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54화
“…….”
“그냥 아무 때나 불러서 주시면 되는데.”
“그대가…….”
“아니면 임명식 때 주신다거나. 기회는 많았잖아요.”
당황하는 유리엔의 모습이 이상하게 간질간질하고 귀여워서, 에키는 놀리듯 캐물었다. 유리엔이 항변하듯 말을 덧붙였다.
“그대가 나를 싫어하는 기색이어서.”
“제가요? 로드를?”
되묻는 에키의 목소리가 저절로 높아졌다. 누가 누굴 싫어해? 염치없이 좋아하고 있다는 걸 깨달아서 미치겠는 판에. 그녀가 반문하자 유리엔이 눈을 내리깔았다.
“이제는 아니란 걸 안다. 저번에 그대가 내게 예쁘…….”
“잠깐, 잠깐, 잠깐만요. 그 뒷말은 하지 않으셔도 돼요. 아니, 제발 하지 말아주세요.”
에키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그의 말을 끊었다. 유리엔의 눈이 둥글게 커지더니 나지막하게 웃었다.
그녀는 빨개진 채 테이블 위에 있는 아메시스트를 쥐었다. 벨트 부분을 허리에 매어보려 하자 스산한 음성이 그녀의 영혼을 울렸다.
[주인아. 주인아. 주인아.]
지금 대답 못 한다는 걸 알면서 왜 부르는 거야, 이 망할 마검이. 에키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벨트를 어떻게 매는 건지 잘 모르겠다. 그녀는 흰 가죽끈을 이리저리 잡아당기다가 빽 높아진 마검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가죽끈을 놓쳐버렸다.
[지금 나 말고 다른 검을 들이는 거야? 응? 예쁘다고 칭찬까지 하면서? 너무해! 나한테는 그런 적 없잖아! 기오사도 아닌 그딴 허접한 거한테! 그거보다 내가 더 예뻐! 내가 더 튼튼하다고! 그런 건 당장 버려!! 허여멀건한 게 완전 못생겼어!]
평소의 칭얼거림보다 훨씬 시끄러운 칭얼거림이었다. 미운 일곱 살짜리가 바닥을 동동 구르며 빽빽 소리치는 듯한. 에키는 반사적으로 귀를 막았다.
[난 착하게 날 버리겠다는 주인 말도 고분고분 듣는데, 주인이란 인간은 아직 내가 있는데도 다른 검을 좋다고 받기나 하고! 주인 미워! 서러워! 삐질 거야! 비뚤어질 거라고!]
귀를 막아봤자 영혼에 닿는 목소리는 그대로였다. 바르데르기오사가 쨍알거리는 소리에 머리까지 울릴 지경이었다. 에키는 가차 없이 오른손에 마나를 흘렸다.
[아야! 아! 이씨, 주인은 나만 미워해…….]
마검이 한껏 부루퉁하게 투덜거리더니 조용해졌다. 아무래도 나중에 따로 대화를 해야할 것 같았다. 한숨을 내쉬는데 불쑥 그녀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로, 로드?”
“매는 것이 어려워 보여서. 잠시 손을 대어도 되겠나?”
어느새 유리엔이 테이블을 돌아 그녀 쪽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는 소파 등받이에 팔을 짚은 채 그녀의 허리에 어설프게 걸린 흰 가죽끈을 내려다보았다.
곧바로 고치려 들지 않고 정중하게 묻긴 했지만, 그가 바짝 다가왔다는 사실 자체에 에키는 반쯤 이성이 나가버렸다. 그녀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실례하지.”
그가 가죽끈을 쥐었다. 그러곤 그것을 그녀의 허리에 한 바퀴 돌려 감고 옆구리 쪽에서 구슬을 얽으며 마무리했다. 그 바람에 그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듯 안았다가 떨어져 나갔다.
“이런 식으로 매면 된다.”
“가, 감사합니다.”
유리엔은 담담히 말하고 물러서더니 객실 문 쪽으로 향했다. 아직 나간 이성이 돌아오지 않은 에키가 무의식적으로 물었다.
“어디 가세요?”
“……목이 말라서. 그대는?”
“아, 전 괜찮아요.”
“다녀오겠다.”
유리엔은 순식간에 객실을 나가버렸다. 혼자 남은 에키는 망연히 허리춤을 더듬다가 양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온 얼굴이 화끈화끈했다.
[쟨 왜 갑자기 나가? 어쨌든 나갔으니까 이제 말해도 되지?]
“아메시스트 버리란 소리 하면 너부터 부러뜨려 버린다.”
[왜! 왜! 와, 벌써 이름으로 부르는 거 봐! 너 원래 검 안 좋아하잖아! 왜 걔만 차별해! 그냥 전처럼 아무거나 쓰다 버리란 말이야!]
“이건 예외야.”
[말도 안 돼! 왜 예외인데? 비싼 거라서?]
“유리엔이 준 거니까…….”
에키는 자신이 한 말에 스스로 동요하여 입가를 만지작거렸다. 그녀는 끝없이 투덜거리는 마검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허리에 매달린 아메시스트를 바라보았다. 그녀를 위해 그가 만들어준 하얀 검.
‘이걸 볼 때면, 이제…….’
악몽 같은 기억보다, 유리엔이 먼저 떠오르겠지. 벼락같은 깨달음이 들었다. 아마 당분간, 어쩌면 영원히. 그녀는 아메시스트를 보면서는 끔찍한 기억을 되새기지 않아도 될 것이다. 영혼의 말단에서부터 온수에 젖어들듯 따스함이 퍼져나간다.
“어떡하지……. 더 좋아지는 것 같아.”
꿈꾸는 듯한 이런 순간들은, 길지 않을 텐데. 현실이 입을 벌려 기다리고 있는데. 그럼에도 막 깨달아 한창 달뜬 감정은 그녀를 쉽사리 놓아주지 않았다. 에키는 그저 외면하듯 눈을 감았다.
* * *
열차는 하루 종일 쉬지 않고 달렸다. 제국 동부에 있는 대도시 크리올라의 역에 도착한 건 한밤중이었다. 역 바깥에는 역에서 내린 손님들을 잡기 위해 밤중에도 마차들이 여럿 서 있었다.
“마차 안에서 잠을 자야 하니까.”
유리엔은 그렇게 말하며 마차를 두 대 잡았다. 그들은 각자 다른 마차에 타고 목적지를 향해 출발했다. 꽤 피곤했던 에키는 마차에 탄 지 얼마 되지 않아 잠들었다.
피와 살점이 고인 진창이었다. 그녀는 그 진창에 널브러져 기고 있다. 콧속을 찌르는 비릿한 냄새. 눈이 뻥 뚫린 해골이 피에 반쯤 잠긴 채 그녀를 보았다. 해골이 입을 벌려 말한다.
“네 가족의 피야. 네가 소중히 여기던 사람들의 피야. 무고한 사람들의 피와 눈물이야. 전부 네 거야.”
“으…….”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진창은 그녀를 얽어매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만, 그만해. 마침내 울기 시작할 때, 그녀의 머리 위로 빛이 쏟아져 내렸다. 하얗게 반짝이는 고결한 빛이었다. 그녀는 그 빛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닿아도 될까. 나를 위해 내려온 빛이 맞는 것일까. 저 빛이 나를 구원해 줄 수 있을까.
에키네시아는 빛을 향해 손을 뻗었다. 진홍색 피가 치켜 든 그녀의 팔뚝을 따라 그물 같은 무늬를 그리며 흘러내렸다. 붉은 손이 빛에 닿았다. 빛이 부서졌다.
“아.”
부서져 내리는 빛의 조각조각이 모두 새빨갛다. 잘린 머리, 내장이 흘러나온 시체, 일그러진 얼굴, 저주하는 비명, 고여 흐르는 피가 그 조각들에 비쳤다. 빛은 붉게 물들어 쏟아져 내렸다.
“내가 망가뜨린 거야?”
무너진 빛이 붉은 조각이 되어 그녀의 진창 위에 쌓였다. 그것이 시체를 만들어냈다.
붉게 물든 하얀 남자의 시체. 감지도 못한 푸른 눈이 똑바로 그녀를 보고 있다. 자신을 이렇게 만든 그녀를 원망하듯이.
이길 거라면서. 지켜봐줘서 고맙다고 말할 거라면서. 믿었는데. 너는. 이게 내가 너를 믿은 대가인가? 내가 네게 기회를 준 결과가 이것인가?
너를 기다려주지 말았어야 했다. 너를 거기서 죽여 버렸어야 했다.
그가 말하지 않은 비난을, 그의 시체를 보며 그녀가 상상해 낸다. 시체의 푸른 눈에 붉은 액체가 고여 흘러내린다. 시체는 웃으며 속삭인다.
“그런 네가, 감히 나를 사랑한다고?”
에키네시아는 비명을 질렀다.
[야, 야, 괜찮아? 왜 잘 자다가 고함을 지르고 그래. 놀랐잖아!]
“아가씨, 무슨 일입니까?”
마검의 목소리와, 마차의 덧창을 열고 돌아보는 마부의 목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에키는 식은땀에 흠뻑 젖은 채 숨을 몰아쉬었다.
“헉, 허억…….”
꿈을 꾼 것 같은데. 어떤 꿈이었지. 아, 악몽. 악몽은 흔히 꿨잖아. 별거 아니야. 익숙한 일이야. 스스로에게 쉼 없이 되뇌자 호흡이 가라앉았다.
곧 에키는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마부에게 말할 수 있었다.
“별것 아니에요, 좀 악몽을 꿔서.”
“깜짝 놀랐습니다, 허허. 잠자리가 불편해서 그러셨나 보네. 뭐, 일어나실 때가 되긴 했습니다.”
“어디쯤인가요?”
“이제 다 왔습니다. 창문을 열면 마을이 보일 겁니다.”
에키는 굳게 닫아놓은 마차 옆면의 나무창을 열었다. 자욱한 안개가 마차 안으로 훅 밀려들어 왔다. 그것이 식은땀을 식혀주었다.
[너 악몽 꾸는 건 오랜만에 본다? 시간 되돌리고 나서는 처음 아냐? 무슨 꿈이었어?]
“……몰라, 잊었어.”
그녀는 마검에게 대강 답해 주며 가늘게 뜬 눈으로 안개 너머를 바라보았다. 바로 앞에서 달리고 있는 유리엔의 마차 너머로, 조그만 마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작은 마을이었다. 그들은 마을의 입구에서 내려 마차를 떠나 보냈다.
유리엔은 약간의 식량을 구입하고 곧바로 마을을 벗어났다. 그는 이미 목적지를 잘 아는 듯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가 향한 곳은 마을 뒷산이었다.
“괜찮겠나?”
그는 오르막길에 접어들기 직전, 에키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의 시선이 그녀의 굽 높은 구두에 머물렀다. 에키는 반사적으로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그에게는, ‘백작 영애 에키네시아 로아즈’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한 치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품고 있는 감정을 알아차린 후 더 깊어진 두려움은 강박에 가까웠다.
유리엔은 두 번 묻지 않았다. 그가 곧 앞서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에키는 두세 걸음 떨어진 뒤에서 그를 따랐다.
구두를 신고 부풀린 패티코트를 걸친 채 산을 오른다는 건 생각보다 더 불편했다. 다행히 산은 야트막한 동산 정도로 높지도 험하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마스터가 아니었다면 금방 지쳐 쓰러졌을 것이다. 에키는 몰래 몰래 마나를 사용하며 몸을 지탱했다.
유리엔이 앞에서 걷고 있었지만, 타인의 몸속에서 움직이는 마나는 직접 접촉하지 않는 한 감지하는 게 불가능하므로 상관없었다.
물론 몸 밖으로 흘러나온다거나 마나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수준의 움직임을 보인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후자의 대표적인 경우가 대련이라서, 마나를 사용하는 움직임과 그렇지 않은 움직임을 구별할 만한 사람이 상대일 때 마나를 썼다간 마스터인 것을 들킬 확률이 높았다.
그녀가 유리엔과의 대련을 기피하는 가장 큰 이유가 그것이었다. 유리엔을 상대로 하면서 마나를 쓰지 않을 수가 없는데, 지금처럼 그냥 뒤따르면서 마나를 돌려 몸을 지탱하는 것과 검을 맞댄 상태로 마나를 쓰는 건 천지차이니까.
아마 유리엔이라면 대련 중에 그녀가 조금이라도 마나를 써서 움직이면 곧바로 구별해 낼 터다.
‘아니……. 잠깐만.’
패티코트와 구두를 속으로 욕하며 내내 그런 생각을 하다가, 에키는 지금까지 염두에 두지 못했던 사실을 깨달았다.
‘유리엔과 대련할 때, 굳이 제대로 할 필요는 없잖아?’
그녀가 엉망진창으로 검을 휘두르다 패배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당연했다. 그녀는 고작 사관학교 1학년이고, 스콰이어일 뿐이다. 창천기사단장이자 기오사 오너인 유리엔을 상대로 제대로 대련이 되는 게 더 이상했다.
‘왜 이 생각을 못 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