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53화
그 말을 하고서 유리엔은 에키의 반응을 살폈다. 그 기색을 눈치챈 에키는 불현듯 깨달았다.
여기에서 엘기오사 사건에 대해 무언가 알고 있는 티를 내면, 유리엔은 그녀가 지워진 과거를 알고 있는 자, 즉 바르데르기오사의 오너임을 알아채게 될 것이다.
떠보고 있다. 저렇게 말하는 것으로 자신이 기억이 있음을 암시하며, 그녀에게 기억이 있는지를 시험하는 거다. 등줄기를 타고 오싹 소름이 끼쳤다.
에키는 약간의 놀람과 당황을 섞어서 어이없는 듯한 표정을 만들어내었다.
“엘기오사라고요? 그건 행방불명 아니었나요? 게다가 엘기오사의 오너라니…….”
“……목적지에 도달하면 한동안 잠복을 할 것이다. 정확한 시기는 몰라도, 이즈음에 그 장소에서 엘기오사의 오너가 나타날 테니까.”
“그걸 어떻게 아세요?”
“정보의 출처는 밝힐 수 없다.”
유리엔이 쓴웃음을 띄었다. 어딘지 모르게 애달픈 표정. 기억이 있다는 것을 들킬까 봐 초조해진 에키는 그의 그런 기색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장소에서 이 시기에 성녀가 살해당한 거구나. 그 후에 죽은 성녀에게 있던 엘기오사가 발견되었고, 제보를 받고 창천기사단이 와서 조사하는 과정에서 엘기오사의 오너였던 성녀가 살해당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고 했으니까……. 그 아이를 살리려고 미리 가는 거네.’
살해당했던 성녀의 정확한 나이는 모르지만, 아직 어린아이였다는 건 알고 있었다. 기껏해야 열두어 살쯤 되었을 아이.
유리엔은 그 아이를 구하기 위해 중대한 선택을 앞둔 이 시기에 장기간 자리를 비우는 일을 감수하는 거다. 그다운 일이었다.
이 사건에 대해 뭔가 알고 있다는 티를 내선 안 된다. 에키는 몹시 궁금하다는 얼굴로 수긍했다.
“알겠습니다, 로드.”
“기다리는 동안 노숙을 해야 할 텐데, 괜찮겠나?”
“네, 물론이죠.”
“그대의 몸은 그대가 생각하는 것보다 약하다. 무리는 절대 하지 말도록.”
에키네시아의 실력과 몸 간의 불균형을 알고 있는 것처럼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그러나 에키가 그에 대해 의문을 가지기 전에, 유리엔은 다른 말을 꺼냈다.
“그런데, 그대의 검 말이다.”
“제 검이요?”
유리엔의 시선이 그녀가 소파에 올려놓은 싸구려 롱소드에 가 닿았다. 물이 반쯤 빠진 뻣뻣한 가죽 검집에, 투박하기 그지없는 손잡이. 굳이 뽑아보지 않아도 날의 상태도 좋지 못할 게 뻔해 보였다.
그는 망설이듯 말을 고르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검을 사용하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아, 이건…….”
에키는 검을 감추듯 끌어당겼다. 사실대로 말해야 하나. 유리엔에게는 되도록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별 수 없이 솔직히 대답했다.
“검을 손질하기 싫어서요. 대충 쓰다가 버리고 새것으로 바꾸려고 일부러 저렴한 것을 골랐습니다.”
“검을 손질하기 싫어하는 건, 단순히 귀찮기 때문인가?”
예쁜 게 좋다면서 왜 못생긴 싸구려 검을 들고 다니느냐고 물었던 바라하에게는 손질하기 귀찮아서라고 대답했었다. 절반은 진심이었다. 그러나 다른 절반의 진심이 있었다.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유리엔의 눈은 영혼까지 꿰뚫어보는 듯한 새파란 빛깔이었다. 그 눈을 마주하며, 에키는 나머지 절반의 진심을 토해 냈다.
“검을 쥐고 있으면 기분이…… 나빠질 때가 많아서요. 쥐고 있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고 싶었습니다.”
사관학교에 들어오기 전에 비하면 많이 나아지긴 했다. 앨리스를 만나고 앨리스와 대련을 하면서 검을 맞대는 게 즐거울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니까. 위즈덤 클럽 모임에서 파티마와 했던 대련도 괜찮았었다. 끝나고 나서 검에 대해 대화하는 것도 꽤 재미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자 있을 때 검을 쥐거나 만지는 건 싫었다. 손질 같은 건 당연히 할 생각이 없다. 검을 손질하려면 칼날을 계속 들여다보고 있어야 하는데, 그 과정 자체가 그녀에게는 끔찍한 기억들을 불러오는 방아쇠가 되곤 했다.
살육과 파괴의 기억. 그녀의 검에 죽어간 사람들. 칼날에 묻혔던 수많은 피들.
지금 그녀의 눈앞에서 숨 쉬고 있는 하얀 남자를 피로 물들였던 기억은 특히나 아픈 흉터들 중 하나였다.
새삼 그것이 떠오르자 가슴께가 서늘해졌다. 그런 짓을 저질러놓고 그를 사랑한다니, 자신이 추악하게 느껴졌다.
감정이 순간적으로 범람하여 얼굴에 표가 난 모양이었다. 그녀를 보는 유리엔의 눈이 흔들렸다. 에키는 급히 표정을 수습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가볍게 말했다.
“검 손질이 귀찮은 게 제일 큰 이유지만요.”
“역시 그대는…… 검이 싫은가?”
“…….”
그렇게 묻는 그의 음성은 무겁고, 눈꺼풀은 미세하게 떨렸다. 싫어하지 않는다고 대답해야 하는데 입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자 어색한 정적이 생겨났다. 에키는 간신히 대답을 만들어냈다.
“즐거울 때도 있어요.”
“어떤 때에?”
“대련할 때……. 검으로 대화를 나누는 느낌이 들 때가 있거든요. 그럴 때는 즐겁습니다.”
유리엔의 얼굴이 희미하게 밝아졌다. 그가 입꼬리를 약간 올리며 속삭이듯 말했다.
“언젠가 그대와 검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군.”
또다시 대련 요청. 에키는 저도 모르게 움찔 몸을 굳혔다. 그것을 알아차린 그가 황급히 덧붙였다.
“독촉하는 것이 아니다. 미안하군.”
“아, 아니에요.”
“어쨌든, 그럼…….”
유리엔은 서두를 꺼내놓고 말을 잇지 않았다. 우물쭈물하는 느낌. 대련 얘기에 당황했던 에키가 완전히 진정할 때까지도 그는 계속해서 망설이고 있었다. 그녀는 의아하게 그를 살피다가 은발 사이로 보이는 귀가 약간 붉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뭐지?
“그, 그대가, 그 검을 쓰는 이유가, 그런 것이라면…….”
유리엔이 더듬거리며 말하다가 헛기침을 했다. 뭔가 수줍어하는 기색인데. 그녀보다 큰 남자에게 수줍다는 표현을 하자니 민망했지만, 지금의 그를 보자니 그 표현 외의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에키가 말없이 기다리고 있자 유리엔이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벌떡 일어났다. 그가 짐칸의 자기 가방을 열고 그 안에서 길쭉한 꾸러미를 꺼냈다. 금실로 가장자리에 수를 놓은 흰 가죽으로 둘둘 말린 물건이었다.
자리에 앉은 그가 그것을 그들 사이의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는 머뭇거리며 그 가죽 꾸러미를 내려 다보다가 심호흡을 했다. 그러곤 에키 쪽으로 그것을 밀어놓으며 조그맣게 말했다.
“그대 것이다.”
에키는 멍하니 자신 앞에 놓인 꾸러미와 그를 번갈아 보았다.
“이건…….”
“그건 손질하지 않아도 된다. 따로 관리해 줄 필요도 없고. 마법이 걸려 있으니.”
마법? 손질? 설마. 에키는 홀린 듯이 꾸러미를 묶고 있는 끈에 손을 대었다. 매듭은 슬쩍 잡아당기는 것만으로도 미끄러지듯 풀렸다. 금실이 수놓아진 부분이 까끌까끌하게 손끝에 스쳤다.
묶인 것이 완전히 풀리자 하얀 가죽은 저절로 벌어지며 속에 있는 물건을 내보였다. 그 안에는 한 자루의 검이 놓여 있었다.
검은 전체적으로 백색이었다. 하얀 가죽 검집에 보라색으로 문자가 수놓아져 있었다.
아메시스트(Amethyst).
검의 이름인 모양이었다.
이름 그대로 손가락 한 마디보다 조금 더 큰 선명한 자수정이 가드에 눈동자처럼 박혀 있었다. 그 주위로는 홈을 파고 안쪽에 자수정 가루를 채워 만든 보라색 선으로 마법진을 그려놓았다. 검에 걸려 있다는 마법이 그 마법진을 매개로 동작하는 듯했다.
검집에는 구슬처럼 가공한 자수정으로 장식한 흰 가죽끈이 연결되어 있었다. 벨트와 유사한 형태였는데, 가느다란 가죽끈이 자수정 구슬과 함께 겹겹이 연결된 게 드레스 위에 걸쳐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예뻤다. 아예 처음부터 드레스 위에 검을 찰 수 있도록 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벨트로 보였다.
에키는 넋을 놓고 그것을 내려다보다가 손잡이를 쥐었다. 마법진이 새겨진 흰 손잡이는 착 달라붙듯 감촉이 좋았다. 무게는 보기보다 가벼웠다.
가로로 눕힌 상태에서 천천히 검을 뽑아보았다. 하얀 검집 밖으로 거울처럼 반들거리는 칼날이 드러났다. 매끄러운 금속의 광택이 한눈에 보기에도 예리했다.
칼날의 형태 자체는 일반적인 롱소드와 큰 차이가 없었다. 특징이라면 날의 중앙에 길게 파져 있는 홈인 풀러(Fuller)의 안쪽에 작게 검의 이름인 아메시스트가 새겨져 있다는 정도였다.
몹시 예쁜 검이었다. 어딜 봐도 맞춤 제작 수제품일. 그것도 그녀를 위해서 만들어진 듯한. 에키는 손끝으로 풀러의 안쪽에 새겨진 글자를 쓸어보았다.
“아메시스트가 검의 이름, 맞나요?”
“그래. ……마음에 드나?”
유리엔이 조바심이 묻어나는 음성으로 물었다. 에키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다양한 감정과 수많은 생각이 불꽃놀이의 불꽃처럼 터졌다가 사그라들었다. 그녀는 조금씩 더 빠르게 두근거리는 심장을 간신히 가라앉혔다.
‘스콰이어에게 로드가 검을 선물하는 건 흔한 일이잖아.’
기사가 자신의 스콰이어에게 주는 선물로 가장 흔한 게 검일 터다. 그러니까 큰 의미가 담겨 있는 물건은 아닐 것이다. 창천기사단장쯤 되는 위치면 스콰이어를 위해 마법까지 걸린 전용 검을 맞춰주는 게 사치스러운 일도 아니다.
‘쓸데없는 상상은 하지 말자. 그는 그냥 자신의 스콰이어에게 검을 선물한 것뿐이야.’
에키는 겨우 마음을 다잡았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선물을 받은 설렘을 그렇게 가라앉혔다. 그녀가 마음을 다스리느라 대답을 하지 않자 유리엔이 약간 초조하게 말했다.
“이물질이 검의 표면에 남아 있지 않게 하는 마법이 걸려 있다. 날의 강도를 유지하는 마법도, 반년마다 한 번씩 마나를 충전해 주기만 하면 된다. 마나 충전은, 마법사들에게 부탁해도 되고, 아니면…….”
유리엔이 말끝을 흐렸다. 그는 에키를 피해 시선을 돌린 채 뒷말을 마무리했다.
“……내가 충전해 줄 수도 있다.”
에키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를 비껴난 곳에 눈을 두고 있는 유리엔의 귀는 여전히 불그스름했다. 그는 불안해 보였다. 그녀가 자신이 준 검을 싫어할까 봐 걱정하는 듯했다.
에키는 웃었다. 딱히 의도하지 않아도 저절로 입술이 휘어지며 입꼬리가 깊게 파였다. 눈매가 풀렸다.
“감사합니다, 로드. 정말 예뻐요. 잘 쓰겠습니다.”
몇 마디 되지 않는 말인데 한 마디씩 말할 때마다 유리엔의 얼굴이 차츰 밝아지는 게 보였다. 그가 그녀를 마주보았다. 도저히 억누를 수 없는 기쁨이 새어 나와, 그의 얼굴을 생기로 가득 채웠다.
백 마디 말보다 강렬한 몇 초의 미소. 마주하고 있는 그녀의 심장이 철렁할 정도로.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군.”
“……이거, 일부러 맞추신 건가요?”
“그렇다. 부담스러운가?”
유리엔이 움찔 놀라더니 조심조심 물었다. 에키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기성품 같지가 않아서 여쭌 거예요.”
“그대를 스콰이어로 임명하기로 했을 때 제작을 맡겼다. 완성된 게 얼마 전이라서. 그대에게 줄 기회를 잡느라…….”
들뜬 어조로 말하던 유리엔이 아차 하며 뒷말을 얼버무렸다. 그가 애써 담담한 얼굴로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나 에키는 이미 들어버렸다.
“계속 줄 기회를 기다리고 계셨던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