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44화
로잘린 디아상트는 장미처럼 붉은 머리칼에 연두색 눈동자의 미인이었다. 잘록한 허리와 풍만한 가슴은 그녀를 육감적으로 보이게 만들었고, 치켜 올라간 눈꼬리와 섬세한 콧날은 그녀의 이지적인 면모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는 5월 19일 오후에 마법사 니콜 시즈튼과 스무 명의 근위기사에게 호위를 받으며 아젠카에 도착했다. 그리고 곧바로 단장실로 안내되어 유리엔과 독대했다.
“오랜만에 뵙네요, 유리엔 전하.”
“나를 전하라고 부르지 마라, 디아상트 공녀. 내 국적은 키리에가 아니라 아젠카다.”
“……알겠어요, 유리엔 경. 절 기억하고 계신가요?”
“그대의 자매와 형님의 결혼식 때 보았으니, 기억하고 있다. 약혼 문제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전혀 몰랐지만.”
유리엔은 책상에 기대선 채 팔짱을 끼고 있었다. 내려다보는 눈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는 짓씹은 듯한 발음으로 말했다.
“그대가 내 약혼녀라는 말은 처음 듣는데. 애초에 내게 약혼녀란 게 있었나?”
“아직은 약혼녀가 아니죠. 곧 약혼식을 치를 거니 상관없긴 하네요.”
“나는 듣지도 못한 약혼식을 말이지. 가관이군.”
“분명히 전갈이 갔을 텐데요?”
“그대가 도착하기 사흘 전에 온 통보 말인가?”
“네, 그거요.”
로잘린은 태연하게 끄덕이더니 멋대로 소파에 앉았다, 아무래도 유리엔이 그녀에게 자리를 권할 것 같지가 않아서. 그녀는 눈만 굴려 유리엔을 돌아보았다.
“그래서, 거절하실 건가요? 거절할 수 없잖아요, 경은. 여기서 약혼을 거절하는 게 무슨 의미인지 누구보다 잘 아실 테니까.”
“…….”
유리엔의 미간이 미미하게 일그러졌다. 로잘린이 소파에 앉은 채 다리를 꼬았다. 그녀는 턱을 괴고 말했다.
“제가 아는 유리엔 전, 아니, 유리엔 경이라면 담담하게 받아들이실 줄 알았는데, 의외네요.”
“공녀는 이 약혼에 불만이 없나?”
“불만, 있죠. 그래도 어쩌겠어요, 귀족으로 태어난 의무인데. 이건 말이 결혼이지 거래잖아요. 그래도 거래의 상대가 경이라니 전 운이 좋은 편이죠. 당신에게 반해서 상사병을 앓고 있는 영애가 몇 명인데.”
유리엔은 지친 얼굴로 눈을 감았다. 로잘린은 책상에 기대 서 있는 그의 모습을 눈으로 훑었다. 피곤해 보이는 얼굴도 홀릴 듯이 아름답다. 그녀는 미술품을 보듯 그를 감상했다. 그대로 잠시 기다리다가, 가만히 물었다.
“자, 어떻게 하실 건가요, 유리엔 경? 동의한 적 없는 약혼이라 선언하고 혈육을 향해 칼을 뽑아 드실 건가요?”
유리구슬처럼 무감정한 눈이 로잘린에게로 향했다. 백색의 남자는 표정이 적었다. 저 남자가 잘 웃는 편이었다면 상사병을 앓는 영애가 두 배로 늘었을지도 모르겠다. 로잘린은 감흥 없이 그런 생각을 했다. 침묵하던 그가 버석한 음성으로 답했다.
“시간이 필요하다.”
“이해해요. 쉬운 결정은 아니니까. 하지만 너무 시간을 끌지는 마세요. 절 보낸 분들이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
“……충고 고맙군.”
“참고로 말씀드리면, 전 경께서 약혼하지 않겠다고 하셔도 아무 상관 없어요. 솔직한 심정으론 경이 엎어 주셨으면 좋겠네요. 전 엎을 엄두가 안 나서. 아, 물론 감사한 건 감사한 거고, 정말 약혼을 거절하실 경우, 대가는 확실히 받아내겠지만요.”
“대가라니, 무엇을?”
“그건 경이 거절하기로 결정하시면 그때 말하죠. 약혼하시는 거면 알 필요가 없는 일이잖아요.”
로잘린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는 턱을 괸 손을 까닥거리며 덧붙였다.
“뭐, 영영 말할 일은 없을 것 같지만요. 당신은 결국 거절할 수 없겠죠. 제 입장에선 약혼하는 것도 꼭 나쁘진 않아요, 상대가 경이니까. 성검의 주인께선 정의에 어긋나는 일은 할 수 없다면서요? 경은 나쁜 남편이 되진 않으리라 믿어요.”
“……그만. 나가라, 공녀. 부단장이 머물 방을 안내해 줄 것이다.”
“네에.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전하.”
로잘린이 별 미련 없이 예를 취하더니 물러났다. 드레스 자락이 사락거리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문이 닫혔다. 그 옷자락 소리에, 오늘 오전에 마주했던 에키네시아 로아즈가 떠올랐다.
〈전 제 평온을 희생하는 선택은 하지 않아요.〉
숨이 막힌다. 전신에 쇠사슬이 감겨 죄여드는 것처럼. 유리엔은 오른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성검 랑기오사의 황금빛 문양이 그 손바닥에서 희미하게 빛났다.
“……안다. 어떤 선택이 나은지는. 그럼에도, 마음은 도저히, 통제가 되질 않아서…….”
문양이 대답하듯 짧게 반짝였다.
“조금만. 조금만 여유를 다오. ……포기할 수 있을 때까지. 내가 미쳐 버리기 전에, 결정을 내릴 테니까…….”
유리엔은 손 안에 얼굴을 파묻었다. 신음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 * *
“에키!”
앨리스가 식사를 방으로 가져온 덕에, 에키와 앨리스는 방 안에서 함께 저녁을 먹었다. 차로 입가심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익숙한 목소리가 그녀의 애칭을 부르며 문을 열어 젖혔다.
“……혼자 쓰는 방이 아니었구나.”
마법사의 로브를 걸친 니콜 시즈튼이 머쓱하게 볼을 긁적였다. 에키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스푼을 내려놓고 튕기듯 일어났다.
“니콜 언니!”
“어우, 얘가 민망하게 왜 이래.”
에키가 대뜸 니콜을 끌어안자 그녀가 투덜거렸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에키를 마주 안아주었다.
“오랜만이네, 에키. 근데 어째 너 살이 좀 빠진 것 같다? 아니 잠깐, 열이 있잖아!”
“아, 몸살이 좀 나서……. 괜찮아. 언니는 잘 지냈어?”
“가족분이십니까?”
앨리스가 그릇을 정리해서 쟁반에 올리며 물었다. 에키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람이에요. 니콜 언니, 이쪽은 룸메이트인 앨리스 윈터벨 양.”
“반갑습니다, 앨리스 윈터벨입니다.”
“안녕하세요, 니콜 시즈튼입니다.”
두 사람이 어색하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러고 나자 앨리스는 쟁반을 들고 일어서며 말했다.
“그럼 두 분이서 말씀 나누십시오, 전 저녁 훈련을 하고 오겠습니다.”
“어, 앨리스, 그럴 필요까진…….”
“열 시쯤 돌아오겠습니다. 좋은 시간 되세요, 에키.”
앨리스가 빙그레 웃고는 검을 챙겨서 밖으로 나갔다. 에키는 민망한 얼굴로 감사 인사를 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니콜이 에키에게 의뭉스런 웃음을 보냈다.
“친구?”
“……아마도.”
“아마도가 뭐니, 아마도가. 얘는. 사관학교 들어간단 소리에 솔직히 걱정 꽤 했는데, 그래도 친구까지 사귄 걸 보니 잘 지내는 모양이네.”
“꼭 내가 지금까지 친구가 한 명도 없었던 것처럼 말한다, 언니?”
“그 아가씨들은 친구라기엔 좀 부족하잖아. 아니니?”
에키는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니콜이 말하는 그 아가씨들이란 반쯤 의무적으로 티파티를 열고 서로 참석하곤 하는 또래의 귀족영애들이었다.
다들 사이는 나쁘지 않았으나 친구라고 부르기엔 거리감이 있었다. 실수 한 번 하면 사교계의 가십거리로 퍼져나갈 게 뻔한 사이라, 서로서로 조심스럽게 대했으니까.
15년이라는 세월을 더 살고 온 지금의 에키로서는 사실 그들이 잘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런데 몸살은 왜 났어? 살도 빠지고. 검 쓰는 거 많이 힘드니?”
“아냐, 괜찮아. 좀 무리할 일이 있어서 그래. 쉬고 있으니 금방 나아.”
“그래, 네가 알아서 하겠지. 애도 아니고. ……마검은?”
니콜이 한껏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에키는 장갑을 벗고 오른손바닥을 보여주었다.
“그대로야. 걱정 마, 난 멀쩡해.”
“……그럼 다행이고. 무사한 걸 보니 아무한테도 안 들킨 거지?”
[들켰으면서. 덩치 큰 놈한테. 들켰대요! 들켰대요!]
발, 닥쳐. 에키는 속으로만 생각하며 태연히 대답했다. 니콜에게 여기서 더 신경 쓸 거리를 얹어주고 싶진 않았다.
“안 들켰어. 참, 전보 봤는데, 호위로 온 거라며? 언니가 호위해 온 귀빈이 그……. 디아상트 공녀야? 유리엔 단장과 약혼하러 온 거고?”
“맞아. 이미 소문이 다 났나 보네.”
니콜이 고개를 끄덕이며 찻잔을 자기 앞으로 당겨왔다. 에키가 자연스럽게 그녀의 잔에 차를 부어주었다. 예전의 에키라면 차를 부어줄 생각도 하지 못했을 텐데. 이런 건 하녀의 일이니까. 여러모로 많이 변했다는 생각을 하며 니콜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에키는 물으려던 질문을 하나 삼키고 다른 것을 먼저 물었다.
“아젠카에 방문하려고 일부러 호위를 맡은 거야?”
“그래. 마탑에 마법사를 하나 요청하기에, 내가 자원했어. 하지만 널 만나러 올 목적만으로 자원한 건 아냐.”
“그럼?”
니콜이 주위를 살폈다. 그러곤 찻잔을 내려놓더니 허공에 그림을 그리듯 손가락을 놀리면서 작게 주문을 외웠다.
에키는 마나가 그녀로부터 퍼져나가 방 근처를 감싸는 것을 감지했다. 결계의 일종 같았다.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게 마법을 걸었어.”
에키가 눈을 굴리자 니콜이 대꾸했다. 그녀는 깍지 낀 손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탁한 녹색 눈동자가 외알 안경 너머에서 무거운 빛을 품었다.
“에키, 잘 들어. 이제부터 중요한 얘기를 할 거야.”
“마검의 출처를 추적하면서 알아낸 것들?”
“맞아. 우선, 지금 제일 중요한 문제부터. 유리엔 단장과 디아상트 공녀의 약혼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해. 로아즈 백작가를 위해서는 그 편이 안전하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공녀를 죽여서라도 이 약혼을 막으려는 자들이 있거든. 그래서 내가 일부러 호위에 자원했지. 마탑의 마법사라고 해도 그쪽 세력이 아니라는 보장이 없어서. 겸사겸사 너를 만나서 알려줄 것도 있고 하니까.”
에키는 멍한 얼굴로 니콜을 바라보았다. 니콜이 쓴웃음을 띄었다.
“에키, 황제 폐하를 제외하고 지금, 직계 황족이 누가 있니?”
“응? 황족이면……. 일단 황태자 전하께서 계시고, 유리엔 단장님이 3황자시니 그 위에 2황자님이 계실 거고…….”
“황태자 전하의 성함은?”
“음, 크루엔 드 하르덴 키리에. 맞아?”
“맞아. 그럼 황태자 전하의 특기가 뭔지는 알아?”
“…….”
“2황자 전하의 성함은?”
“……모르겠어.”
“다들 그래. 다른 직계 황족에 대한 인상은 희미하지. 하지만 3황자인 유리엔 단장에 대해서는 모두들 잘 알아. 제국민뿐만 아니라 지나가는 타국민들을 아무나 붙잡고 물어 봐도, 유리엔 단장이 몇 살에 마스터가 되었는지까지 아는 사람도 있을 걸.”
부정할 수 없는 말이었다. 최연소 마스터, 최연소 창천기사단장, 제국의 황자, 성검의 주인, 거기에 아름다운 외모와, 몇 가지 일화들까지. 유리엔 드 하르덴 키리에는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요소를 지나치게 많이 가지고 있었다.
니콜이 에키 쪽으로 고개를 가까이 하며 말을 이었다.
“다들 유리엔 단장만 기억하고, 그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지지. 다른 황족들에 대한 인상이 흐려. 유리엔 단장이 너무 빛나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