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55화
유리엔과 대화할 때마다 머리가 굳어버린 탓일까. 내내 진심으로 검을 맞대는 대련만 생각했었다.
‘대련을 하고 나면…… 날 스콰이어로 삼은 이유와, 탄신 연회 때 내게 가졌다던 개인적인 관심까지, 모두 알려 주겠다고 했었지.’
궁금하다. 미친 듯이 궁금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대체 ‘에키네시아 로아즈’에게서 뭘 보았기에, 자꾸 그녀에게 관심을 두는지.
정말로 회귀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생도라 의심하고 있는 것뿐이라면, 그녀가 마검의 악마인지 관찰하고 있는 거라면, 왜 그녀에게 그런 표정들을 보여주는지. 그 표정들이 다 시험이자 거짓일 뿐인지.
‘대련하고 싶어. 아니, 정확히는 대련을 해서, 그의 생각을 듣고 싶어.’
에키는 저도 모르게 허리에 걸려 있는 아메시스트를 만지작거렸다. 그가 오직 그녀를 위해 준비한, 그처럼 하얗고 예쁜 검. 그녀의 눈동 자와 같은 색의 자수정이 박혀 있는 검.
〈언젠가 그대와 검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군.〉
열차 안에서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앨리스와 대련했던 것이 생각난다. 처음으로 즐거움을 느낀 대련. 유리엔과도 아마, 앨리스와 했던 것보다 훨씬 더, 즐거울지도 모른다. 진심으로 검을 맞댄다면.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의 앞에서 숨겨야 할 것이 너무나 많았다. 대련을 받아들이고, 엉망으로 패배하자. 그렇게 결심하며 그녀는 손잡이를 가만히 움켜쥐었다가 놓았다.
중간에 점심을 먹고, 늦은 오후쯤에 그들은 산과 산 사이 작은 골짜기에 도달했다. 산이 높지 않았기에 골짜기도 깊지 않았다.
능선에서 내려다보니 여름이 가까워지며 싱그러워진 나무들 사이로 허술한 헛간 같은 것이 보였다.
“저곳이다.”
유리엔이 멈춰서 그 헛간을 가리켰다. 에키가 의아하게 그를 올려다보자, 그가 설명을 덧붙였다.
“이 근처의 사냥꾼이나 약초꾼들이 공용으로 사용하는 쉼터다. 우리는 계속 저 쉼터를 지켜보며 기다려야 한다.”
“저기에서…….”
성녀가 살해당했었냐고, 물을 뻔했다. 에키는 혀를 살짝 깨물며 간신히 말을 멈췄다.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되나요?”
겨우 바꿔 물은 질문에 유리엔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꿰뚫어 보는 듯이 선명한 하늘색 눈동자. 그는 조용히 그녀를 보다가, 약간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 일은 밤중에, 요란하게 벌어질 테니 쉽게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빠르면 사나흘 안에, 늦으면 열흘까지 갈 수도 있겠군.”
“로드는 어떻게 그런 걸 아시는 거죠?”
그가 예언처럼 말하는데, 의문을 표하지 않는 것도 이상할 것 같아 일부러 질문했다. 유리엔은 그녀를 보지 않고 가져온 짐 꾸러미를 향해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
“미안하지만 지금은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우선, 여기다 막사를 만들도록 하지.”
“……예, 로드.”
아젠카에서 출발할 때 막사 용품은 미리 챙겨 왔었다.
유리엔과 에키는 골짜기에서 올려다봤을 때 눈에 띄지 않을 만한 적당한 장소를 골라 각자 막사를 쳤다.
에키보다 먼저 막사를 완성한 유리엔은 불을 피우더니 저녁을 만들기 시작했다.
에키는 막사 안에 짐을 풀어놓다 말고 코를 찌르는 음식 냄새에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가 깜짝 놀랐다.
“로드, 식사 준비는 제가…….”
“정리를 마저 하고 나오도록.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그가 돌아보지도 않고 냄비를 저으며 대답했다. 냄비 안에서는 스튜가 끓으며 고소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에키는 급히 그에게로 다가갔다. 도울 것이 있나 찾아보았지만 이미 모든 재료는 손질되어 냄비에 들어간 후였다. 남은 일은 빵을 꺼내놓는 것이나 스튜를 젓는 일뿐이었다. 그리고 국자는 유리엔의 손에 있었다.
“왜 제게 시키시질 않고.”
그녀가 민망한 낯으로 조그맣게 항변했다. 스콰이어가 있는데 기사가 식사를 준비하다니. 유리엔이 설핏 웃었다.
“내 요리를 믿지 못하겠나?”
“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이런 건 스콰이어가 해야 할 일인데.”
“신경 쓰지 마라. 시간이 남아 했을 뿐이니.”
황족 출신이라곤 믿을 수 없는 능숙함이 그에게서 묻어났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스튜를 조금 뜨더니 작은 접시에 담아 그녀에게 내밀었다.
“맛을 봐주겠나.”
“……그, 으, 네에.”
그녀를 보는 유리엔의 눈빛이 몹시 부드러웠다. 에키는 당황한 상태로 접시를 받아들었다. 김이 폴폴 나는 것을 몇 차례 불어 삼켜보았다. 그녀의 눈이 살짝 커졌다.
“로드께서 요리를 잘하실 줄은 몰랐어요.”
에키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녀가 그를 바라보는 시선에 자연스럽게 감탄이 묻어났다. 유리엔이 슬며시 시선을 피했다. 그는 볼이 옅게 상기된 채로 나직하게 답했다.
“……잘하진 않는다. 먹을 만하게 만들 수 있는 정도지. 나도 스콰이어 출신이니까.”
“네?”
에키는 화들짝 놀랐다. 그가 누군가의 아래에서 스콰이어로 생활했다니. 그녀로서는 도무지 상상하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유리엔이 낮게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놀랄 만한 일인가?”
“어쩐지 로드께서는…… 처음부터 완벽한 기사셨을 것 같아서.”
“그럴 리가 있겠나. 실수를 하고, 실패를 겪고, 방황하기도 했다.”
그가 조곤조곤 말하며 완성된 스튜를 그릇에 떠놓았다. 에키는 마을에서 사왔던 빵을 꺼내 잘라서 쟁반에 올렸다. 물 대신 챙겨온 포도주까지 따라놓자 간이 테이블 위에 소박한 만찬이 만들어졌다.
“로드께서 방황을 했다니, 잘 상상이 가질 않는데요.”
“디트리히가 들으면 웃겠군.”
“디트리히 경이라면, 기, 준기사 분 말씀이신가요? 붉은 머리에 붉은 눈이신?”
기오사 오너라고 할 뻔했다. 에키는 또 혀를 깨물었다. 유리엔이 그녀 몫의 스튜 그릇을 건네며 대답했다.
“준기사 디트리히 사루아를 말하는 거라면, 맞다. 그와는 사관생도 시절부터 친분이 있었으니.”
흰 까마귀 협곡 마물 토벌 때, 바라하와 함께 막사를 치고 있던 그녀에게 디트리히가 떠들고 갔던 말들이 생각났다. 유리엔과 룸메이트였다고 했었지. 그리고 천재들은 다 또라이라고도.
‘그러고 보니 그때 디트리히가 말했던 또라이에, 유리엔도 들어가는 거야?’
말도 안 된다. 상상이 가질 않았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유리엔이 말을 이었다.
“사관학교에 갓 입학했을 무렵에는 마음이 복잡했다. 그래서 디트리히에게 꽤 폐를 끼쳤지.”
“폐라니, 어떤 식으로요?”
“……일단 들지. 식는다.”
그가 그녀에게 스푼을 건넸다. 식사보다 그가 하는 얘기가 훨씬 흥미로웠지만, 그녀는 얌전히 스푼을 받았다.
갓 끓인 스튜와 아침에 마을에서 사온 빵은 이런 산중에서 먹는 식사로는 과분할 정도로 좋았다. 식수 대용으로 마시는 도수 낮은 포도주라지만 그래도 술은 술이라, 술기운이 살짝 돌자 마음도 풀어졌다.
에키는 힐끔힐끔 마주 앉은 유리엔을 살펴보았다. 식사하는 모습마저 정갈하고 우아한 그와, 방황하고 룸메이트에게 폐를 끼쳤다는 과거는 도저히 연결이 되질 않았다.
식사를 마치자마자 에키는 유리엔이 챙기려던 그릇을 빼앗아 들었다.
“적어도 설거지는 제가 해야죠.”
“어차피 할 일도 없으니, 함께 하지.”
그가 그녀가 미처 챙기지 못한 쟁반을 재빠르게 들며 대꾸했다. 말려 봤자 들을 것 같지 않았다. 에키는 포기하고 그와 함께 움직였다.
막사를 친 곳에서 안쪽으로 좀 떨어진 곳에 개울이 고여 만들어진 작은 샘이 있었다.
옆에 유리엔이 있어 장갑을 벗을 수가 없어서, 에키는 장갑을 낀 채로 물에 그릇을 넣었다.
괴상한 모양새라 그가 틀림없이 지적하리라 생각하고 대답을 준비했다. 물에 젖으면 손이 틀까 봐 싫다던가 하는 이유를 댈 생각이었다. 그러나 유리엔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들은 말없이 설거지를 했다. 드레스 차림으로 쪼그려 앉은 그녀나, 흰 제복 차림인 그나 하는 일과 어울리지 않게 보이기는 매한가지였다. 다만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것과 별개로 둘 다 무척 능숙했다.
유리엔은 사관생도와 스콰이어 시절을 거친 덕에, 그리고 에키는 9년에 걸친 기오사 수집 기간 동안 혼자 떠돌며 노숙의 달인이 된 탓이었다.
“로드, 디트리히 경에게 어떤 폐를 끼치셨어요?”
그릇에 남은 물기를 털어내며 에키가 불현듯 물었다. 유리엔이 머뭇거렸다. 눈을 내리깔고 입술을 달싹이더니 얕게 한숨을 쉬었다.
“……그게 그렇게 궁금한가?”
“먼저 말을 꺼내신 건 로드인 걸요. 궁금해질 수밖에요.”
“그대가 말을 거니까, 들떠서 자꾸만…….”
유리엔이 반사적으로 대답하다 말끝을 흐렸다. 들, 뭐? 내가 말을 거는 것에 들떴다고? 그가 흘린 말을 알아들어 버린 에키의 얼굴이 멍해졌다. 그녀의 표정을 본 유리엔이 황급히 눈을 피하고 벌떡 일어났다.
“막사로 돌아가지. 해가 지기 시작했으니 쉼터를 지켜보아야 한다.”
“로드?”
“먼저 가 있겠다. 오늘 밤은 내가 불침번을 서며 지켜볼 테니, 그대는 자도록 해라. 내일 밤은 그대 차례다.”
“로드, 저기…….”
유리엔은 설거지가 끝난 그릇들을 챙겨 들더니 순식간에 개울가를 떠나 버렸다. 에키는 도망치듯 사라지는 하얀 뒷모습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쟤 되게 이상하네. 왜 저래? 너랑 얘기하고 싶었나?]
“……그런가 봐.”
[왜? 뭐 하러? 얘기하면서 약점을 찾아내려는 거야? 아니면 네가 얘기하다가 실수하는 걸 노리나?]
“실수?”
[실수로 네가 내 주인이라는 증거를 흘리길 바라면서, 최대한 많이 대화하려 하는 거지! 오, 나 방금 좀 대단한 추리를 한 거 같아! 그치? 맞지? 이거밖에 없잖아!]
감정을 배제하고 머리로만 생각하면 마검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말투와, 표정과, 몸짓과, 흘러나와 버린 말의 내용이, 자꾸만 다른 것을 가리킨다.
〈아니, 개인적인 관심이었다.〉
마구간에서 그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종처럼 뎅뎅 울렸다.
그럴 리가 없는데. ‘에키네시아 로아즈’와 유리엔은 고작 연회에서 한 번 보았을 뿐, 서로 얘기해 본 적도 없는데. 이해도 납득도 되지 않는다. 이유를 알 수가 없다.
그녀는 복잡해지는 머리를 부여잡고 혼잣말을 내뱉었다.
“대련해야겠어.”
[어? 웬 대련? 쟤랑?]
“응. 해야겠어.”
대련을 하고, 이유를 들어야겠다. 그러지 않았다간 자꾸 다른 생각을 하게 될 것만 같으니까. 에키는 결심을 굳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