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49화
“가지고 노는군.”
“미쳤네, 미쳤어. 저 선배는 무슨 자신감으로 결투를 하겠다고 한 거지?”
“야, 진짜 무섭겠다.”
옷깃, 소매 끄트머리, 단추의 실, 신발의 장식, 셔츠 칼라의 뒤쪽, 머리카락 끝부분. 에키는 브레드의 몸에 상처 하나 내지 않으면서 예리하고 정밀하게 그런 부분들만 베어내고 있었다.
처음엔 비웃던 브레드의 클럽원들도 점점 심상치 않은 상황을 알아차리고 안색이 바뀌었다. 떠들던 입들이 하나하나 다물렸다. 그들은 조금씩 뒤로 물러나며 방관자처럼 보이려 애썼다.
브레드는 더 이상 공격을 하지 못하고 겁에 질려 방어적인 자세로 바뀌었다. 독니를 드러낸 뱀들 사이에 맨몸으로 서 있는데, 그 뱀들이 물어뜯을 것처럼 다가왔다가 피부 위를 기어 다니기만 하는 느낌이었다. 언제 돌변하여 물어뜯을지 모르겠다는 점이 더 두려웠다. 차라리 빨리 베이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아무리 막으려 해도 에키의 검은 손쉽게 그의 검을 피해 원하는 부분을 베었다. 칼끝이 사타구니를 벨 듯이 올라오다가 아슬아슬하게 가죽 허리띠에 흠집만을 남기고 물러나자 결국 브레드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
“그, 그, 그만! 그만해!”
브레드가 비명처럼 소리를 내질렀다. 그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에키의 검이 거칠게 덤벼들었다. 브레드는 제 검을 부여잡고 눈을 감아버렸다. 에키의 검이 그의 코끝에 닿을 듯한 거리에서 딱 멈췄다.
“눈 뜨세요, 선배님. 하나도 안 아프셨을 텐데 겁이 많으시네요.”
평이한 어조였지만 브레드에게는 통렬한 조롱으로 들렸다. 그럼에도 반박할 의지조차 남지 않았다. 브레드는 숨을 헐떡이며 침묵했다. 종이 한 장 차이로 코앞에 멈춰 있는 칼날이 소름끼치게 무서웠다. 그 너머로 보이는 보라색 눈동자도.
“패배를 인정하시겠어요?”
“이, 인정한다. 인정해. 검을 치워……!”
검이 깨끗하게 물러났다. 착, 하고 검이 검집에 들어가는 소리가 들리자 브레드는 비틀거리다 제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귀신을 본 듯 허옇게 뜬 낯이었다.
검을 집어넣은 에키가 그를 향해 다가가자 브레드는 저도 모르게 땅을 짚은 채 뒤로 물러났다. 꼴사나운 모습이었지만 의외로 생도들 사이에서 비웃음이 터지진 않았다. 브레드의 추한 꼴보다 에키네시아가 보인 검술의 압박감이 더 대단했기 때문이었다.
에키는 브레드의 앞에 서서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일어나세요, 선배님. 약속한 대로 무릎 꿇고 사과하셔야죠. 우리 클럽장님께.”
넋을 놓고 있던 파티마가 그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에키에게 다가오며 고개를 저었다.
“어, 에키, 난 괜찮아.”
“제가 안 괜찮아요. 브레드 선배님, 뭐 하세요?”
붉은 기가 도는 보라색 눈동자가 차갑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칼날이 목덜미를 긁어오는 듯한 감각에 브레드는 허둥지둥 몸을 일으켜 무릎을 꿇었다. 그가 파티마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내가, 말실수를 했다. 용서해 줘…….”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앨리스가 딱딱한 말투로 끼어들었다.
“실수? 당신의 태도는 실수가 아니었습니다. 평소 생각하던 대로 행동한 것 아니었습니까? 실수라는 핑계로 잘못을 축소하려 하지 마십시오.”
“그러게요? 깜박 넘어갈 뻔했네. 앨리스, 지적 고마워요.”
에키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브레드에게 시선을 돌렸다. 안 그래도 파랗던 브레드는 그 시선에 꺼멓게 죽어갔다. 그가 급하게 다시 머리를 굽혔다.
“마, 맞아, 평소에 생각하던 게 튀어나와서! 내가 어리석었어. 미안하다, 정말로. 다신 이러지 않을 테니까!”
“어어, 음……. 네, 알겠어요. 다신 그러시면 안 돼요? 이제 우리 클럽에도 시비 걸지 마시고요. 보셨죠? 우리 클럽원들이 저보다 더 무서우니까.”
볼을 긁적이던 파티마가 웃으며 말했다. 브레드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고 앨리스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더는 뭐라 하지 않았다. 에키는 옅게 한숨을 쉬었다.
로잘린 디아상트는 거기까지 지켜본 후 몸을 돌렸다. 그녀는 조용히 연무장에서 멀어졌다.
제6연무장에 대부분의 생도가 몰려 있는지 한산해진 사관학교를 가로질러, 기사단 본부 쪽으로 돌아갔다. 그러다 길목에서 급히 달려오던 누군가와 딱 마주쳤다.
“……디아상트 공녀.”
“어머, 유리엔 전하, 아니, 경.”
유리엔은 약간 흐트러진 호흡을 고르고, 서늘한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혼자서 어딜 돌아다니는 건가.”
“창천기사단 내부는 안전하지 않나요?”
“그대가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지는 그대 스스로도 잘 알 텐데. 호위 기사를 항상 대동하도록.”
로잘린은 무표정한 남자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촉이 왔다.
신입생을 입학 첫날부터 스콰이어로 지명했다는 것, 그 신입생이 로아즈 백작가의 영애라는 것. 그 두 가지 사실 때문에 그녀는 몰래 에키네시아 로아즈를 살펴보러 다녀왔다. 그녀의 하녀가 물어온 위즈덤 클럽 모임에 대한 소문을 참고해서.
로잘린은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기 위해 질문을 던졌다.
“유리엔 경, 절 걱정해서 직접 달려오신 게 아니죠?”
“그대의 신변은 중요하지. 노리는 이가 많으니.”
“그게 아니라, 제가 어디로 갔는지 알게 되어서 몸소 찾으러 오신 거잖아요. 제 신변을 우려하신 거면 호위 기사만 보내셨어도 되는데.”
그녀는 생긋 웃으며 덧붙였다.
“에키네시아 로아즈……. 당신의 스콰이어를 제가 만나러 간다는 얘기를 들으셨군요. 제 근처에 심어둔 귀가 분명 있으실 테니.”
“…….”
유리엔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떴다. 은빛 속눈썹에 감싸인 푸른 눈은 손을 대면 베일 것처럼 날카로웠다.
“디아상트 공녀. 선을 넘지 마라.”
“어머나, 그녀가 당신의 선인 거군요?”
“제멋대로 해석하는군. 상상은 자유다만. 명심해라.”
유리엔이 로잘린에게로 다가왔다. 그가 얼어붙을 것 같은 음성으로 속삭였다.
“나는 아직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았다.”
“……경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있었나요?”
“내가 랑기오사를 포기하겠다고 결정한다면.”
로잘린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성검의 주인이 지금, 성검을 포기할 수도 있다는 가정을 했다. 자신의 입으로. 그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성검 랑기오사는 악한 일을 저지르면 더 이상 쥘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랑기오사의 오너는 보편적인 인간의 정의와 어긋나는 일은 하지 못한다.
실상 아젠카의 군주이자 창천기사단의 단장인 유리엔을 제국의 황실이 경계심 없이 대하는 가장 큰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언제나 올바르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니, 이 얼마나 다루기 쉬운 존재란 말인가.
그런데 그가 만약 성검을 놓아 버린다면.
“……선택의 범위가 무척 넓어지겠지.”
유리엔이 내뱉은 말은 차갑지만 부드러웠다. 그러나 그것이 아까의 날카로운 경고보다 더 섬뜩했다. 로잘린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디아상트 공녀. 이만 방으로 돌아가도록. 앞으로는 호위 없이 돌아다니지 않았으면 한다.”
그 말을 남기고 그는 사관학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로잘린 디아상트는 한동안 걸음을 떼지 못하고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간신히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후에, 그녀는 방으로 돌아가며 홀로 중얼거렸다.
“세상에, 생각보다 깊잖아. 이러면 가능성이 있을지도…….”
* * *
브레드와 노블레스 클럽이 떠나간 후 위즈덤은 클럽 모임을 이어나갔다.
신입 클럽원 선발 문제는 에키와 앨리스 둘 모두 클럽장인 파티마에게 맡기겠다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서로 대련을 하고 잠깐 대화를 나눈 후 첫 모임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대련이 끝나자 모여 있던 생도들도 하나 둘 흩어졌다. 몇몇 생도들은 클럽 가입 문의 때문인지 파티마에게 따라붙었다. 에키와 앨리스는 함께 기숙사로 돌아갔다.
“오늘 대련하면서 느꼈는데, 아무래도 저는 상단을 공격할 때 생각보다 힘이 잘 실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에키가 보기엔 어떻습니까?”
“으음……. 앨리스는 검을 높게 들 때 하체의 중심이 흔들리는 경향이 있거든요. 중심을 잡으려면 보폭을 좀 더 넓게 하는 편이…….”
나란히 걸으며 대화를 이어가던 에키의 말끝이 흐려졌다. 그녀는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에키?”
앨리스가 따라오지 않는 그녀를 의아하게 돌아보았다. 에키의 시선은 정면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시선을 따라간 앨리스는 은발의 남자를 발견했다. 그를 알아본 앨리스는 급히 아젠카식 경례를 했다.
“아르 세밧티엠. 단장님을 뵙습니다.”
“앨리스 생도, 자리를 피해주겠나. 내 스콰이어와 할 말이 있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받아준 유리엔이 담담하게 말했다. 앨리스는 납득하고 에키를 돌아보았다.
“예, 단장님. 그럼 먼저 가 있겠습니다, 에키.”
“아……. 그래요, 앨리스.”
에키는 반사적으로 앨리스를 붙잡고 싶어지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앨리스는 다행히 그녀의 이상한 반응을 알아채지 못하고 인사를 한 다음 기숙사 쪽으로 향했다.
오솔길에는 에키와 유리엔만이 남았다. 에키는 그대로 고개를 푹 숙였다.
‘어떡하지. 눈을 못 마주치겠어.’
마음을 자각하고 나니 제대로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수줍음과, 죄책감과, 그가 약혼을 할지도 모른다는 상황이 범벅이 되어 고개를 끌어내렸다.
그녀는 아래로 보이는 드레스 자락의 레이스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리엔 역시 한동안 말이 없었다. 에키는 그의 시선이 숙인 그녀의 이마께에서 맴돌다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타고 내려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자 지금 머리 모양이 어떤지 몹시 걱정되었다. 손을 들어 만져보고 싶지만 그러기엔 민망했다.
‘으, 대련하느라 내 머리, 흐트러져서 엉망일 것 같은데…….’
옷차림은 괜찮나? 화장은? 당장이라도 거울을 확인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마검의 악마를 연상할까 봐 드는 불안감만은 아니었다. 그냥, 그가 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어떨지가 너무나 신경이 쓰였다.
[둘이 대체 뭐 해? 할 말 있다더니 왜 쟤는 아무 말도 안 하고? 누가 못 참고 먼저 말하나 내기라도 하는 거야?]
마검이 지루한지 투덜거렸다. 긴 침묵 끝에 유리엔이 입을 열었다.
“에키네시아.”
“……네, 로드.”
대답이 좀 늦었다. 스콰이어가 된 그녀에게 유리엔은 더 이상 생도라는 호칭을 붙이지 않았다. 지금껏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부른 게 한두 번도 아닌데, 고작 호칭이 붙지 않았다는 이유로 가슴께가 덜컹 내려 앉았다.
‘아냐, 임명식 직후에도 이름으로 불렀잖아. 그 땐 이렇지 않았는데, 이건 그냥…….’
마음을, 자각해 버려서. 안 그래도 그에게 기울던 온 신경이 발긋하게 물들어 버리는 바람에.
그것을 새삼 깨달은 에키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목덜미부터 귓불까지가 화끈거린다. 이래서야 절대로, 아니, 그전에도 고개를 들 생각은 없었지만, 이젠 더더욱 고개를 못 들겠다.
이름을 불러놓고 유리엔은 또 말이 없었다. 시선이 진득하게 그녀의 이마 쪽에서 맴돈다. 그 아래의 얼굴이 알고 싶은 것처럼. 그러다 그가 다시 말을 꺼냈다.
“무슨 일이 있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