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꽃-50화 (50/211)

검을 든 꽃 50화

“네?”

“무언가…… 이상한 일이라든가, 불쾌한 일이라거나…….”

금방이라도 깨져버릴 살얼음판 위를 더듬듯 조심스러운 물음. 망설임이 물음 끝까지 달라붙어 있었다.

그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했다. 마물 토벌 때 막사 안에서 봤던 것처럼, 긴장한 채 눈을 깜박이고 있는 걸까. 알고 싶은데, 그래도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차라리 결절에 다시 처박히는 게 낫지.

그녀는 처음 겪어보는 깊고 예민한 감정의 떨림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그저 가슴께에서 퍼져 나와 얼굴부터 손끝과 발끝까지 뜨겁게 만드는 열을 느낄 뿐.

오래도록 억눌렸던 감정이 범람하기 시작하자 홍수가 되어 그녀의 정신을 뒤흔들고 있었다.

“에키네시아?”

[야, 너 뭐 해? 서서 졸아?]

정신이 팔려 그의 물음에 대답하질 않았다. 그가 의아한 듯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마검도 옆구리를 찌르듯 말을 걸어왔다. 에키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대답하려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가 뭘 물어봤었지?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그새 까먹어 버렸다. 그녀는 머뭇거리다 겨우 답했다.

“죄, 죄송합니다. 못 들었어요.”

“……혹, 기분이 상할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물었다.”

다시 묻는 그의 말끝이 약간 처졌다. 풀이 죽은 느낌. 자기 감정만으로도 벅찬 에키는 그것을 느끼지 못했다. 그녀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

“별일 없었어요.”

“정말인가? 디……. 누군가를 만나지 않았나?”

그가 튀어나오려던 누군가의 이름을 삼키며 돌려 물었다. 에키는 혼란에 빠졌다.

누굴 만나서 기분 상할 일이 있었냐고? 브레드를 말하나? 유리엔이 그 인간을 어떻게 알지? 클럽 문제 때문인가? 브레드의 클럽이 사고를 치고 다녀서, 단장인 유리엔의 귀에까지 들어간 거라던가?

삽시간에 생각이 주르륵 이어졌다. 그녀는 얼떨결에 대답했다.

“클럽 간의 분쟁이라면, 결투로 해결했습니다. 그리 기분이 상하진 않았어요.”

“……클럽 간의 분쟁? 그건 뭐지?”

“그걸 물으신 게 아니었나요?”

“아니, 나는…….”

둘 사이에서 말이 헛돌았다. 허둥거리던 유리엔이 다시 침착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 클럽 간의 분쟁 외에, 다른 누군가와 마주쳤는지 묻는 거다. 생도가 아닌 사람과.”

“생도가 아닌 사람이요? 그런 사람은 보지 못했어요.”

대체 누굴 말하는 거지. 에키는 내심 갸웃거렸다. 유리엔이 얕게 한숨을 쉬는 게 느껴졌다.

“그럼 되었다. ……몸은 좀 괜찮은가?”

“다 나았어요. 시키실 일이 있다면, 스콰이어 업무를 바로 시작해도 됩니다.”

“아니, 그런 일은 없다. 충분한 휴식을 취하도록. 시간을 빼앗아서 미안하군.”

사무적인 말이었다. 에키는 그가 이제 돌아서서 가리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그는 걸음을 뗄 것처럼 움직였다가, 그대로 멈춰버렸다. 시선이 또다시 이마께에 머문다. 그녀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였다. 한 번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유리엔이 나지막하게 물었다.

“에키네시아. 나와 마주하는 것이 싫은가?”

마구간에서 했던 것과 비슷한 물음. 그러나 그때보다 조금 더 무겁고 좀 더 슬프게 들렸다. 얇게 떨리는 음성. 그게 어쩐지 몹시 안타까워서, 에키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싫지 않아요. 싫은 게 아니라…….”

그녀를 빤히 보고 있던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말문이 턱 막혔다. 그녀에게 집중하고 있는 섬세한 얼굴. 깜박이는 속눈썹. 힘이 없는 눈매가 슬픈 것처럼 보였다. 푸른 눈동자가 물 먹은 하늘처럼 일렁였다. 그가 눈썹을 늘어뜨린 채 가늘게 묻는다.

“싫은 것이 아니라면, 왜 그대는…… 나를 보지 않지?”

그녀를 향하는, 상처받은 듯이 처연한 표정.

미치겠다. 딱 그 생각만 들었다. 감정을 자각하고 나서 그를 보는 건, 그녀에겐 지나친 자극이었다. 그녀는 이런 쪽에 면역이 없었다.

에키의 얼굴이 턱 끝에서 이마 끝까지 새빨갛게 타올랐다. 이성은 이미 홍수에 휩쓸려가 흔적도 남지 않았다. 에키는 자신이 뭐라 말하는지도 모르면서 입을 움직였다.

“예쁘셔서요.”

“…….”

[……야, 너…… 뭐 잘못 먹었냐?]

마검이 답지 않게 망설이는 어조로 물었다. 코앞에서 유리엔의 눈동자가 휘둥그렇게 커지는 게 보였다. 그의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어색한 정적이 그들 사이에 머물렀다.

그제야 정신이 든 에키는 자신이 방금 뭐라고 내뱉었는지를 다시 떠올렸다.

‘예쁘……. 뭐? 내가 미쳤구나.’

그냥 이 자리에서 사라지고 싶어졌다. 라키아기오사는 뭘 하나. 회귀 이전이라면 절대 안 일어날 이런 비정상적인 사태를 두고 결절도 안 만들고 뭘 하느냔 말이다.

에키는 황급히 유리엔의 눈을 피했다. 울 것처럼 표정이 흐트러졌다. 아니, 그녀는 진심으로 울고 싶었다.

그리고 그에게서 나지막한 웃음이 터졌다. 유리엔이 입가를 가리고 웃는다. 에키는 다시 고개를 처박고 레이스 자락을 노려보았다. 부끄러워 죽을 것 같았다. 그 와중에 마검이 혀를 차는 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빌어먹을 마검…….

그녀는 그가 웃음을 그칠 때까지 계속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래서 보지 못했다. 유리엔의 눈빛과 표정에, 어떤 깨달음과 함께, 무언가 결심한 기색이 퍼져나가는 것을.

그는 호흡을 고르고 웃음기가 남은 목소리로 말했다.

“에키네시아.”

“네, 네! 죄송합니다, 로드. 제가 잠깐 정신이 나가서…….”

“아니, 상관없다. 그보다…….”

유리엔이 잠깐 망설였다. 그가 말끝을 흐리자 에키는 살짝 고개를 들었다. 그는 무언가 고민하는 듯 허공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그의 옆얼굴을 따라 그녀의 시선이 맴돌았다. 그러다 갑작스레 그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에키는 움찔 놀라 안 본 척 눈을 돌렸다.

“모레, 아젠카 외부로 나갈 일이 있다. 시간이 꽤 걸릴지도 모른다. 위험할 수도 있는 일이다. 게다가 일정상 사관학교 전체 순위전에 참여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래도, 함께 가겠는가?”

“……예?”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제안이라 얼빠진 채 되묻고 말았다. 유리엔은 담담한 낯으로 덧붙여 설명했다.

“원래 혼자 다녀오려던 일이지만, 만약, 그대가…… 나를 불편해하지 않는다면, 함께 갔으면 한다. 명령이 아니라 청이니, 그대가 원하지 않는다면 굳이 동행할 필요는 없다.”

“대체 무슨 임무인가요?”

“임무의 내용은 지금 말하기 어렵군. ……바로 결정하긴 힘들겠지. 혹, 함께 갈 생각이 있다면 내일까지 알려다오. 특별한 말이 없으면 거절로 알겠다. 다시 말하지만 그대가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다.”

몹시 조심스러운 권유였다. 그는 대답이 두려운 것처럼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에키는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아뇨, 가겠습니다. 스콰이어가 로드의 임무에 동행하는 건 당연한 일이잖아요.”

그리고 곧바로 후회했다.

‘잠깐……. 이건, 유리엔이 다른 사람이 방해하지 않는 곳에서 내가 마검의 악마인지 시험해 보려는 걸지도 몰라. 약혼 문제를 결정하기 전에 변수인 나를 확인해 볼 필요를 느꼈을지도.’

떠오른 생각이 날카롭게 속을 후벼팠다. 갓 깨달은 감정에 물들어 있던 마음이 한순간에 가라앉았다. 닿지 못하는 성검을 지켜보던 때와 같은 아릿한 감각이 속에서 퍼져나갔다.

그러나 그 감각에 빠져들려는 찰나에, 눈앞에서 유리엔이 미소를 지었다. 소년처럼 들뜬 웃음이었다. 볼이 살짝 상기되며 눈가가 곱게 접힌다. 에키의 생각이 정지했다.

“고맙군.”

그가 기쁜 기색이 역력한 음성으로 답하더니, 급히 말을 이었다. 그녀가 취소할까 봐 불안한 것처럼.

“그럼, 모레 오전 10시까지 여행준비를 갖추어서 단장실로 오도록. 일정은 1주일 이상, 상황에 따라 한 달까지 걸릴 수도 있다. 참고해서 준비해라. 필요한 것이 있으면 행정부의 사무관에게 요청하고.”

“……네, 로드.”

“기다리고 있겠다, 에키네시아.”

유리엔이 다감하게 말하고는 돌아섰다.

에키는 그가 멀어지는 걸 멍하니 바라보았다. 지금 얼결에 뭔가 엄청난 결정을 내려버린 것 같은데. 마검의 악마인 게 들킬지도 모르는 위험한 결정을. 그래서 속이 아려왔다.

분명히 그랬는데,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이성이 돌아오질 않았다. 그가 보인 미소만이 눈앞에 맴돌았다.

계속 들키지만 않으면, 어쩌면, 아니, 그래도 약혼 문제가. 거기다 그가 처한 그 빠져나올 수 없는 사정들은?

‘모르겠어……. 지금은, 머리가 안 돌아가.’

[주인아, 너 영 이상하다? 저걸 왜 따라가? 피해 다녀도 모자랄 판에, 단둘이서 같이 다니다가 걸리면 어쩌려고?]

“나도 모르겠으니까 묻지 마.”

[엥? 네가 결정한 거잖아! 모르긴 뭘 몰라? 아, 혹시 그런 거야? 다른 사람 없는 곳에 가게 되면 몰래 쟤를 죽이려고? 우와, 그건 괜찮은 생각이네! 기사단 안에선 보는 눈이 많으니까 으슥한 곳에서, 으악, 악! 아야! 야, 뭐 하는 짓이야!]

에키는 움켜쥔 오른손에 마나를 흘려 넣었다. 마검이 엄살을 부리며 칭얼댔지만 그녀는 기숙사에 돌아갈 때까지 마나를 거두지 않았다.

그리고 발갛게 달아오른 뺨도 계속 가라앉지 않았다. 돌아온 그녀를 본 앨리스가 열이 다시 오른 거냐고 걱정스럽게 물을 정도로.

* * *

다음날 아침, 에키는 눈을 뜨자마자 후회했다.

‘내가 미쳤지. 그걸 왜 따라간다고 해서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자신이 그런 결정을 한 건지, 어이가 없었다. 왜 그랬는지 이유를 알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같은 상황이 다시 온다면 거절할 수 있으리란 보장이 없다는 것도 문제였다.

왜 자신을 마주보지 않느냐고 묻던 유리엔의 얼굴이 너무 처연해서. 거절하면 또 그런 표정을 지을까 봐. 같이 가겠다는 그녀의 대답에 생기를 띠고 웃던 얼굴이 소년처럼 밝아서. 수락했을 때 본 미소만으로도 수락한 가치가 있으니까.

‘그런 표정은 반칙이잖아.’

애꿎은 베개를 쥐어뜯던 에키는 이불에 머리를 파묻었다. 분홍색 머리카락이 흰 이불 위에 어지러이 널렸다. 그녀는 손끝으로 그 머리카락을 감았다 풀었다 하며 고민에 빠졌다.

‘내가 이렇게 얼굴에 약했나. 아니면 유리엔이라서 그런 건가.’

처음으로 사랑하게 된 사람이 너무 미인이라서 어느 쪽인지 모르겠다. 유리엔은 키도 훌쩍 크고, 날렵한 편이라 해도 기사답게 단련한 몸이라 여성스럽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대리석 조각상처럼 섬세한 외모 탓에 그를 보면 아름답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예쁘다가 뭐야, 예쁘다가…….’

“악!”

어제 친 사고를 떠올리다가 머리카락을 감던 손에 과한 힘이 들어갔다. 생머리를 몇 가닥 뽑아버린 에키는 황당한 눈으로 제 손을 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