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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든 꽃-43화 (43/211)

검을 든 꽃 43화

그건 진짜였어. 아냐, 그럴 리가 없어. 그게 거짓이라고? 거짓이겠지. 사실일 수가 없잖아. 사실이라면, 그가 나를 사랑하기라도 한다는 소리야? 대체 왜? 언제? 이해가 되지 않아. 그럴 리가 없잖아. 역시 가짜야.

아니지, 거짓말로 그런 얼굴을 할 수는 없어. 무방비하게 웃고, 조심스럽게 살피고, 오열과 환희가 뒤섞인 그런 것들이, 모조리 거짓이라는 건 무리잖아.

글쎄, 그 감정이 진짜라면, 약혼은 왜 해? 역시 아니야. 호의를 보이고, 날 방심시켜서, 내가 마검의 악마인지를 확인하려는 거겠지. 그가 사랑하는 사람은 그 약혼녀인 게 아닐까?

정말? 정말로 그가 보인 것들이 전부 위장이라고? 그 모든 감정들이?

에키네시아 로아즈, 그럼 넌 그게 거짓이 아닐 거라 생각했니? 뭘 기대한 거야? 그는 너로 인해 죽은 기억을 가지고 있는데.

‘난 대체…… 뭘 기대한 걸까.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거지.’

마음이 엉망진창으로 뒤섞인다. 에키는 베갯잇에 고개를 파묻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

그 밤의 꿈은 끝없는 미로였다. 한 줄기 빛이 선을 이루며 그녀의 앞길을 인도했다. 희고, 눈부시고, 아름다운 빛의 선.

그러나 에키는 그 빛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날 어디로 데려가려는 건지 알 수가 없잖아. 내가 뭘 보고 너를 믿어야 해? 네가 도달하려는 곳이 어딘데?

빛은 그녀의 의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제자리에 멈춰선 채 빛을 무시했다.

홀로 서 있는 미로는 어둡고 추웠다. 빛의 선만이 그녀의 발치에서 원을 그리며 맴돌았다.

* * *

다음날 오전에, 정식 스콰이어 임명식이 있었다.

성대한 행사라기보다는 개인적인 서약이었다. 아젠카 대신전에서 파견된 신관이 참관하는 앞에서 로드와 스콰이어가 서약하면 끝나는 간단한 일이었다.

임명식 장소는 대신전 내의 예배당 중 한곳이었다. 참관은 금지되어 있어 로드, 스콰이어, 신관 외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었다. 그래서 바라하는 예배당 근처의 가로수에 기대서서 기다렸다.

에키네시아 로아즈는 붉은 드레스를 입고 나타났다.

검은색에 가까워 보일 정도로 짙은 갈색의 레이스와 리본으로 장식된 붉은 드레스였다. 끝자락 아래로 하얀 패티코트가 살짝 보였다.

장갑은 적갈색 실크, 목걸이와 팔찌, 귀걸이는 은과 자잘한 루비가 어우러진 세트. 엷은 망사가 드리운, 드레스와 세트인 챙이 좁은 모자. 그 모자에는 은으로 세공된 섬세한 장식이 리본과 함께 달려 있었다.

연한 분홍색 머리카락이 모자 아래로 굽이치며 흘러내렸다. 그 속에 있는 얼굴은 무표정했다. 바라하는 그녀에게로 다가가며 이름을 불렀다.

“에키.”

그를 돌아보는 얼굴에서 무표정이 숨어버리고 대신 가벼운 미소가 떠올랐다. 바라하는 살짝 올라가는 그 입꼬리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입술이 살짝 벌어지며 그 사이에서 그의 이름이 발음되어 나올 때까지.

“바라하 선배님, 여긴 웬일이세요?”

“웬일이긴, 네 임명식 보러 왔지.”

“참관은 금지되어 있잖아요.”

“그야 그렇지만, 내가 보고 싶었으니까 상관없다.”

바라하가 어깨를 으쓱였다. 에키는 그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더 이상 따지지 않았다. 몸이 아직 낫지 않았다. 서 있는 것도 피곤하니 생각하는 것도 귀찮았다.

특히 저 예배당 안에서 기다리고 있을, 유리엔을 떠올리면 더더욱. 그의 존재가 가시가 되서 마음속을 콕콕 찌르는 것 같았다.

‘약혼녀……. 오늘 도착한다고 했었지.’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일이 떠올라 버렸다. 에키는 입 안쪽 살을 깨물며 스스로를 설득했다.

유리엔과 그녀 사이에 사적으로 특별한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그가 약혼을 하든 결혼을 하든 그녀가 무슨 상관인가.

이성은 그렇게 판단하는데 마음이 통제가 되질 않았다. 자꾸 기분이 가라앉는다.

“어디 안 좋나?”

그녀가 가만 서 있자 바라하가 물었다. 에키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그럼 전 들어가 볼게요.”

“그래, 잘해.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기다리신다고요?”

“네가 정식으로 내 후배가 되는 날인데, 같이 축하해야지. 이런 날에도 공용식당에서 식사를 하려고? 괜찮은 곳을 알아.”

평소라면 그의 호의가 꽤 끌렸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스콰이어 임명식을 얼른 끝내버리고 방에 처박혀 잠이나 잘 작정이다. 괴상한 꿈을 꾸느라 밤잠까지 설쳐서 더 피곤했다.

에키는 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죄송해요, 다음에 같이 가요. 오늘은 피곤해서 바로 쉬려고요.”

“……흠. 잠깐 실례.”

바라하가 고개를 기울이더니 불쑥 다가왔다. 그가 에키의 팔을 당기더니 드리운 망사 사이로 손을 집어넣었다. 에키는 흠칫 몸을 굳혔지만 피하지는 않았다. 의도를 짐작했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이마 위에 커다란 손이 닿았다.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너, 열이 있잖아.”

“별거 아니에요.”

“쯧. 안 되겠네. 임명식 빨리 마치고 가서 쉬어라.”

바라하는 에키를 놓아주며 어깨를 부드럽게 밀었다.

‘예전에 몸살이 났을 때는 마구간에서 내내 붙어 있으면서도 눈치를 못 채더니, 오늘은 어떻게 알았지? 티가 많이 나나?’

에키는 내심 혀를 차면서 바라하에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내키지 않는 걸음을 떼어 예배당 안으로 들어갔다.

예배당 안은 고요했다. 검을 든 두 명의 천사에게 둘러싸인 신의 조각상이 정면에 있었다. 누구도 감히 신의 얼굴을 조각하거나 그리지 않기에, 조각된 신은 천을 겹겹이 눌러써서 성별도 얼굴도 알 수 없는 모습으로 아래를 굽어보았다.

조각상의 바로 아래에 신관이 보였다. 금실로 고어를 수놓은 흰 법의를 보니 대신관 바로 아래 직위인 수석 신관인 모양이었다. 신관은 강연대에 성서를 내려놓고 서약문을 펼치는 중이었다.

유리엔은 강연대 왼편에 서 있었다. 천장의 스테인드글라스를 투과해서 쏟아진 빛이 그의 머리칼을 타고 흘러내렸다.

에키가 예배당에 들어서자 그가 고개를 돌려 그녀 쪽을 보았다. 거리가 멀어 표정을 잘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천천히 예배당을 가로질러 앞으로 향했다. 그녀가 다가오는 동안 그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한 걸음씩 가까워지면서 조금씩 더 그의 얼굴이 자세히 보인다. 무엇으로도 가리지 않은 맨얼굴인데도, 천을 겹겹이 눌러쓴 신상처럼 읽을 수 없는 표정.

에키는 강연대의 오른편에 도달하여 치맛자락을 쥐고 무릎을 굽히며 인사를 했다.

“단장님을 뵙습니다.”

“에키네시아 생도.”

유리엔은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나서 짧게 침묵했다. 깨질 듯이 쨍한 하늘색 눈동자가 에키의 모습을 더듬어 눈에 담았다. 그는 망설이다 속삭이듯 말했다.

“……무리는, 하지 말기를 바랐는데. 임명식은 미루어도 되는 일이다.”

딱히 대답을 기대하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는 바로 고개를 돌려 신관 쪽을 바라보았다.

“빠르게 진행하지.”

“예?”

“시작해라.”

“아, 예.”

에키는 눈을 내리깔았다. 역시 몸 상태를 눈치챘구나. 저번처럼, 그저 잠시 보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말이 튀어나가지 않도록 입을 꾹 다물었다. 방심했다간 물음을 던질 것 같다. 어떻게 알아차린 거냐고. 그리고, 정말로 약혼하시는 거냐고.

신관이 서약문의 지루한 서두를 읊었다. 기사도, 스콰이어의 마음가짐, 로드가 갖추어야 할 덕목, 스콰이어는 로드를 충심으로 섬기고 로드는 스콰이어를 최선을 다해 이끌라는 뻔하디뻔한 말들.

그 말들이 이어지는 내내 에키는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반면 유리엔은 뚫어져라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하소서. 스콰이어 에키네시아 로아즈, 의심 없는 믿음으로 로드를 따르며 기사의 덕목을 체득할 수 있겠는가?”

“……예.”

그녀는 딴생각을 하느라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신관은 이어서 유리엔을 향해 물었다.

“기사 유리엔 드 하르덴 키리에, 가진 지식과 경험을 아낌없이 베풀어 최선을 다해 스콰이어를 기사의 길로 이끌 수 있겠는가?”

“예.”

“이로서 에키네시아 로아즈가 기사 유리엔 드 하르덴 키리에의 스콰이어가 되었음을 선언하노라. 이 서약은 죽음 또는 탄생이 있기 전까지는 영원히 효력이 유지됨을 고한다. 1629년 5월 19일, 아르 세밧티엠.”

서약문에서 말하는 ‘탄생’은 스콰이어가 기사가 되며 자연스럽게 스콰이어 관계가 해지되는 걸 뜻했다.

‘죽음’은 실제 사망 외에 검을 놓고 은퇴하거나 기사가 되는 것을 포기하는 경우도 포함하는 표현이었다.

신관이 서약문 두 장을 유리엔과 에키에게 깃펜과 함께 내밀었다. 각자의 서약문에 서명을 하고, 교환하여 상대의 서명이 있는 서약문에 자신의 서명을 더한다.

로드와 스콰이어의 서명이 나란히 존재하는 서약문이 서로에게 주어졌다.

이로서 에키네시아는 유리엔의 스콰이어가 되었다. 그녀가 기사가 되거나, 둘 중 하나가 검을 놓을 때까지 계속 유지되는 관계였다.

신관이 인사를 하고 성서와 펜을 챙겨서 예배당을 빠져나갔다.

에키는 서약문을 접어 챙겨 넣었다. 맞은편에서 유리엔이 제 손에 들린 서약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약간 멍한 낯.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말릴 틈도 없이 누르던 말이 튀어나가 버렸다.

“단장님, 아니, 로드. 약혼하신다고 들었어요.”

유리엔이 고개를 들었다. 또다시 읽을 수 없는 표정. 저 남자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고 싶어 미칠 것 같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화가 울컥 치솟았다. 에키는 메마르게 내뱉었다.

“축하드려요.”

“……그대는.”

유리엔이 힘없이 눈을 깜박였다. 그러곤 나직이 말을 이었다.

“전에, 그대는 행복해지고 싶어서 기사가 되려 한다고 했었지.”

“네, 그랬죠.”

“그 행복은 평온한 삶을 뜻하나?”

“네?”

막연하고 의미를 알 수 없는 물음이었다. 에키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유리엔은 마른세수를 하더니 얼굴에 덮은 손을 치우지 않고 입을 열었다. 손 아래로 쉰 듯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만약, 만약에, 그대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얻기 위해 그대의 평온을 희생할 수 있나? 혼란에 휘말리더라도 감수할 수 있나?”

여전히 뜬구름 잡는 듯한 질문이었다. 에키가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자 유리엔이 화급히 덧붙였다.

“어디까지나 가정이다. 그저…….”

“……전 제 평온을 희생하는 선택은 하지 않아요.”

에키는 그의 말을 끊으며 답했다. 평온한 삶에 그녀의 행복이 있냐고? 물론이다. 그녀는 오직 소중한 사람들이 살아 있는 삶을 위해 9년에 걸쳐 기오사를 모았다. 그것을 위해 모든 걸 내던지고 노력했다. 그러니 그녀의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제 행복이 평온한 삶을 뜻하냐고 물으셨죠. 네, 그래요. 제 가족과, 제 친지들과, 제 주위 사람들과 함께 평온하게 살아가는 것, 그게 제 행복이에요. 주위를 위험하게 만드는 선택을 하느니 제가 원하는 걸 포기하겠습니다.”

몸에 올라 있는 열이 여유를 앗아가, 그녀는 그저 떠오르는 대로 진심을 답했다. 그녀의 말이 이어질수록 유리엔의 얼굴이 흐트러졌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달싹이던 입술이 꾹 다물렸다. 무언가 솟구치는 걸 눌러 삼키는 것처럼. 그러자 그의 표정이 무덤덤해졌다.

“이해했다, 에키네시아. 그럼, 오늘은 돌아가서 쉬어라. 스콰이어 업무는 사흘 후부터 시작이다. 휴식이 더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도록.”

“감사합니다. 로드.”

유리엔이 먼저 예배당을 나갔다. 에키는 멀어지는 그 하얀 뒷모습을 잠시 보다가, 그 자리를 떠났다. 빈 예배당에는 얼굴 없는 신상만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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