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45화
“……이거, 별로 좋지 못한 상황인 거지?”
“유리엔 단장이 황태자였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겠지. 하지만 그는 3황자야. 빛나서는 안 될 황족이 너무 빛나고 있지.”
“창천기사단에 입단하면 국적이 바뀌잖아? 엄밀히 말하면 더 이상 그는 황족이 아닌데.”
“그래서, 제국민들이 그를 타국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
“그는 끝까지 황족이야. 아젠카로 국적이 바뀌었어도, 그의 성에 키리에 제국과 하르덴 황실이 남아 있는 한, 제국민들이 그를 자국의 황족으로 여기는 한.”
니콜이 스푼을 들어 찻물을 적셨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찻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단순한 형태의 사자를 그렸다. 키리에 제국 황실의 상징인 하얀 사자.
“현 황제 폐하께는 황후가 둘 있었지.”
그녀가 사자 옆에 작은 동그라미를 그렸다.
“황태자 시절 맞이했던 첫 번째 황후. 몸이 약하셔서 폐하께서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돌아가셨어. 이 분과 폐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1황자이자 현 황태자이신, 크루엔 드 하르덴 키리에.”
사자와 첫 번째 동그라미 사이에 선이 그였다. 니콜은 그 아래에 1이라는 숫자를 썼다. 그리고 새로운 동그라미가 그려졌다.
“황후 자리가 공석이 되어 새로이 맞이한 두 번째 황후, 이분과 황제 폐하 사이에서 두 아들이 태어났지. 2황자 카르엠, 3황자 유리엔.”
새 동그라미와 사자 사이에 두 개의 선이 그어지고, 각각 2, 3이라는 숫자가 쓰였다. 이어 니콜은 동그라미를 찻물로 지웠다.
“그리고 새로운 황후께서는 3황자 전하를 낳다가 돌아가셨어. 그 뒤로 제국의 황후 자리가 쭉 비어 있는 건, 너도 알지?”
“알아. 황제 폐하께서 돌아가신 두 번째 황후 폐하를 무척 사랑하셔서 더 이상 비를 맞아들이시지 않는 거잖아. 황자가 셋이나 있으니 대신들도 별 말이 없고.”
“그래, 첫 번째 황후께선 정략혼이었지만, 두 번째 황후는 황제 폐하께서 진심으로 사랑해서 맞아들인 분이니까. 꽤 큰 스캔들이었지, 한미한 남작가의 영애셨으니. 첫 번째 황후와 결혼하기 이전부터 사랑하는 사이였단 소문도 있어. 그럼 생각해 봐, 에키.”
니콜이 스푼으로 3황자의 자리를 톡톡 두드렸다. 그리고 사자의 머리를 가리켰다.
“황제 폐하께선 3황자를 어떻게 생각할까? 그토록 사랑했던 황후가 그 아이를 낳느라 죽었어. 폐하께는 더 이상의 아들은 필요하지 않았는데.”
“……설마.”
“황실 내부의 자세한 사정까진 몰라. 하지만 확실히, 폐하께선 유리엔 단장을 좋아하지 않아. 아니, 꽤 많이, 싫어할 거야. 증오에 가까울 수도 있어.”
“사랑하던 아내가 낳은 아들인데도?”
“그 사랑하는 아내를 잡아먹고 태어난 자식인 거지.”
에키는 눈살을 찌푸렸다. 씁쓸한 이야기였다. 유리엔의 성장과정이 그리 좋지 않았으리라는 짐작이 들었다. 니콜이 스푼을 내려놓더니 턱을 괴었다.
“그리고 지금 후계 구도가 꽤 복잡해. 황태자 전하께선 1황자이고, 황태자이며, 외가가 탄탄하지. 거기에 디아상트 공작가의 장녀와 혼인해서 처가도 탄탄해. 하지만 황제 폐하께서 총애하는 건 사랑하던 두 번째 황후의 아들인 2황자 전하야.”
“그 두 분이, 황위를 놓고 경쟁하고 있단 소리야?”
“그래. 그것도 꽤 살벌하게. 세력이 확고한 건 황태자 전하인데, 황제 폐하께서 대놓고 2황자 전하를 밀어 주고 계시거든.”
“여러모로 위험한 상황이네…….”
“여기서 문제. 황제 폐하께서 지지하는 2황자와, 외가와 처가라는 탄탄한 귀족들이 받쳐주고 정통성이 있는 1황자가 있어. 두 세력이 비슷하다면, 어느 쪽이 유리해질까?”
“민심이 있는 쪽?”
“정답. 그래서 양쪽 다 기를 쓰고 능력을 증명하려 해. 유능하고 국민을 위하는 모습을 보여서 민심을 잡으려고. 그런데 결과는 어떻지? 지금 제국민들이 이름을 알고, 관심을 가지며, 칭송하는 황자가 누구지?”
“……유리엔 드 하르덴 키리에.”
에키가 멍하니 대답했다. 제국 황가의 황위계승 따위에 신경 쓰기에는 그녀 자신의 삶이 너무나 치열해서, 그녀는 이런 뒷사정을 잘 몰랐다.
‘그러고 보니, 회귀 이전엔 결국 누가 황제가 되었었지? 아젠카가 몰살되고 나서…… 황태자였던가.’
그녀가 기억을 더듬는 사이 니콜이 담담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황태자 측도, 2황자 측도, 유리엔 단장이 눈엣가시야. 공공의 적이지. 차라리 존재감 없는 황자였으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텐데. 그거 아니? 지나치게 뛰어난 재능은 종종 저주가 돼.”
저 말을 에키네시아보다 잘 이해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녀의 재능이 낳은 비극은 그야말로 끔찍했으니까. 에키는 일렁이는 속을 감추기 위해 눈을 길게 감았다 떴다. 니콜은 그녀의 동요를 알아채지 못하고 설명을 계속했다.
“유리엔 단장은 어릴 때부터 지나치게 탁월했어. 마탑의 원로 마법사들에게 물어보니 금방 나오더라. 배우는 분야마다 다른 황자들이 따라오지 못할 성과를 내어서, 황제 폐하께서 몹시 불쾌해했다고. 그래서 추방하다시피 아젠카로 보낸 거라고.”
“잠깐만, 유리엔 단장은 스스로 창천기사단에 입단한 게 아니었어?”
“알려져 있기로는 그렇지. 실상은 쫓겨난 거에 가깝대. 죄 없는 황자를 죽이거나 유배 보낼 순 없어서, 검술에 재능이 있다는 핑계로 아젠카로 보낸 거라고, 그런데 그 결과가…….”
“……마스터에, 기오사 오너.”
“그래. 꼴 보기 싫어서 쫓아냈더니 눈부시게 자랐지. 황제 폐하나 다른 황자들 입장에서는 지긋지긋할 거야.”
니콜이 쓰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에키는 망연히 찻물의 흔적이 남은 테이블을 내려다보았다.
전혀 몰랐다. 그녀가 알던 유리엔은 고결하고 빛나던 사람이었으니까. 그의 삶에 불행이라곤 마검의 악마인 자신과 엮인 일뿐일 줄 알았다.
니콜이 긴 한숨을 내쉬고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묻었다.
“여기까지가 배경. 이제부터가 본론이야. 왜 로아즈 백작가에 마검이 배달되었는가. 참고로 말하자면, 명확한 범인은 못 찾아냈어. 어차피 범인을 밝혀낸다 해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고.”
“배후가 황실이라서?”
“그래. 황제 폐하, 2황자 세력, 황태자 세력. 셋 중 하나야. 어차피 황제 폐하와 2황자 세력은 거의 일치하니까 둘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 그들 전부가 합의해서 벌인 일일 수도 있고. 어쨌든 결론적으로, 유리엔 단장을 겨냥한 음모에 로아즈가 희생된 거니까.”
“음모……라고.”
“처음 황실이 마검을 어떻게 손에 넣었는지는 몰라. 어쨌든 황실은 그걸로 쇼를 하고 싶었던 거야. 로아즈를 제물삼아. 기오사 오너 따위 별거 아니다, 다 부풀려진 소문이다, 이것 봐라, 창천이 놓친 마검을 우리가 처리했다, 창천 따윈 필요 없다, 라고. 그 쇼로 띄워주고 싶었던 게 2황자였는지 황태자였는지는 정확한 배후에 따라 다르겠지만.”
저도 모르게 이가 갈렸다. 에키는 분노로 넘실거리며 흘러넘치려는 마나를 간신히 자제했다. 살기마저 참을 수는 없었다. 보라색 눈동자가 섬뜩한 빛을 품었다. 그녀는 서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고작 그런 이유로, 로아즈를 제물로 삼은 거라고? 왜 하필 우리였는데? 왜?”
“만만해서. 그리고 적당해서.”
“…….”
“수도의 정치판에 끼어들질 않았으니 딱히 세가 있거나 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중요한 영지가 아니니 좀 피해가 발생해도 괜찮고, 검술에 재능이 있는 사람이 있어서 마검이 지나치게 강해질 우려도 없고.”
니콜이 우울하게 답했다. 에키의 손 안에서 찻잔 손잡이가 부스러졌다. 속이 뒤집어지고 살의가 전신을 채워나간다.
[진짜 화났네. 살의 끝내준다! 어, 근데 주인아, 나야 좋지만 이대로 계속되면 너 자제하기 힘들 걸. 쟤 죽여도 돼?]
마검이 그녀에게서 피어오르는 살의에 기뻐하면서도 눈치를 보았다. 에키는 간신히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그 조건에 부합하는 게 우리 뿐이야?”
“아니, 몇 더 있지. 그 중에 하필 로아즈가 걸린 이유는 모르겠어. 제비뽑기라도 했나. 아니면 나 때문인지도 모르지.”
“언니가?”
“현자의 제자인 내가 연고를 둔 가문이잖아. 그 가문이 기오사로 피해를 입고, 이게 다 기오사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창천기사단 탓이라 몰아붙이면, 내가 화를 내겠지? 그럼 내 스승인 현자께서도 관심을 가질 테고. 쇼의 규모가 딱 적당해지잖아?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게.”
니콜이 입술을 비틀었다. 잠시 생각하던 에키가 고개를 저었다.
“언니 탓이 아니야. 마탑이 관심을 두면 전말이 밝혀질 수도 있는데, 일부러 그러진 않았을 걸. 지금도 봐, 언니가 추적해서 결국 꼬리를 잡았잖아. 그러니까 로아즈가…… 선택된 건, 다른 이유겠지.”
몸살의 열기 위로 더 뜨거운 열이 올랐다. 에키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손에 얼굴을 묻었다. 깊고 뜨겁고 마물 같은 숨이 뱃속에서부터 솟구쳐 목을 불태우며 새어 나왔다. 그녀는 9년에 걸쳐 마검을 다스린 자제심으로 그것을 달랬다.
회귀 이전의 삶에서, 자기들끼리 처리할 수 있다고 우기며 제국이 창천을 배제하고 토벌단을 꾸렸던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에키네시아 로아즈가 불세출의 천재가 아니었다면 황실의 쇼는 성공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상상을 초월하는 천재였기에 계획은 엉망으로 망가졌다. 그리고 다른 방향으로 달성되었다. 마검의 악마가 유리엔을 포함한 아젠카를 무너뜨려 버렸으니.
그럼 이번의 삶에는? 이번에도 쇼는 망가졌다. 아무런 일도 발생하지 않고 마검이 증발해 버렸다. 황태자 측인지 2황자 측인지 알 수 없는 흑막은, 그럼 이 사태에 어떻게 대응했을까.
해답은 니콜이 내주었다. 그녀는 에키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에키. 아까 내가, 유리엔 단장과 디아상트 공녀의 약혼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로아즈가 안전하다고 했지.”
“응.”
“디아상트 공녀는 황태자비의 여동생이야. 그러니까 이 약혼은 황태자 전하가 내민 손이지. 황태자 세력이 유리엔 단장에게 보낸 최후통첩이란 뜻이야.”
“최후통첩……. 설마.”
“황태자 아래로 굽히고 들어와 충실한 개가 될지, 아니면 돌아서서 적이 될 건지. 결정하라는 소리지. 굽히고 들어가면 황태자는 그를 2황자 세력을 공격하는 데에 유용하게 써먹을 거고. 물론 2황자 측은 공녀를 암살해서라도 이 약혼을 막으려는 중이야.”
“그게 로아즈와 무슨 상관이야?”
“들어보렴. 일단 이 약혼을 거부하게 되면, 황태자와 유리엔 단장은 적이 돼. 제국 황실 전체와 완전히 척을 지게 되지.”
“2황자 전하가 있잖아. 약혼을 거부하고 나면 2황자 세력과…….”
“아니, 2황자 측은 절대로 유리엔 단장을 자기편으로 포용하지 못해. 2황자의 최대 지지자인 황제 폐하께서 유리엔 단장을 싫어하니까. 게다가 황태자는 그나마 행정 쪽을 내세우니 유리엔 단장을 휘하에 둘 수 있지만, 2황자는 기사거든. 유리엔 단장을 받아들였다간 그의 후광에 2황자가 눌려버릴 거야.”
“……그래서 이 약혼을 거부하면, 유리엔 단장이 제국 황실 전체와 적이 된다는 뜻이구나.”
“맞아. 2황자와는 이미 적이고, 그나마 황태자와는 가능성이 있는 상황인데……. 황태자가 보낸 제의를 거절하면 그렇게 되겠지. 약혼 거부는 키리에 황실의 적이 되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어. 그럼 제일 먼저 위험해지는 게 로아즈 백작가지.”
“여기서 로아즈가 왜 나와?”
에키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니콜이 말을 고르며 외알 안경을 추켜올렸다.
“……마검을 보낸 측에서는 의심을 하고 있거든. 로아즈와 유리엔 단장 사이에 무언가 끈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