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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든 꽃-46화 (46/211)

검을 든 꽃 46화

“대체 왜? 아무 관련이 없잖아!”

“학살 사건을 벌여야 할 마검이 사라졌잖아. 아무도 죽지 않고. 상식적으로 이런 일이 가능한 게 기오사를 관리하는 창천기사단 말고 또 있겠니?”

“유리엔 단장이 로아즈에 보내진 마검을 처리했을 거라 의심하고 있단 소리야?”

“합리적인 의심이지, 그 집 딸내미가 마검을 쥐고도 괜찮은 특이 체질이라는 망상보다는. 게다가 너, 단장의 스콰이어가 되었다며? 관계가 없을 거라 생각하는 게 더 이상하겠다.”

반박할 수 없는 말이었다. 에키는 신음을 흘렸다. 니콜이 깊은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알음알음 3황자를 지지하는 세력이 국내에도 있어. 정작 유리엔 황자는 황위에 관심이 없는데도. 게다가 그의 인기와 명성, 기사들에게 끼치는 영향력, 그리고 대륙 최강의 기사단인 창천기사단이라는 무력까지. 황태자 측에서도, 2황자 측에서도 경계할 수밖에.”

“가만 내버려 두기엔 유리엔 단장이 너무 커졌다……. 이거네.”

“바로 그거야. 3황자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말이야. 이제 그에게는 선택지가 별로 없어.”

니콜이 손가락을 펴 들었다.

“약혼을 받아들이고 황태자에게 굴종하거나. 아젠카와 창천기사단을 이용해 제국과 적대하거나.”

“…….”

“그리고 후자의 선택은 결국 전쟁으로 이어지겠지. 거기서 제일 먼저 희생당할 건 유리엔 단장과 관련이 있다는 의심을 받고 있는 로아즈 백작가고. 굳이 전쟁까지 가지 않아도, 어떤 방식으로든 로아즈를 이용하게 될 거야. 유리엔 단장을 끌어내기 위해서.”

에키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니콜이 건조한 음성으로 덧붙였다.

“그러니 우리는, 그가 얌전히 약혼을 하고 황태자에게 제 목줄을 쥐어 주기를 빌어야해. 그게 가장 평온한 길이야.”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니콜이 목이 타는지 찻잔을 들다가 차가 식은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에키에게 양해를 구하고 마법으로 찻주전자를 데웠다. 그리고 차를 마시며 에키가 지금 들은 이야기들을 정리할 시간을 주었다.

에키는 혼란한 상태로 생각을 했다. 가장 먼저 치솟는 것은 분노. 바르데르기오사가 좋아하면서도 눈치를 볼 정도로, 깊게 솟구치는 살의.

로아즈에 마검을 보낸 게 2황자 측인지 황태자 측인지 몰라도, 모조리 베어 죽여버리고 싶은 살의가 넘실거렸다. 그녀 자신의 힘으로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에 더 참기가 힘들었다.

에키는 반사적으로 회귀 이전에 싸워본 마법사와 근위기사단의 규모를 가늠했다.

할 수 있다. 하고 나면 이번엔 몸살 정도가 아니라 기절하고 앓아누울지도 모르겠지만, 마나가 남아 있는 동안 속전속결로 치고 들어가면 황제의 목까지 베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다.

[할 수 있는데 왜 참아? 복수잖아. 나쁜 놈들이잖아! 그놈들 때문에 네가 나하고 얽혀서 고생한 거 아니야? 그것들 죽이러 가자, 응? 싹 다 쓸어버리면 한동안 살의 걱정도 안 해도 되겠네!]

눈치를 보던 마검이 기회를 잡은 악마처럼 달콤하게 재잘거렸다. 에키는 장갑에 덮여 있는 오른손바닥을 흘깃 보았다. 마검이 조바심이 난 것처럼 계속 떠들었다.

[지들이 날 보냈으니 나한테 죽는 것도 지들 업보지 뭘. 죽이러 가자! 복수해야지, 복수! 너를 그런 고통 속에 빠뜨린 놈들이 흘리는 피가 보고 싶지 않아? 뒤처리가 걱정이면 목격자를 안 남기면 되지! 목격자까지 다 죽여버리면 돼!]

마지막 말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정신이 들었다. 목격했다는 이유로 죽여 버리라고?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기어올랐다. 에키는 이마를 짚었다.

‘방금 나도…… 복수란 명목으로 자연스럽게, 아무 관계도 없는 마법사들이나 근위기사들을 죽이는 것을 가늠했잖아. 미쳤구나.’

황족은 홀로 있지 않는다. 황족을 죽이려면 가는 길을 가로막는 호위들과, 시종들을 모조리 죽여야 한다. 그녀는 암살자가 아니다. 마나와 요령으로 어느 정도 암살자 흉내는 낼 수 있어도 황제 암살이 가능할 정도는 절대 아니었다. 다 쓸어버리는 건 가능하지만.

[주인아, 저 빨간 머리 여자가 있어서 대답 못 하는 거지? 응? 죽이러 갈 거지? 죽이러 가자! 복수해야지!]

‘죽이지 않으면 죽는 전쟁터도 아니고. 그런 짓을 하면 학살이야. 마검의 악마일 때와 뭐가 다르지?’

이성이 돌아왔다. 에키는 오른손바닥의 문양에 마나를 흘렸다.

[앗 따가. 아, 아! 왜 괴롭혀! 죽이러 가겠다는 뜻이야? 언제 갈 거야? 오늘? 내일? 두 밤 자고?]

에키는 짜증스럽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한 차례 더 마나를 홀려 넣었다. 그녀의 마나가 문양에 흐르는 마검의 마나를 후려쳤다.

[아야! 아! 아프잖아! 왜! ……입 닥치라는 소리구나. 쳇.]

이안을 처리한 것과는 다르다. 그는 직접적으로 그녀 주위 사람을 죽이려 들었다. 에키가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면 바라하는 확실하게 죽었다. 그러나 황족을 지키는 자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의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니까.

그녀는 자신이 검을 내키는 대로 휘두르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고 있다. 사람을 죽인다는 게 어떤 것인지도 너무나 잘 안다. 그래서 이번 삶에는 누구도 베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상황은 그리 평탄하지 않았고, 그녀는 결국 결심을 했다.

로아즈에 마검을 배달한 자, 정확히는 그 일을 주도한 자는 망설임 없이 죽여버릴 수 있다. 그러나 황제, 2황자, 황태자, 셋 중 누가 그 일을 주도했는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누군가 그녀 주위 사람들을 위협한다면 처리하겠다. 근위기사단이 로아즈 저택을 향해 쳐들어온다면 깨끗이 쓸어버릴 것이다. 하지만 아직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니 다 죽여 버리자고? 화가 나니까? 그녀는 악마가 되고 싶지 않았다.

에키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왜 그 개고생을 해서 모든 걸 되돌렸는데. 분노에 젖지 마. 살의에 휘둘리지 말자.’

차츰 냉정이 돌아왔다. 분노와 살의가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가자 다른 생각들이 떠올랐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니콜의 말대로 유리엔이 얌전히 약혼하길 바라며 가만히 있는 게 가장 나았다. 그 다음, 정확히 어떤 놈이 마검을 로아즈에 보내라 명했는지 알아내고, 그 뒤에 어떻게 복수할 것인지를 계획하면 된다. 그 자를 용서해 줄 생각은 없었다. 그게 설령 제국의 황제라 해도.

‘그래, 그렇게 하면 돼. 약혼이 무사히 이루어지길 기원하며, 마검의 배후를 찾아서…… 복수를 하면 돼.’

그렇게 판단하면서도 계속해서 거부감이 들었다. 그가, 유리엔이, 약혼을 하고, 결혼을 해야 한다. 속이 싸하게 식어가는 감각. 가슴 한구석이 아릿해졌다. 선뜩하고 서글프면서도, 무어라 규정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이 전신을 물들여갔다.

그녀는 쥐는 것조차 불가능했던 성검 랑기오사를 유리엔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쥐고 있는 것을 보게 되면 이런 기분이 들지 않을까. 자신은 결코 닿을 수 없는, 닿아서도 안 되는 것을 타인이 쉽사리 침범하는 느낌.

에키는 아득한 기분으로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기오사를 모으던 시절에 종종 랑기오사를 들여다보곤 했었다. 맨손으로는 절대 만질 수 없어서 늘 손에 천을 휘감고 끄집어내서, 어딘가에 기대 세우거나 바닥에 내려놓고,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었다.

닿을 수 없는 검. 닿을 수 없는 사람. 닿아서는 안 되는 것. 그러나 사실은, 정말은, 오랜 예전부터, 닿고 싶었던…….

무언가가 범람해 넘치려 했다. 내도록 눌러왔던 것이 이 순간 억누르던 것을 밀어내며 솟구쳤다.

왜 그가 약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가 약혼해야 로아즈가 휘말리지 않잖아. 황태자에게 이용당할 그의 삶이 가여워서?

그래, 가여워. 그가 갇힌 상황과, 단편적인 사실들로도 짐작 가능한 그의 과거가 안타까워. 그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하지만 그가 약혼하지 않으면, 가족들이 위험해질지도 몰라. 가족들이 가장 중요하지 않아?

평온. 평온한 삶. 행복. 유리엔이 임명식 후 그녀에게 뜬금없이 던졌던 질문이 떠올랐다.

〈만약, 만약에, 그대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얻기 위해 그대의 평온을 희생할 수 있나? 혼란에 휘말리더라도 감수할 수 있나?〉

그 질문은 유리엔 자신의 얘기였을까. 그는 저항과 굴종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는 걸까. 그가 말한 혼란은 황태자에게 굽히지 않을 때 발생할 전쟁을 의미할까?

그럼 그가 원한다는 건 뭐지? 평온을 희생해서라도 얻고 싶다는 건? 황실로부터의 자유일까?

‘……그럼, 내가 원하는 건 뭐지? 왜, 이 순간에, 당연한 결론을 놓고도, 평온한 삶이 위태로워질지도 모르는데도, 거부감이 들지? 무엇을 원해서?’

왜 그의 약혼녀가 온다는 소식에 동요했었지? 왜 약혼 소식 이후 스콰이어 임명식에서 그의 얼굴을 본 순간, 울컥 화가 났었지?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왜 계속해서 신경을 쓰지? 왜 나는 그가 지워진 과거를 몰랐으면 했지? 왜 그 앞에 서면 늘 긴장이 되지? 단순한 죄책감? 아니잖아.

왜 그의 표정이나 미소를 볼 때면, 착각할까 봐 두려워했지? 무엇을 착각할까 봐 두려워한 거야?

‘그가 나를 사랑할지도 모른다고, 착각할까 봐…….’

그 착각이 왜 두려워?

‘너무, 지나치게, 행복한 착각이잖아. 거짓이라는 걸 알게 되는 게 두려울 정도로 행복한 착각이야. 그리고 그건 거짓일 수밖에 없어. 그가 날 사랑하는 건 불가능해.’

만약 그가 너를 사랑하면, 너는 행복해진다는 거야? 그게 왜 행복한데?

‘왜냐니, 나는…….’

그를 사랑하니까.

부정하고 싶었던 진심에 도달했다. 일렁거리던 무언가가 마침내 범람해 이성을 침범했다. 물에 젖은 모래성처럼 허물어져 내린다. 에키네시아는 숨을 쉬는 것을 잊었다.

피로 물든 분수대 앞에서, 이미 다 부서졌다고 여겼던 감정이 어느새 되살아나서 마음 깊은 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 뿌리가 드러났다.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 가장 최악의 순간에, 유일하게 그녀의 마음을 들여다봐 주고 믿어주었던 사람. 길고 고통스럽고 외로운 싸움의 와중에, 내내 지켜봐 주었던 푸른 눈. 말없는 응원과 지지.

그 믿음의 대가로 파멸하면서도, 그녀에게 한마디 저주도 남기지 않았던 사람.

그녀를 바라보는 눈동자. 어깨 위에 닿은 기대하지 않았던 온기. 조심스러운 배려. 생강차 향. 긴장감. 무방비하던 미소. 걱정. 절박하던 포옹. 떨리는 목소리. 오열과 환희 사이에서 헤매던 표정.

그 모든 것들 앞에서 느꼈던, 그녀 자신의 동요. 어쩌면 별것 아니었을지 모를 그의 모든 행동과 말에 하나하나 신경 썼던 일들.

사랑할 염치가 없어서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자기기만이었다. 마음은 그런 논리와 이성으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모른 척 외면한다고 해서 존재하는 것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지워 버리겠다고 결심한다고 해서 지워지지도 않는다.

그 감정은 부서진 적조차 없었다. 그녀가 저지른 짓들의 무게가, 그것이 불러올 결과가, 감정을 인정했을 때 일어날 변화가, 두려워서, 부서졌다고 믿으며 외면하고 있었을 뿐.

에키네시아 로아즈는 유리엔 드 하르덴 키리에를 계속해서 사랑해 왔다.

처음 그가 마검의 악마 안에서 그녀를 찾아냈을 때부터, 긴 세월을 거치고 시간을 되돌려 지금에 이를 때까지, 그 감정은 싹을 틔우고 더 깊은 뿌리를 내렸을 뿐 죽었던 적이 없었다.

겨우 외면하고 있던 것을, 이제, 외면하지 못한다.

에키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입을 틀어막았다. 종잇장처럼 하얘졌던 낯이 잠시 후엔 목덜미부터 새빨갛게 물들어갔다. 탈 듯이 붉어졌다.

그녀의 얼굴을 본 니콜이 당황해서 찻잔을 내려놓았다.

“에키? 왜 그러니?”

“……니콜 언니.”

에키는 반쯤 울먹이는 목소리로 니콜을 불렀다. 니콜이 휘둥그렇게 눈을 치렀다. 그녀는 에키를 어릴 때부터 봐왔지만, 짜증내는 건 많이 들었어도 가늘게 울먹이는 목소리는 처음 들었다. 그녀가 허둥지둥 찻잔을 밀어내고 에키 쪽으로 바짝 다가와 얼굴을 살폈다.

“몸살기가 있다더니, 아프니? 좀 쉴래? 네가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얘기하긴 했는데, 힘들면 고민하지 마. 마검 문제로도 골치 아플 텐데 어린 너한테 내가 뭘 더 얹어주겠니. 로아즈의 문제는 내 문제이기도 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언니, 나 어떡해.”

“……응?”

“나…….”

그 사람을 사랑하나 봐. 사랑하면 안 되는 사람인데.

뒷말은 언어가 되지 못하고 그녀의 입안에서만 데굴데굴 굴렀다. 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에키네시아는 의자 위로 다리를 올리고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무릎에 박았다.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리면서, 동시에 쥐어 짜이듯 무서워졌다. 설레는 만큼 공포스럽다.

니콜이 당황해서 그녀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어디가 안 좋으냐고 계속 물었다. 그녀가 진정하고 자신이 보인 반응에 대한 적당한 변명을 만들어 내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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