뀌기도 하고, 무슨 일이 있건 본질은 전혀 바뀌지 않기도 하고…….”

[으으, 그게 뭐야, 복잡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마검이 짜증이 묻어나는 어투로 투덜거렸다. 에키는 조금 웃었다.

“언젠가는 이해할 수 있을 거야.”

[치, 뜬구름 잡는 소리. 전 주인도 그러더니…….]

“말로 설명하긴 힘든 문제거든. 직접 겪고 보는 수밖에.”

[야, 그럼, 그거라도 가르쳐줘. 넌 가족도 아닌 사람을 왜 그렇게 특별하게 대하는 건데?]

에키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는 턱을 괴고 쉼터 쪽을 내려다보았다. 몇 차례 입술을 달싹이다가, 조그맣게 대답해 주었다.

“그 사람을 좋아하니까. 좋아하는 사람은 가족이 아니라도 특별해져.”

[좋아해서? 잘 모르겠어. 그건 즐거운 거랑 비슷한 느낌이야?]

“아니, 많이 달라. 좋아하기 때문에 괴로워지기도 해.”

[뭐야, 이상해! 자길 괴롭게 만드는 사람을 왜 특별하게 대해?]

“설명하기 어려운데, 그건.”

에키가 어깨를 으쓱이자 마검은 혼자서 이해해 보려는지 한참을 낑낑거렸다. 그러다 결국 다 포기했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이것도 시간이 지나면 알 수 있게 돼?]

“아마도?”

살짝 웃으며 대답하는데,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인기척이 났다. 돌아보지 않고도 알 수 있다. 막사에서 자고 있어야 할 유리엔이 그녀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로드? 왜 주무시지 않고.”

“오늘따라 잠이 잘 오지 않아서. 낮잠을 과하게 잔 모양이다.”

담담하게 대꾸한 그가 그녀가 앉은 그루터기 옆 바위에 걸터앉았다. 에키는 그가 곁에 앉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요 일주일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익숙해진 덕분이었다. 마주치기만 해도 긴장하고 정신이 반쯤 나가던 예전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쉼터는?”

“여전히 조용해요.”

“그렇군.”

대화는 거기에서 멈췄지만 어색하지는 않았다.

에키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이 총총하고 달은 둥글었다. 봄의 끝자락이라 스치는 공기는 딱 좋게 서늘했다. 예쁜 밤이었다.

그녀는 하늘에서 시선을 내려 옆을 보았다. 골짜기에서는 보이지 않을 위치에 피워둔 모닥불의 불빛이 등 뒤에서 어른거렸다.

반쯤 어둠에 잠긴 채 유리엔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밤처럼 고요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허리에 매어둔 아메시스트를 만지작거렸다. 그러다가 불쑥 말을 꺼냈다.

“로드.”

유리엔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약간 움직였다. 어둠은 달빛만으로도 대낮처럼 볼 수 있는 그녀의 시야를 방해하지 못하지만, 흘러내린 머리카락에 가려서 그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충동적으로 물었다.

“지금, 대련하실래요?”

절반은 충동이었으나 절반은 아니었다. 계속 대련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이 딱 적당했다. 식사 중에 대련을 청할 순 없고, 밤새 쉼터를 지켜봤던 사람에게 대련을 청하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일주일째 기회를 잡지 못했었다.

그녀의 제안에 유리엔이 흠칫 놀라며 몸을 굳혔다. 그 바람에 머리카락이 흔들리며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가늘게 떨리는 은빛 속눈썹 아래로 하늘색 눈동자가 커다랗게 떠졌다. 호흡을 멈추고, 입이 살짝 벌어진다.

그 상태로 그는 한동안 눈조차 깜박이지 않았다. 달빛이 그의 흐트러진 머리카락 위에 고였다.

그리고 느릿하게,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되묻는다.

“……진심인가?”

그 부드러운 반문이 에키에게는 명치를 파고드는 서늘한 칼날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진심으로 대련할 생각이 아닌데, 그는 저토록 동요하고 있다. 거짓말보다 더한 짓일지도 모른다. 지금이라도 아니라고, 거절할까.

하지만 그녀는 알아야 했다. 알고 싶었다. 그가 그녀에게 관심을 두는 이유를. 그러지 않고서는 나아갈 수 없었다. 계속 제자리에 맴돌며 그를 보며 설렜다가, 의심하고, 멋대로 기대했다가, 정신을 차리고 부정하는 짓을 반복하기만 할 테니까.

“네. 로드께서 괜찮으시다면.”

그의 눈을 피하며 대답하고, 에키는 그루터기에서 일어났다. 대련할 만한 공간이 있는 안쪽으로 몇 걸음 옮겼다.

유리엔은 곧바로 따라오지 않고 잠시간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일어나서 그녀 쪽으로 다가왔다. 다가오는 걸음이 약간 균형을 잃고 있었다.

에키는 그가 자신의 맞은편에 똑바로 설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그는 빈손이지만, 성검을 쓰면 되니 따로 검이 필요하진 않았다. 에키는 한 손을 아메시스트의 손잡이에 올리고 입을 열었다.

“제가.”

목소리가 긴장으로 갈라졌다. 그녀는 헛기침을 몇 번 했다. 간신히 목소리를 고른 후에 다시 말했다.

“제가, 선공하겠습니다.”

“……알겠다.”

“검을 드시면 시작할게요.”

“그러지.”

사이에 거리가 조금 있는데다 한밤 중이지만 에키는 그가 뚜렷하게 보였다. 그는 이 순간이 믿기지 않는 것처럼 멍한 낯을 하고 있었다.

그가 오른손을 늘어뜨렸다. 손바닥의 황금색 문양에서 빛이 번지듯 퍼져 나와 하얀 성검을 이루었다. 그는 오른손을 움직여 성검을 쥐려다가, 그것을 놓쳐버렸다.

“아.”

랑기오사는 소리 없이 바닥에 꽂혔다. 무심결에 신음을 흘린 유리엔이 왼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그러곤 오른손을 쥐었다 폈다 반복해 보더니, 바닥에 꽂혀 있는 검을 향해 그 손을 뻗었다. 내미는 손은 눈에 띄게 떨고 있었다.

‘왜……?’

창천기사단장인 그가, 검을 놓칠 정도로 손을 떨다니. 왜 떠는 걸까. 두려워서? 기뻐서? 무슨 감정이 그를 저토록 긴장하게 만드는 걸까. 알 수가 없었다.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어떤 감정으로 대련을 기대했건 간에, 끝나고 나면 그는 실망하게 되겠지.’

얼음물으로 머리를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실망할 거다. 그녀는 지금부터 검으로 거짓말을 할 테니까. 그에게 상처를 주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 생각을 하자 눈가가 화끈해졌다.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솟는다. 에키는 간신히 그것을 참았다.

‘안 돼, 진심으로 상대했다간…… 들켜버린단 말이야.’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