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51화
[갑자기 머리는 왜 뽑아?]
“살다 보면 그럴 때도 있는 거야.”
[뭔 소리야? 주인이 이상해졌어.]
“너처럼 살의 충족밖에 모르는 놈은 이해 못 해.”
[야, 그건 내 본능이거든?]
에키는 마검이 투덜거리는 걸 내버려두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성실한 앨리스는 새벽 훈련을 가서 자리에 없었다.
그녀는 옷장을 열고 오늘 입을 드레스를 골랐다. 안쪽을 뒤적거리다 짙은 보라색의 안감 위를 레이스로 짠 얇은 천으로 덮은 것을 꺼냈다.
‘슬슬 여름용 드레스가 필요하겠네. 집에 보내달라고 해야겠다.’
유행이 달라졌을 테니 쇼핑도 좀 할까. 아젠카엔 어떤 의상점이 있지? 에키는 스타킹을 신으며 무심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스스로의 생각에 놀랐다. 치장을 하며 쇼핑에 대해 생각하다니. 그것도 자연스럽게. 몇 년 만이지?
그러고 보니 아침에 바로 일어나지 않고 침대에서 미적거리는 것에도 그새 익숙해졌다. 예전에는 잔다기 보다 잠시 눈을 붙이는 느낌이었고, 돌아온 직후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 있는 게 고역이었는데.
에키는 고개를 들고 거울을 보았다. 앳된 스무 살의 자신이 보인다. 패티코트를 걸치고 코르셋을 조이며 계속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로아즈의 장녀, 백작 영애. 예쁜 것을 좋아하고, 치장을 즐기던 소녀. 이름 없는 마검의 악마가 아닌, ‘에키네시아 로아즈’.
마검에 물든 이후 그녀가 잃어버렸던 원래의 자신이 어느새 되돌아와 있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로 되돌아갔다는 뜻은 아니다. 그녀는 정말 많이 변했다.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노력할 수 있게 되었다. 절제와 인내를 익혔다. 분노하는 와중에도 머리 한 구석은 차갑게 유지되도록 훈련했다. 사람을 보는 시각이 바뀌었다. 좀 더 솔직해지고 좀 더 비밀스러워졌다.
고통스러운 시절 동안 그녀는 내내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 행복을 느껴본 적이 드물었다. 오직 목표만을 생각했다.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행동 외엔 삶을 즐기지 않았다. 더러운 꼴도 많이 보았고, 범죄에 가까운 짓을 저지르기도 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아젠카가 멸망한 후 뿔뿔이 흩어진 기오사들을 고작 9년이라는 시간 만에 전부 모을 수 없었을 것이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영혼이 완전히 뒤집힐 정도로, 큰 변화를 겪었다. 그러나 행복해지는 법을 잊어버리진 않았다. 평범하던 시절의 자기 자신을 완전히 잃어버리진 않았다.
메말라 있던 마음에 여유가 스미자, 사라졌던 것들이 되돌아온다.
하고 싶은 것, 좋아하는 일, 가지고 싶은 물건이 생겨났다. 많이 웃게 되었다. 되돌아온 후 웃은 횟수가 지난 9년간 웃은 횟수보다 많았다.
모든 것이 완전히 해결된 상태도 아니고, 새로운 문제도 생겼다. 전혀 알지 못했던 것들을 알게 되기도 했다. 앞날이 어떻게 될지는 여전히 미지수이고, 변수는 산적해 있었다. 깨달은 감정은 어찌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지워버린 과거보다 지금이 훨씬 나았다. 에키는 보석 핀을 머리에 꽂으며 조금 웃었다.
‘나중에 시간을 내서 쇼핑을 가자. 누구랑 가지? 니콜 언니는 쇼핑을 싫어하니까……. 앨리스는 좋아하려나? 파티마 선배님은?’
같이 간다면 틀림없이 즐겁겠지. 상상을 하자 화장을 하는 내내 자꾸 입꼬리가 올라가서 고생했다. 마무리하고 일어나며 그녀는 문득 다른 생각을 떠올렸다.
‘유리엔은 어떤 스타일을 좋아할까?’
떠올려놓고 혼자 부끄러워져서 뺨이 상기되었다. 오래도록 억눌려 있다 갓 피어난 감정은 너무 달고 보드라워서,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마음이 통제를 벗어나 제멋대로 부푼다.
에키는 그녀가 그러했듯이, 자신을 보고 예쁘다고 말하는 그를 상상해 보았다.
“으아. 으아아…….”
그녀는 괴상한 소리를 내며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손부채질을 하고 동동거리며 간신히 가라앉혔다.
그러다 오른손바닥의 검은 문양이 눈에 들어왔다. 늘 그녀를 경계하게 만드는 과거의 상징. 악몽이 남긴 얼룩.
에키의 눈이 삽시간에 식었다. 얼굴에 몰렸던 열기도 가라앉았다. 그녀는 마검의 증거를 가만 내려다보았다.
[왜 쳐다봐? 할 말 있어?]
“아니, 그냥.”
그녀는 드레스와 맞춰 짙은 보라색의 실크 장갑을 집어 들었다. 장갑 아래로 손바닥의 문양을 감췄다. 참고 있었던 숨이 길게 내쉬어진다.
거울이 눈에 들어왔다. 거울에 비치는 것은 화려한 에키네시아 로아즈. 마검의 악마를 숨기고 있는 여자.
‘유리엔의 그 모든 표정들은, 에키네시아 로아즈를 향한 거겠지.’
탄신 연회때 그는 그녀를 보았다고 했었다. 개인적인 관심이라 했었다. ‘에키네시아 로아즈’에게는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를 둘러싼 상황이나 약혼 문제를 제외하고, 오직 그의 태도만으로 보면.
감히 그 가능성이 이루어지는 걸 원하지는 않는다. 원해서는 안 되니까. 그래도 들키고 싶지 않다. 절대로. 절실하게. 마검을 들켜서 쫓기는 것보다 그녀를 향한 그의 표정이 바뀌는 것을 보게 되는 게 두려웠다.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에키는 오른손을 꽉 움켜쥐고 방을 나왔다.
그녀는 기사단 본부에서 머물고 있는 니콜을 방문했다. 내일부터 유리엔 단장과 장기 임무를 떠나게 되었다는 말을 하자, 니콜이 당황스럽다는 듯 외알 안경을 치켜 올렸다.
“이 시점에, 장기 임무라고? 1주일 이상? 한 달이나 걸릴 수도 있는?”
“으응.”
“말도 안 돼. 지금 상황이 어떤지 제일 잘 알 사람이. 선택을 미루고 어딜 가겠다는 거야?”
니콜이 머리를 쓸어 넘기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에키, 뭐 들은 건 없어? 그 분은 대체 뭐 하러 간다는 거니?”
“임무 내용은 말해 줄 수 없댔어.”
“……허, 참.”
“어쨌든 그래서 내일부터 나도, 단장님도 아젠카에 없어. 언니, 잘 부탁해.”
“디아상트 공녀는 걱정하지 마. 나도 있고……. 오늘 유리엔 단장이 기오사 오너를 공녀의 호위로 붙였어. 자리를 비워야 해서 그런 거였구나.”
“오너? 누구?”
“테레사 경. 바론 경은 남자인데다 부단장이니 테레사 경이 나은 선택이었겠지.”
약혼도 약혼이지만, 디아상트 공녀가 죽었다간 황실이 그것을 핑계로 유리엔을 더 압박할지도 모른다. 니콜에게 그 점도 들었던 에키는 공녀가 안전할 것 같자 내심 안도했다.
여기까지가 이성적인 판단.
디아상트 공녀가 어떤 사람인지, 유리엔과 사이는 어떤지, 그런 감정적인 질문이 튀어나갈 것 같아서 에키는 급히 다른 용건을 꺼냈다.
“저기, 언니.”
“응?”
“언니 생각에는…… 마검을 가져다 둔 게, 2황자 측과 황태자 측 중에 어디일 것 같아?”
“……그걸 알아봤자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니.”
“그래도 알아야지. 우리를 몰살시키려 했던 자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있을 순 없잖아.”
에키의 어조는 차분했지만 묘하게 오싹했다. 니콜은 잠시 침묵하다가 느리게 대답했다.
“솔직히 나는, 2황자 측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 하지만 확신할 순 없어. 증거가 없으니까. 지금까지 내가 말한 정보들은 마탑 내부, 그리고 마법사들 사이에서 알아낸 것들과, 수도의 상황을 조합한 결과물이야. 이 이상의 정보를 알아내려면 황궁 쪽을 조사해서…….”
“아니, 황궁은 조사하지 마. 절대로. 그건 너무 위험해.”
황실의 뒷조사를 하는 게 발각되었다간 반역죄로 몰릴지도 모른다. 지나치게 위험한 일이다. 에키는 니콜을 또다시 잃고 싶지는 않았다. 조사는 다른 방법을 동원하면 되지만, 한 번 잃은 사람은 되찾을 수 없었다. 그녀는 살짝 웃었다.
“더 이상은 알아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고마워, 언니.”
“고마워할 필요 없어.”
니콜이 고개를 젓고는 지친 듯 의자에 기대앉았다. 그녀가 힘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로아즈에 마검을 가져다 놓은 놈이 누군지 알아내면 가만두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이젠 알아낼 수도, 어떻게 할 수도 없어졌구나. 여기서 더 위험해지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 외에는 답이 없으니. 미안해, 에키.”
“언니가 사과할 일이 아니야. 전부, 언니 덕분에 알게 된 거잖아. 공녀의 호위를 자청할 정도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 알아. 그러니 이젠 언니도 조심해.”
에키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니콜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니콜이 움찔 놀라며 맞닿은 손을 내려다보더니 중얼거렸다.
“너, 정말 변했구나.”
“이상해?”
“아니. 마냥 어린애인줄 알았는데, 지금은 뭐랄까…….”
니콜은 마주 앉은 에키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살이 약간 빠져서 여려졌으면 여려졌지 강해 보이진 않는데도, 어쩐지 예전과는 달리 그녀가 챙겨줘야 할 동생 같지가 않았다. 선명한 보라색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묘하게 의지가 되기까지 했다.
마검의 주인이 되었기 때문일까. 그게 이 아이를 이렇게나 바꿔놓은 걸까. 그렇다면 꽤나 씁쓸한 일일 것이다.
“……다 컸네, 에키네시아 로아즈.”
“당연하지. 성년식도 치렀잖아.”
“넌 철들려면 최소 5년은 더 필요할 줄 알았거든.”
니콜의 말에 에키가 샐쭉 눈을 흘겼다. 그 모습이 예전처럼 보여서, 니콜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들은 곧 어두운 이야기를 밀어놓고 일상적인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에키는 니콜과 점심까지 같이 한 후에 물건을 하나 빌리고 헤어졌다. 앨리스에게는 어제 저녁에 벌써 알려 주었으니, 다음으로 소식을 전해야 하는 건 파티마였다. 클럽 모임에 참가를 못 할 것 같으니 미리 이야기를 해야 했다.
에키는 기사단 본부를 가로질러 사관학교 쪽으로 향했다. 그러다가 본부를 벗어나기 전에 회랑에서 익숙한 사람과 마주쳤다.
“에키, 오랜만이네.”
“바라하 선배님.”
임명식 이후로는 처음 만났다. 그 뒤로 앓아누웠고, 그 다음엔 클럽 모임에 나갔으니까. 그녀가 정식 스콰이어가 되면서 스콰이어 예비 교육이 끝났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만날 일도 이제 없었다.
바라하가 그녀를 훑더니 빙긋 웃었다.
“아프던 건 다 나았어?”
“네, 이제 괜찮아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한 번쯤 문병을 가고 싶었는데, 로드께서 너무 부려 먹으셔서.”
바라하가 시무룩하게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눈 아래가 켕했다. 서류를 한 아름 안고 있기도 했고.
덩치가 커서 못 알아챘는데 에키가 들었다간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높은 서류의 산이었다. 그녀는 질린 눈으로 서류더미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