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꽃-47화 (47/211)

검을 든 꽃 47화

그 밤, 그녀는 긴 꿈을 꾸었다.

〈이런 짓은 하고 싶지 않았을 테지.〉

랑기오사로 목을 짓누르며 그녀의 위에 올라탄 유리엔이 속삭였다. 나직하고, 결코 크지 않은, 조용한 음성. 그녀가 수많은 사람들을 베어 넘기며, 그녀 앞에서 울부짖고 저주하는 모든 이들에게 고함을 지르며 하고 싶었던 바로 그 말.

‘나도 이런 짓은 하고 싶지 않았어.’

그녀가 내지르고 싶었으나 입 밖에 낼 수 없었던 비명을, 그가 대신 언어로 만들어준 순간. 그 순간부터 그는 그녀에게 지워질 수 없는 흔적이 되었다.

〈싸우고 있는 거다.〉

〈마검과, 그녀의 의지가.〉

〈그녀에게 기회를 주겠다.〉

그 누구도 알 수 없으리라 여겼던 그녀의 반항을, 아직 그녀가 포기하지 않았음을, 그가 알아차린다. 그리고 그녀에게 기회를 주었다. 그에게는 손해뿐일 기회를.

철문 너머로 새파란 눈동자가 그녀를 지켜본다. 소중한 사람을 모두 제 손으로 죽여버려서, 기다려줄 사람을 모조리 잃은 그녀를, 그가, 기다려주고 있다.

계속, 계속, 해가 뜨고 밤이 지고 계절이 바뀌어도, 그녀의 상태가 전혀 변하지 않는데도, 그는 꾸준히 그녀를 찾아온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간수조차 다가오지 않고 이중 문 너머에서 밥그릇만 내려놓고 가는, 학살을 일으킨 악마에게.

지하 감옥의 좁은 방 안에서 사슬에 묶인 채, 반 년. 홀로 싸우던 그녀에게 찾아오는 사람은 오직 그뿐이다.

그녀가 승리하길 바라며 기다려주는 유일한 사람. 그녀를 지지해 주는 유일한 사람.

그밖에 없었다. 그 사람을 생각하며 버텼다. 마검을 극복하고 그를 만나면 하고 싶은 말들을 모았다.

‘왜 나에게 기회를 줬어요?’

‘고마워요.’

‘기다려줘서 고마워요. 지켜봐줘서 고마워요.’

‘당신의 선택이 옳았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어요.’

‘반드시 이길게요. 그러니까 떠나지 말아요. 계속 지켜봐 주세요. 당신 말고는, 아무도…….’

‘당신이 있어서, 이길 수 있었어요.’

‘제 이름은 에키네시아 로아즈예요. 지금은 까만 머리지만, 전 원래 머리카락이 분홍색이거든요. 에키네시아 꽃 같은 색이라고, 부모님이 이름 지어 주셨어요. 당신의 이름은 알아요. 유리엔. 꼭 불러보고 싶었어요.’

‘제가 얼마나, 제 의지대로 움직이는 제 몸으로, 당신을 향해 웃어 보이고 싶었는지, 당신은 알까요.’

‘당신에게 웃는 얼굴을 보여주고 싶어요. 울부짖는 짐승 같은 모습이 아니라. 그런 건 진짜 제가 아니란 말이에요. 봐요, 이게 저예요. 어떤가요? 당신에게 예쁘게 보였으면 좋겠어요.’

‘당신을 만나고 싶어요. 당신도 나를 만나고 싶은가요? 그래서 기다리고 있는 건가요?’

그 말들을 힘으로 삼아 버렸다. 그 말들을 그에게 직접 전하는 날을 상상하며 견뎠다. 그 외롭고 고통스럽고 허무한 시간들을.

그 시간 속에서 그가 그녀의 삶에 남긴 흔적이 하나의 감정으로 변화해 간다. 뿌리를 내리고 싹이 터서 무르익는다.

꽃은 이미, 그때부터 피어 있었다.

* * *

에키네시아의 몸살은 하루 더 지속된 뒤에 말끔히 나았다. 그 다음날은 마침 위즈덤의 첫 클럽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그동안 유리엔의 약혼과 관련된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창천기사단장은 침묵했고, 디아상트 공녀는 기사단 본부의 귀빈실을 배정받아 조용히 머물렀다. 약혼이 이루어질지도 모른다는 소문만이 아젠카로 퍼져나갔다.

에키는 앨리스와 함께 위즈덤의 클럽 모임이 열릴 제6연무장으로 향했다. 앨리스는 약간 걱정스럽게 바로 옆에서 걷고 있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연한 하늘색에 흰 레이스가 달린 드레스는 밝고 경쾌해 보였지만, 그 옷을 걸치고 있는 에키의 표정은 심란하고 어두웠다.

“에키.”

“…….”

“에키?”

“아, 네? 불렀어요?”

“아직 열이 남아 있습니까?”

“아뇨, 멀쩡해진 거 알잖아요.”

“어제오늘 내내 멍한 것 같습니다.”

정확히는 니콜 시즈튼이 다녀간 이후부터 쭉. 앨리스가 그녀를 살폈다. 에키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좀, 고민할 일이 있어서.”

“무슨 고민입니까? 제가 도울 건 없습니까?”

“고맙지만 괜찮아요, 개인적인 감정이랑 집안 문제가 섞인 일이라.”

좀 많이 스케일이 큰 집안 문제와, 좀 많이 복잡한 감정이지만 거짓말은 아니었다. 앨리스는 의문이 남은 듯했지만 남의 집안 사정을 캐물을 정도로 무례한 성격이 아니었다. 그녀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 누군가에게 말하는 것만으로도 훨씬 나아지는 고민이 있습니다. 그런 도움이라도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세요.”

곧은 얼굴, 곧은 말투. 에키는 결에서 걷고 있는 앨리스를 올려다보았다. 어지럽던 마음 한쪽이 스튜처럼 따끈따끈해진다. 니콜이 앨리스와 친구냐고 묻던 것이 떠올랐다. 그녀는 충동적으로 앨리스의 팔짱을 꼈다.

“에키? 갑자기 왜…….”

“그냥요. 싫어요?”

“……아뇨.”

“얼른 가죠. 파티마 선배님이 기다리고 계실 테니까.”

그들은 사이좋게 팔짱을 끼고 제6연무장에 도착했다. 제6연무장은 여자기숙사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있는 연무장으로, 키가 크고 잎이 무성한 상록수들로 울타리를 대신한 중간 크기의 공터였다. 상록수 아래에는 벤치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벤치마다 생도들이 빽빽했다. 벤치를 차지하지 못한 생도들은 나무 그늘에 앉거나 기대 서 있었다. 심지어 돗자리를 가져와 깔고 앉은 생도들도 보였다.

“어, 왔다.”

“왔어! 진짜 파티마네 클럽 들었나 봐!”

“레이디다.”

“2위인 애랑 같이 왔네.”

“쟤네 룸메이트잖아.”

에키와 앨리스가 다가가자 웅성거림이 퍼져나갔다. 단번에 시선이 몰려들었다. 사관학교에 들어온 이래로 에키는 집중되는 시선에 익숙해졌지만, 오늘의 시선은 예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선망과 질시가 뒤섞여 있었다.

“결절에서 살아남아서…….”

“운이 좋았겠지. 아마 바라하가 다…….”

“신입생 순위전 때 못 봤어? 대단하던데.”

“마물 토벌 때 쟤가…….”

“천재는 다 괴짜라더니.”

나지막한 속닥거림이 계속 따라붙었다. 뛰어난 청각 탓에 어지간한 것까지 죄다 들려와서 민망했다. 질투심 가득한 말들도 많았지만 그래도 실력을 보인 덕에 더러운 소문은 확연히 줄어들었다.

“어서와, 앨리스, 에키!”

미리 와 있던 파티마가 그들을 맞이했다. 앨리스가 그녀에게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선배님, 왜 생도들이 이렇게 몰렸습니까?”

“음……. 구경꾼들도 있겠지만, 저거 봐.”

파티마가 어색하게 웃더니 한쪽을 가리켰다. 벤치 하나에 종이가 쌓여 있었다. 클럽 가입 신청서들이었다. 앨리스가 황당하단 표정을 지었다.

“저게 다 가입 신청서입니까?”

“너희 둘이 우리 클럽에 들어왔다니까 관심을 가진 생도들이 갑자기 늘어나서. 지금 저기 있는 생도들 중에 가입 신청을 한 사람도 많아. 다 받아들일 순 없으니까, 음, 그런 의미에서 부탁할 게 있는데.”

파티마가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헤실 웃었다.

“대련하기 전에, 신입 클럽원 어떻게 뽑을지 같이 의논하자!”

앨리스와 에키가 파티마의 제안에 답하려는데, 비키라는 험악한 목소리와 함께 한 무리의 생도들이 연무장 쪽으로 다가왔다. 워낙 요란한 움직임이라 생도들의 시선과 그들의 시선이 단번에 그리로 몰렸다.

덩치 큰 생도 네다섯 명이 몰려 있는 생도를 밀치며 연무장 안으로 들어왔다. 에키는 그 무리의 가장 앞에 서 있는 생도를 알아보았다. 그녀에게 헛소리를 지껄였던 브레드였다.

브레드는 연무장 가운데에 서 있는 그들에게 똑바로 다가오더니 에키가 아니라 파티마를 노려보았다.

“야, 파티마.”

“무슨 일이세요, 브레드 선배님?”

“내가 굉장히 불쾌한 소문을 들었거든. 네가 다른 클럽에 소속된 클럽원들을 꼬드겨서 빼내고 있다는 게 사실이냐?”

“아뇨?”

파티마가 까만 눈을 동그랗게 떴다. 브레드가 코웃음을 치더니 벤치에 놓여 있는 신청서 뭉치를 집어 들었다. 파티마가 인상을 찌푸리며 경고했다.

“선배님, 다른 클럽의 가입 신청서를 보는 건…….”

“시끄러워.”

그는 거친 손놀림으로 그것을 팔락 팔락 넘기더니 종이 뭉치를 파티마 쪽에 들이밀었다. 그러곤 그녀의 코 앞에서 위협적으로 그것을 흔들어댔다.

“이거 봐, 이거 보라고. 여기 적힌 이름들을 보고도 모른 척? 이렇게 빤한 증거를 두고? 하여간 계집애들이란 다 똑같아. 남들은 제 수작을 모를 줄 알지, 멍청하게.”

그 말을 하며 브레드의 눈이 흘깃 에키 쪽을 노려보고 되돌아갔다. 그것을 알아차린 에키는 저절로 비틀어지려는 입꼬리를 간신히 자제했다. 그러고 보니 전에도 저놈은 빤히 보이게 드레스를 입고 다니면서 뭘 모른 척이냐고 했었지.

‘세상 참 자기 기준대로 판단하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더니…….’

그사이 파티마는 코앞에 들이밀어진 신청서를 받아들었다. 첫 장의 이름을 확인한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누구를 말하시는 건지 모르겠는데요, 선배님.”

“여기 있잖아, 미하일 폰 프랑 알마리 생도. 미하일은 우리 노블레스에 들어오기로 되어 있었는데, 왜 여기 신청서가 있어? 왜 남의 클럽에 들어올 신입생을 가로채?”

브레드가 파티마가 들고 있는 신청서를 툭툭 치며 이를 드러냈다. 파티마가 눈을 깜박이더니 의이한 듯 대꾸했다.

“미하일 생도는 현재 어떤 클럽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잖아요. 그 신청서는 미하일 생도가 직접 써서 낸 거예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문제가 많지, 아주. 정말 몰라서 묻나?”

“네, 모르겠어요.”

에키보다도 작은 파티마는 한 대 칠 듯 눈을 부라리는 브레드 앞에서 순진한 어린애처럼 갸웃거리며 말했다. 브레드가 주위의 생도들을 돌아보더니 보란 듯이 한숨을 쉬었다.

“파티마 토야. 클럽 간에 지켜야 할 예의란 게 있는 거다.”

“제가 무슨 예의를 어겼나요?”

“말했잖아, 다른 클럽에 들어가기로 되어 있는 생도한테서 신청서를 받은 게 얼마나 무례한 짓인지 몰라?”

“미하일 생도가 노블레스 클럽에 신청서를 냈었어요? 아니면 그가 노블레스에 들어가겠다고 구두 약속이라도 했나요?”

파티마의 질문에 브레드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양쪽 다 아니었으므로. 그저 노블레스에서 일방적으로 기오사 오너의 남동생인 미하일을 점찍었을 뿐이다. 할 말이 없자 브레드의 얼굴이 점차 붉으락푸르락해지기 시작했다.

“……야, 이게 어디서 선배한테 따지고 들어?”

“어느 클럽에 신청서를 내는지는 생도의 자유잖아요. 그리고 선배님, 설사 클럽에 소속되어 있다고 해도, 클럽원의 클럽 탈퇴와 이동도 자유 아니었나요?”

“하……. 이래서 미개한 야만족 년한테 클럽 개설을 허가해선 안 되는 건데. 상식이 안 통하잖아. 안 그래?”

브레드가 짜증스럽게 중얼거리며 함께 온 자신의 클럽원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이 동조하듯 웃음을 터뜨렸다.

가무잡잡한 피부에 자그만 몸집의 파티마 토야는 서부 유목민 출신이었다.

일족 단위로 생활하며 초원을 떠도는 유목민들은 느슨한 연맹을 유지할 뿐 대륙의 다른 나라처럼 틀에 잡힌 국가를 만들지 않았다. 그로인해 그들에게는 야만인이니 미개하다니 하는 무례한 편견이 덮어씌워지지는 경우가 꽤 있었다.

에키가 확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녀나 파티마가 뭐라 하기도 전에, 빠르게 끼어드는 분노한 목소리가 있었다.

“사과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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