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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든 꽃-52화 (52/211)

검을 든 꽃 52화

“이게 다 뭐예요, 선배님?”

“죄다 로드께 가는 축제 관련 서류야. 예산서, 기획안, 요청서, 설문조사…….”

“축제요?”

“여름 태양축제. 한 달도 안 남아서.”

태양축제는 대륙에서 가장 보편적인 축제였다. 한 해에서 가장 낮이 긴 날을 기념하며 6월 20일부터 22 일까지 사흘간 이어지는 대규모의 축제기간.

오늘이 5월 22일이니 정말 한 달도 남지 않았다. 부단장이 창천에서 대부분의 행정업무를 주관하고 있는 탓에, 그의 스콰이어인 바라하도 덩달아 바빠진 모양이었다.

“아젠카에서도 대규모로 축제를 치르나 보네요.”

“몰랐어? 기사단이 주도해서 아젠카 시내에서 성대하게 축제를 개최하는데. 각국에서 일부러 찾아오기도 해. 축제 중간에 창천기사단 사열식도 있거든. 마스터들의 사열식은 장관이니까.”

웃으며 설명하던 바라하가 퍼뜩 무언가를 떠올린 듯한 표정이 되었다. 그가 에키에게 물었다.

“전에 네가 몸이 좋지 않아서 스콰이어가 된 걸 제대로 축하하지도 못했지. 언제 시간이 돼?”

“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문제는 에키가 내일 오전에 바로 장기간 임무를 떠난다는 점이었다. 만약 한 달이 걸린다면 축제 때나 돌아오게 될 텐데. 바라하가 축하해 주겠다는 걸 두 번이나 거절하자니 미안했다.

“혹시 오늘 가능하세요?”

“오늘은, 일이 많아서. 다른 날은? 내일이나 모레는 여유가 있는데.”

바라하가 서류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쉬고 되물었다. 에키는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저, 내일부터 단장님과 함께 장기 임무를 가거든요. 한 달 정도 걸릴 수도 있다고 해서.”

“……단장님과? 그 임무는 혼자 가신다고 들었는데.”

“아, 어제 갑자기 저한테 동행하겠냐고 물으셨어요. 전 그분의 스콰이어니 당연히 승낙했고요.”

“그래서 단둘이 장기 임무를 간다고?”

바라하의 표정이 묘해졌다. 에키가 의아하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네. 왜 그러세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바라하의 일이 급증한 건 유리엔의 그 장기 임무 때문이었다. 축제 준비를 함께 해야 할 단장이 장기간 자리를 비우게 되니, 부단장의 일이 늘고, 덩달아 부단장의 스콰이어인 바라하의 일도 늘었다.

유리엔이 떠나기 전에 최대한 많은 일을 처리하긴 했지만 그래도 빈 자리는 어쩔 수 없는 법이었다.

그러니까 단장 때문에 일이 늘어서 에키네시아의 문병도 가지 못했는데, 에키네시아는 단장의 요청으로 그의 장기 임무에 동행까지 한단 말이지.

바라하가 순간적으로 마구간의 일을 다시 떠올린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유리엔의 시선에 반사적으로 물러났던 일. 그리고 부단장이 부른다는 말을 유리엔이 전해줘서 갔더니 정작 부단장은 왜 벌써 왔냐고 묻던 일. 이어 결절에서 나온 직후, 에키네시아를 끌어안았던 유리엔까지 떠오르자, 그의 미간에 주름이 갔다.

의심이 확신이 되어서 또 다른 의심을 낳았다.

‘내 일이 미친 듯이 늘어난 게 과연 우연일까.’

“선배님?”

“어? 미안,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에키의 물음에 그는 급히 생각을 지웠다. 그리고 빠르게 다른 제안을 던졌다.

“에키, 임무를 다녀와서는 시간이 되겠지?”

“네, 아마도요.”

“돌아오면 바로 태양축제 때일 수도 있겠군. 그럼 축제 때, 반나절 정도 시간을 내주겠어?”

그가 서글서글하게 요청했다. 계속 거절한 게 미안해진 에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럼 그때 뵈어요. 그리고 식사는 제가 살게요. 선배님 덕분에 스콰이어의 일에 대해 많이 배웠으니, 제가 사야죠.”

“흐음. 뭐, 그건 그때 가서. 잘 다녀와라, 에키.”

바라하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인사를 했다. 에키는 그에게 마주 인사를 하고 파티마를 찾아 2학년 여자기숙사로 향했다.

파티마에게 클럽 모임에 한동안 빠지게 될 것 같다는 말을 전하고 돌아오니 벌써 저녁 무렵이었다.

그녀는 앨리스와 함께 식사를 하고 밤늦게까지 짐을 쌌다.

피치 못할 사정을 대비해서 여행용 가죽옷을 챙겨 넣긴 했지만, 짐의 대부분은 드레스와 장신구였다. 유리엔과 계속 같이 다닐 걸 생각하니 도저히 ‘귀족영애 에키네시아 로아즈’의 모습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당연히 짐의 양은 장난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럴 줄 알고 아까 니콜한테서 마법 가방을 빌려 왔다. 보통 가방 다섯 개 역할을 하는 마법 가방은, 니콜이 로아즈 영지에 돌아올 때마다 각종 잡동사니로 방 안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는 원인이기도 했다. 덕분에 에키는 가방 하나에 모든 짐을 챙겨 넣을 수 있었다.

그렇게 준비를 마치고, 다음날 오전이 되었다.

5월 23일, 스콰이어 에키네시아 로아즈는 로드 유리엔 드 하르덴 키리에를 따라 장기 비밀 임무를 떠났다.

6막. 망가지지 않는 것과 가까워지는 것.

에키와 유리엔은 마나 열차를 타고 이동했다. 마나를 원료로 마법을 이용해 달리는 열차는 대륙 곳곳을 연결하는 가장 빠른 이동수단이었다.

유리엔이 예매한 표는 1등 칸으로, 길쭉한 소파 두 개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작은 방 형태의 객실이었다.

그들은 객실에 들어서서 각자의 짐을 짐칸에 올려놓고 마주 앉았다. 그러고 나니 어색한 침묵만이 흘렀다. 에키는 맞은편에 있는 유리엔을 보지 못하고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열차가 출발하는 신호로 종이 울리고, 창밖의 풍경이 움직였다. 흔들거리는 열차의 진동이 벽에서부터 몸까지 전해졌다. 열차는 아젠카 역을 벗어나 들판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딱히 볼 것이 없는 막막한 풍경을 아무 생각 없이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유리엔이 지나치게 고요한 게 신경이 쓰여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는 소파에 기댄 채 팔짱을 끼고 눈을 감고 있었다. 감긴 눈의 긴 속눈썹이 흰 피부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흘러내린 은발이 유리창으로 들어온 햇빛을 머금고 반짝반짝 빛났다. 그림처럼 고요한 모습이었다.

‘잠들었나?’

바짝 긴장하고 있던 에키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그녀가 자세를 고쳐 앉아도 유리엔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에키는 편하게 소파에 기댔다. 다리를 꼬고 무릎에 팔꿈치를 올려 턱을 괸 채 맞은편의 그를 바라보았다.

인상적인 하늘색 눈동자가 눈꺼풀에 감춰지자 그는 살아 있는 사람이라기보다 장인이 공들여 빚은 조형물처럼 보였다.

미미하게 덜컹거리는 열차의 진동과 그와 그녀가 내쉬는 숨소리가 공간을 채웠다. 그 안에서 가만히 그를 보고 있자니 심장이 조금씩 빠르게 뛰었다.

감정으로 채색된 아득한 찰나. 에키는 하염없이 그를 눈에 담다가, 그를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떠올리고, 곧 복잡한 생각에 빠져들었다.

황제, 황제가 아끼고 지지하는 2황자, 외가와 처가의 지원을 받고 있는 1황자이자 황태자, 그들의 대립, 그리고 그들 모두의 경계 대상인 3황자, 유리엔. 황태자가 내민 최후의 손, 디아상트 공녀와의 약혼. 꽉 짜인 올가미 같은 상황.

문득 분수대 앞에서 처음 그와 다시 재회했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 유리엔은 단장이라고 부르는 그녀에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라고 했었다. 그러면서 제 이름을 말할 때 성을 붙이지 않았다.

‘황족의 성……. 뗄 수 있다면 떼어버리고 싶은 걸까.’

어머니를 태어남과 동시에 잃고, 그로 인해 아버지에게 평생 증오를 받아온 삶. 형제들에게 눈엣가시가 되어 선택을 강요받는 삶.

평범한 가정에서 금슬 좋은 부부의 딸로 태어나 사랑받고 자란 그녀로서는 그게 어떤 삶일지 짐작도 가질 않았다.

어쩐지 가슴 한쪽이 아려 왔다.

‘빛 속에서 태어나서, 마냥 고결하기만 한 사람일 줄 알았는데.’

그녀가 아는 유리엔은 그의 정말 작은 일부에 불과할 것이다. 그에 대해 더 알고 싶어졌다. 어떻게 살아왔고, 어떤 꿈을 꾸고 있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이 임무를 마치고 돌아가면 그는 약혼을 하게 되는 걸까.’

로아즈를 위해서는 그가 약혼을 해야 한다.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약혼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디아상트 공녀와 유리엔이 약혼하는 것을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모르겠다. 그녀 자신의 문제라면 몰라도, 이건 유리엔의 문제이니까. 그녀가 그의 문제에 끼어들 자격은 없다. 아무리 끼어들고 싶다 해도. 에키네시아와 유리엔 사이에 있는 관계는, 스콰이어와 로드의 관계뿐이므로.

‘다른 관계라면 약혼 같은 거 하지 말라고 할 수 있을 텐데. 다른 방법으로 당신이 처한 상황을 극복하자고, 함께 노력해 보자고, 할 수 있을 텐데. 내 가문의 안전을 그가 신경 쓰고 있을리는 없겠지만, 어쨌든 로아즈는 내가 지킬 수 있으니까 당신은 마음 가는 대로 하라고 하고 싶어. 그와 내가 만약 연인이었다면…….’

무심코 떠올린 연인이라는 단어에 뜬금없는 망상이 튀었다. 에키는 볼이 달아오르지 않았는지 손으로 더듬다가, 허둥지둥 거울을 꺼내 확인했다. 다행히 얼굴이 빨개지진 않았다.

안도의 한숨을 쉬고 고개를 드니, 파란 눈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 언제 깨어나셨…….”

“잠든 적 없다.”

유리엔이 조용히 대답했다. 에키는 기겁한 가슴을 겨우 진정시켰다. 그녀가 거울을 도로 챙겨놓고 풀어놓았던 긴장을 다시 조이는 동안 유리엔은 가만히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게 부담스러워서 에키는 아무 말이나 꺼냈다.

“로드, 저희 목적지는 어디인가요?”

“제국 동부 크리올라 지방의 작은 마을이다. 밤에 크리올라 역에서 내린 다음, 마차를 타고 다시 이동할 예정이다. 잠은 마차에서 자게 될 것 같군. 아침쯤엔 목적지 근처에 도착하게 될 거다.”

그가 조곤조곤 설명했다. 제국 내라지만 잘 모르는 지방이었다. 에키는 망설이다가 다시 질문을 던졌다.

“임무의 내용, 이제는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유리엔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길게 숨을 삼키고 느릿하게 뱉었다. 입술이 달싹였다가 다물리고, 눈을 내리깐다.

‘긴장하고 있어……. 왜?’

에키가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이 그는 생각을 정리한 듯했다. 그가 천 천히 입을 열었다.

“엘기오사에 대해 알고 있겠지.”

“……네.”

에키는 놀란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애썼다. 유리엔의 약혼 사건이 터진 직후, 종이에 정리해 봤던 과거의 사건들이 떠올랐다. 성녀가 살해당한 다음에서야 치유검 엘기오사가 발견되었던 일. 유리엔이 말을 이었다.

“이번 임무의 목적은 엘기오사를 회수하는 것, 그리고 엘기오사의 오너를 구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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