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꽃-48화 (48/211)

검을 든 꽃 48화

앨리스가 얼굴을 굳히고 브레드를 향해 다가섰다. 그녀는 딱딱한 어투로 말했다.

“파티마 선배님께 모욕적인 발언을 한 것을 사과하십시오, 당장.”

“넌 또 뭐야? 선배들 말하는데 감히 끼어들어? 이년이나 저년이나, 위아래도 모르는 것들만 끼리끼리 모여서는. 당장 안 비켜?”

브레드가 눈을 부라리더니 손을 들어올렸다. 앨리스는 혐오스럽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윗사람이 존중받기 위해서는, 윗사람다운 태도를 보여야 하는 법입니다. 당신 같은 사람이 어떻게 사관생도가 되었는지 의문이군요. 스스로 말하면서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뭐? 이게 미쳤나, 계집애가 따박따박 대들기는……. 헛소리 말고 꺼져!”

브레드가 짜증스럽게 손을 휘둘렀다. 앨리스는 밀쳐지는 대신, 간단하게 그의 팔을 막았다. 팔을 가로막힌 브레드의 얼굴이 분노로 벌겋다 못해 시커멓게 변했다. 파티마가 가만히 나서서 앨리스의 옷깃을 잡아 당겼다.

“앨리스 생도, 괜찮아. 무시하고 우리 할 일이나 하자.”

“불의를 피해갈 생각은 없습니다, 파티마 선배님.”

“무서워서 피하니, 더러워서 피하는 거지. 가자.”

“이년들이!”

코앞에서 앨리스와 파티마가 주고 받는 말에 브레드가 결국 폭발했다. 그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검을 뽑으려 했다. 그러나 그의 손은 검 손잡이를 잡은 채 움직이지 못했다. 어느새 다가온 에키가 브레드의 검 손잡이를 꾹 누르고 있었다.

“선배님. 오랜만에 뵙는데 여전하시네요.”

그에게 바짝 다가선 에키가 나지막이 말했다.

“제가 분명히 입조심 좀 하시라 했는데.”

“이……!”

브레드가 이를 악물며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레이스 장갑을 낀 작은 손이 누르는 힘을 이기지 못했다. 검은 부들부들 떨리기만 할 뿐 검집에서 나오질 않았다. 근처에 있던 브레드의 클럽원들이 그 광경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야, 야, 브레드, 아무리 레이디를 배려한다지만 그렇게까지 쇼를 할 필요가 있냐?”

“쟤 설마 진짜 힘이 모자라서 못 뽑는 건 아니겠지.”

“너 레이디 좋아하냐?”

“죄다 남자처럼 다니는 사관학교에서 오랜만에 치마 입은 여자 보니 눈 돌아가나 보지 뭐. 내비둬라.”

저열한 말들이 오갔다. 바라하가 병신이 모여 있는 클럽이 있다고 하더니. 복잡한 상황과 깨달은 마음으로 머리가 아프던 참에, 한심할 정도로 수준 낮고 단순한 놈들을 보니 헛웃음이 나다 못해 상쾌할 지경이었다. 에키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검 뽑아서 뭐 하시게요? 전에 제가 말씀드린 거 기억 안 나세요? 검 잘못 뽑으시면 퇴학당할 수도 있는데.”

그녀가 검을 뽑으려 안간힘을 쓰던 브레드에게 속삭였다. 브레드가 형형한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에키는 생긋 웃어주고 돌연 손을 뗐다.

그러자 검이 힘차게 뽑혔다. 우스꽝스러운 광경이라 주위 생도들 사이에서 폭소가 터져 나왔다. 브레드는 그 검으로 에키를 겨누었다.

“너, 너…….”

검 끝이 부들부들 떨렸다. 에키의 등 뒤에서 앨리스가 검을 뽑는 소리가 들렸다. 파티마가 끙 하는 신음 소리를 냈다. 에키는 웃는 얼굴 그대로 말했다.

“저번에 저한테 밟힌 상처는 다 나으셨어요? 이러시는 걸 보니 다 나아서 제 경고도 잊어버리신 것 같은 데.”

“밟혀……?”

“뭐야, 둘이 싸운 적이 있었어?”

“브레드 너, 레이디한테 졌냐?”

그녀의 말에 브레드의 클럽원들이 비웃었다. 이미 사관학교 내의 여론은 반전된 지 오래지만, 그들은 에키네시아의 실력을 인정하지 않는 소수의 부류였다. 전체 순위전이 아닌 신입생 순위전의 결과 따위는 별거 아니라고 말하기도 했다.

클럽원들의 비웃음에 브레드가 벌게진 낯으로 고함을 질렀다.

“지긴 뭘 져, 저년이 비겁하게 뒤통수를 쳤다고, 씨발!”

“어머, 그럼 제대로 해보실래요?”

에키가 기다렸다는 듯 대꾸했다. 그리고 그대로 왼손의 장갑을 빼서 브레드의 발치에 집어던졌다.

“정식으로 결투를 신청합니다, 브레드……. 죄송해요, 성을 까먹었네요. 별로 기억할 가치가 없어 보여서. 어쨌든 브레드 선배님. 제가 승리하면 파티마 선배님께 무릎 꿇고 사과하세요.”

안 그래도 심란하던 중에 잘 걸렸다. 경고도 주고, 스트레스도 좀 풀고. 에키의 그런 심정이 얼굴에 드러났는지 마주한 브레드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는 곧 제가 겁먹었다는 것 자체가 창피해져서 되레 큰 목소리를 냈다.

“하, 선배한테 말버릇 좀 보게? 결투를 받아들이겠다. 여기서 바로 버릇을 고쳐주마, 건방진 계집애야. 내가 승리하면 너는 사흘간 내 노예다. 윗사람을 대하는 예절을 제대로 가르쳐주지.”

내거는 조건이 지저분했다. 연무장 근처에서 지켜보던 다른 생도들 사이에 웅성거림이 퍼져나갔다. 당황한 파티마가 말리려 다가오기도 전에, 에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대로 하세요. 입회인은요?”

“이 녀석으로.”

브레드가 옆에 있던 클럽원 중 하나를 가리켰다. 공평한 입회인이 아니었지만, 이번에도 에키는 대답을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는 마물 토벌 때 버리고 난 후 새로 산 싸구려 검을 들어 올리며 대답했다.

“좋아요. 그럼 시작할까요?”

얼결에 정해진 입회인이 그들 사이 중앙으로 왔다. 결투 선언이 읊어진다. 생도들이 조금이라도 가까이 보려 연무장 쪽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그 생도들 너머로, 붉은 머리를 곱게 틀어 올린 로잘린 디아상트가 나타났다. 에키네시아처럼 완벽하게 레이디의 정장을 차려입은 그녀는 산책하듯 한가로운 걸음으로, 그러나 확고한 목적을 가지고 연무장 쪽으로 다가왔다.

“……승자에겐 자비와 관용이, 패자에겐 승복과 겸허를, 검에는 명예와 정의가 깃들게 하소서. 아르 세밧티엠.”

정식 결투는 선언 이후 서로 인사를 하고, 입회인이 검을 사이에 두었다가 치움과 동시에 사전에 논의한 쪽, 보통 결투 신청자의 선공으로 시작된다.

브레드가 인사를 했다. 양발꿈치를 딱 붙이고 서서 검을 들어 가드에 가볍게 입맞춤을 하고 칼끝을 늘어뜨리는 행위. 제국식 기사의 예법대로였지만, 분노 섞인 비웃음이 역력한 표정과 깔보는 듯한 태도 탓에 앨리스가 할 때처럼 우아한 느낌은 없었다.

에키네시아는 드레스 자락을 쥐고 무릎을 굽혔다 펴는 레이디의 인사를 했다.

브레드의 클럽원들 중 하나가 놀리듯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나 주위의 생도들은 이제 저번처럼 그녀의 인사에 껄끄러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사이 그녀의 기행에 익숙해진 덕분이었다. 그들은 에키가 펼칠 검술에 더 관심이 많았다.

“넌 전에 못 봤다고 그랬지? 잘 봐, 보기만 해도 도움이 될걸.”

“그 정도야?”

“검술만으로는 기사들한테도 안 꿀릴 것 같았어. 신입생 순위전 때는 앨리스 윈터벨 말고는 짧게 끝나서 제대로 못 봤는데, 이번엔 좀 제대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네.”

연무장의 상록수 울타리에 도착한 로잘린 디아상트는 바로 앞의 생도들이 속닥거리는 것을 들었다. 그녀는 연두색 눈동자를 가만히 굴리다가, 조금씩 걸음을 옮겨 안쪽이 잘 보이는 자리를 잡았다.

연무장 안쪽에 정신이 팔린 생도들은 그들의 뒤에 단장의 약혼녀로 소문난 공녀가 와 있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결투가 시작되었다. 브레드는 예의를 무시하고 선공에 나섰다. 에키네시아는 상체를 살짝 트는 것만으로도 그의 공격을 피했다. 브레드의 검이 나풀거리는 레이스 사이로 빠져나가 허공을 갈랐다. 공격이 빗나가자 그의 전신에 허점이 노출되었다.

에키네시아의 검이 허점들 중 하나로 순식간에 짓쳐들었다. 눈을 노리고 찔러오는 검. 막으려니 자신의 검은 그녀를 지나쳐 허공을 가르는 중이고, 피하기엔 너무 빠르다.

브레드는 저도 모르게 질끈 눈을 감았다. 그러자 그녀의 검은 방향을 틀어 놀리듯 그의 관자놀이 옆 머리카락 끄트머리만 살짝 베어냈다.

“와, 봤어?”

“저 속도로 검을 찌르면서 닿기 전에 목표를 바꾸다니. 어떻게?”

“팔꿈치는 미동도 안 했어. 손목의 스냅이야.”

“아냐, 어깨부터지. 손목만 가지고 방향을 틀면 칼끝이 흔들린다고. 팔꿈치가 그대로인 건 속도와 힘을 유지하기 위해서일걸.”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로잘린 디아상트를 제외하면 모두 아젠카의 사관생도였다. 그들은 눈앞의 결투를 해부하듯 토론하고 있었다. 디아상트 공녀는 상록수 그늘에 서서 눈은 에키네시아에게 둔 채, 귀 기울여 주위의 이야기를 들었다.

잘린 브레드의 머리카락 일부가 살랑살랑 떨어져 내렸다. 브레드는 눈을 감았다는 것을 자각하고 낯이 붉어졌다. 에키는 미소를 띠었다. 겁이 나느냐고 묻는 것 같은 미소였다.

그녀의 표정이 의미하는 바를 알아챈 브레드가 벌게진 얼굴로 스텝을 밟으며 검을 휘둘렀다. 묵직한 검격.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났다.

에키는 한 발짝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아주 간단하게 그 범위를 벗어나고는, 코앞으로 브레드의 검이 지나치자마자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드레스 자락이 그 동작에 흔들려 나부끼며 그 아래로 흰 레이스 페티코트가 약간 보였다. 파란 공단 구두를 신은 발이 사뿐히 걸음을 내딛는다. 물러났다가 도로 들어가는 움직임이 가볍고 리듬감마저 느껴져 왈츠를 추는 것처럼 보였다.

부채를 내미는 것 같은 손놀림으로 검이 내밀어진다. 나긋한 태도와 달리 그녀의 칼날은 상대를 향해 사납게 덤벼들었다. 큰 동작으로 검을 휘두르는 바람에 상체가 비어버린 브레드는 이번에도 막을 방법이 없었다.

꼼짝 없이 찔릴 것 같은 순간, 에키의 검은 조금 전과 같이 장난치듯 브레드의 옷깃만을 얕게 베었다. 앞섶의 셔츠 자락이 잘려 벌어졌다. 벌어진 옷자락 사이로 보이는 피부에는 상처 하나 남지 않았다.

“야……. 정확하게 옷깃만 했어. 품이 넉넉한 셔츠도 아니고 딱 붙는 건데.”

“우연히 저렇게 된 거 아냐?”

“멍청아, 앞이나 봐. 지금 배 쪽도 똑같이 했어. 피부는 긁지도 않고.”

“소름끼친다. 저게 조절이 돼?”

“쟤 되나 보지. 토벌 다녀온 선배가 괴물이라 그러더니 진짜네.”

로잘린 디아상트는 검에 문외한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생도들이 떠드는 소리를 듣고서야 지금 에키네시아가 보이는 기예가 얼마나 대단한 건지 알아차렸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로서도,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에키네시아 로아즈가 검을 쓰는 모습은 무척 아름답다.

대련이니 결투니 하면 땀 냄새와 흙투성이 정도만 떠올리던 그녀에게 에키네시아의 결투는 무도회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흐음…….’

로잘린은 점점 집중했다. 팔짱을 끼고 앞을 보았다. 그녀는 유리엔을 쳐다봤을 때처럼, 예술품을 감상하듯 에키네시아의 검을 감상했다.

결투는 일방적이라는 표현으로도 부족할 양상으로 흘렀다. 초반에는 분노를 띠던 브레드의 얼굴이 수치로 바뀌고, 이어 현실을 부정하는 모습이 되었다가, 마침내 공포에 질리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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