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꽃-42화 (42/211)

검을 든 꽃 42화

“……말씀하신 취지를 지켜 주신다면요.”

“앨리스 생도는?”

“저도 함께 하겠습니다.”

“으으, 드디어! 고마워, 에키네시아 생도, 앨리스 생도! 내가 잘할게!”

파티마가 폴짝폴짝 뛰며 좋아하더니 품에서 종이를 두 장 꺼냈다. 클럽 신청서였다. 그녀는 땋은 머리를 팔랑이며 달려가 가까운 곳에 있던 에키의 책상 위에서 깃펜과 잉크까지 챙겨왔다. 마음이 변하기 전에 도장을 받아내려는 듯 급한 행동이었다.

“신청서를 들고 다니셨어요?”

“기본이지, 기본! 자! 잘 읽어보고 빨리 서명해!”

파티마가 신이 나서 깃펜을 내밀었다. 에키와 앨리스는 각각 신청서를 받아들었다. 클럽에 대한 약관이 간단히 쓰여 있었다. 파티마가 말한 그대로, 주 1회의 모임 외에는 특별한 규칙이 없는 간단한 약관이었다.

신청서를 훑어 내리는 그들에게 파티마가 깜박했다는 듯 말을 꺼냈다.

“아, 아까 빅뉴스 얘길 하다 말았지. 5월 30일 전체 생도 순위전 날에, 생도 대표 선거가 있을 거야.”

“그건 당연한 일이잖습니까. 생도 대표 자리가 공석이 되었으니.”

앨리스가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파티마가 아직이라는 듯 손가락을 흔들었다.

“그래, 이건 사실 빅뉴스가 아냐. 묘한 소문이 붙어 있긴 하지만, 그래도 그냥 지나가는 소식일 뿐이지. 정말 엄청난 소식은 따로 있다고.”

“묘한 소문이라뇨?”

“음, 으음, 전 생도 대표에 대한 이야기인데, 별로 좋은 내용은 아냐. 방을 정리하다가 발견된 것들이 있어서. 그중에서 안 좋은 짓을 저질렀다는 증거가 꽤 나왔거든. 좀, 질이 나쁘다더라. 모르는 게 나아. 아직 확실시된 것도 아니고 조사 중이니까.”

앨리스가 휘둥그렇게 눈을 치떴고 에키는 혀를 찼다. 이안 펠레트로가 그녀에게 브레드 같은 놈을 가져다 붙였던 걸 생각하면, 어떤 식의 안 좋은 짓들일지 짐작이 갔다.

파티마가 어색하게 웃더니 분위기를 환기하듯 손뼉을 쳤다.

“그보다 이제 진짜, 진짜로 놀라운 소식을 들어야지.”

“무슨 소식입니까?”

앨리스가 서명한 신청서를 건네주며 물었다. 파티마는 들뜬 어조로 답했다.

“놀라지 마, 단장님이 조만간에 결혼하신대! 그래서 약혼녀분이 아젠카에 곧 도착한댔어!”

신청서에 서명을 하던 에키의 손이 미끄러졌다. 깃펜의 잉크가 종이 위에 엉망으로 번졌다. 그녀는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누가, 결혼한다고요? 어느 단장님이?”

“아젠카에 다른 단장이 있어? 당연히 창천기사단장 유리엔 드 하르덴 키리에 경이지!”

머릿속이 희게 비었다. 그녀가 넋이 나간 사이 앨리스와 파티마가 대화를 주고받았다.

“굉장한 소식이군요. 약혼녀분은 언제쯤 도착하십니까?”

“내일 도착하신대. 정확히는 약혼식을 하기 위해 오시는 거랬어.”

“네? 그럼 아직 약혼녀가 아니잖습니까.”

“에이, 약혼하러 오는 거니까 약혼녀지 뭘. 결혼식은 언제 하시려나? 화려하겠지?”

“창천의 단장이기 이전에 제국의 황자이시니 성대하겠지요. 그, 약혼녀라는 분은 어떤 분이십니까?”

“어……. 분명히 들었는데, 디아, 디아, 디아, 뭐였는데, 성이.”

“혹시 디아상트입니까?”

“맞아! 디아상트! 디아상트 공녀라고 그랬어.”

디아상트. 현 키리에 제국에서 가장 세가 강력한 공작 가문. 그리고, 황태자비를 배출한 가문. 아는 이름이 들리자 간신히 정신이 돌아왔다.

에키는 서명한 신청서를 파티마에게 건넸다. 파티마가 신청서에 엉망진창으로 번진 잉크를 보고 기겁했다.

“으악, 뭐야! 다 번졌잖아! 자, 이걸로 새로 서명해.”

“아, 네.”

에키는 새 신청서에 빠르게 서명을 한 뒤 그것을 넘겨주었다. 그러곤 파티마와 앨리스를 보며 말했다.

“저, 앨리스, 파티마 선배님. 제가 좀 피곤해서…….”

“아, 환자 앞에서 너무 떠들었네. 응, 푹 쉬어.”

“전 저녁쯤에 돌아올 테니 걱정 말고 쉬십시오, 에키.”

“고마워요, 다들.”

그들이 한마디씩 인사를 건네고 자리를 떴다. 앨리스는 스튜 쟁반까지 챙겨서 나갔다.

두 사람의 기척이 완전히 멀어지자마자 에키는 벌떡 일어나 침대에서 벗어났다. 중간에 어지럼증이 와 잠시 휘청거렸지만 마나로 버텼다. 그녀는 책상에 앉아 빈 양피지와 깃펜을 당겨왔다.

[야, 유리엔 걔 결혼했었어? 예전에도?]

“아니, 이전에는 없었던 일이야.”

에키는 어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시간을 되돌리기 이전, 유리엔은 결혼은커녕 약혼한 적조차 없다. 회귀 이전 그가 죽었던 시점,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3년 후까지도.

그 흔한 스캔들 한 번 안 터졌던 사람이다. 괜히 수많은 제국 영애들이 그를 두고 낭만소설 같은 망상을 펼쳤던 게 아니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곁에 두지 않았던 고고한 기사단장이니 그토록 인기를 끌었던 거다.

그런데, 약혼이라고? 결혼을 한다고? 절로 신음이 나왔다. 속이 아릿하게 아파 오면서 머리는 빙글빙글 돌다 못해 뒤죽박죽으로 엉켰다. 에키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깃펜을 쥐었다.

[주인아, 지금 뭐 하려는 거야? 편지라도 쓰려고?]

“아니. 좀, 정리를 해봐야겠어.”

[엥? 무슨 정리?]

“시간을 되돌리기 전에 있었던 일들이랑,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

무언가가 바뀌고 있었다. 무엇이 원인이 되어 어떤 식으로 변화하고 있는 중인지 알아야 했다.

회귀로 인해 생겨난 변화라. 카이로스기오사로 인해 생긴 변화를 쫓아올지도 모르는 라키아기오사와, 그로 인해 생겨날지도 모를 결절이 떠올랐다.

안 그래도 피곤하던 몸에서 한 줌 남은 힘조차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일단, 일단…… 써보자. 처음부터, 유리엔이 죽었던 시점까지.’

에키는 양피지 위에서 깃펜을 움직였다. 지워진 과거와 변화한 현재를 나란히 적기 시작했다.

-1. 1629년 3월 17일 새벽, 로아즈 저택 주방에서 마검 발견

: 같은 시각, 빈 꾸러미만 발견

-2. 마검의 악마 출몰, 로아즈 가문을 시작으로 주위 영지들에서 대량학살 발생

: 마검의 악마가 나타나지 않음, 사망자 없음

-3. 1629년 봄, 창천기사단 마물 토벌, 스펙터 급습 사건, 스콰이어 바라하 이슬라프 사망을 포함한 다수의 피해

: 스펙터 사전 처리, 캠프에 결절 발생, 이안 펠레트로 사망, 바라하 이슬라프 생존, 그 외 사망자 없음

거기까지 적은 다음 그녀는 깊게 심호흡을 했다. 4번의 첫 줄은 비워 두었다. 과거에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사건이니까. 그리고 그 아랫줄에 오늘 생긴 사건을 썼다. ‘유리엔 드 하르덴 키리에, 디아상트 공녀와 약혼 예정.’ 글씨가 그녀의 심경을 반영하듯 휘청거렸다.

에키는 한동안 그 휘청거리는 글자들을 내려다보았다. 디아상트 공녀가 누구더라. 디아상트 공작가에서 현 황태자비를 배출한 건 아는데, 또 다른 딸이 있었던가. 기억이 잘 나질 않았다.

시간을 되돌리기 이전의 스무 살 에키네시아 로아즈는 백작 영애로서 제법 사교계 정보를 잘 알았다. 하지만 지금의 에키네시아는 15년이라는 세월을 사교계와 완전히 동떨어진 곳에서 보낸 사람이었다. 그 삶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던 사교계 관련 정보는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니콜 언니가 호위해서 온다는 귀빈이 정황상 디아상트 공녀겠지. 그럼 언니에게 물어보면 돼. 그래, 그렇게 하자.’

에키는 깃펜 끄트머리로 그 이름을 톡톡 두드리다가 간신히 눈을 뗐다. 들여다보고 있어도 생각나는 게 없으니 시간 낭비였다. 그녀는 그 아랫줄에 5번이라는 번호를 적었다.

- 5. 엘기오사 발견(성녀 살해 사건)

여기부터는 현재에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므로, 예전과 다르게 변할지도 모른다. 지금까지의 사건들이 바뀌었듯이.

행방불명인 기오사 세 개 중의 하나인 엘기오사가 발견된 사건.

셋 중 다른 하나는 누구도 행적을 알지 못하는 신검 라키아기오사였고, 또 다른 하나는 지금 그녀의 오른손에 들러붙어 있는 바르데르기오사였다.

엘기오사는 에키네시아가 마검에 조종당하고 있던 시기, 그러니까 지금 이 시기 즈음에 창천기사단에게 발견되었다.

오너가 살해당하고 나서 기오사가 발견된 불운하고 끔찍한 사건이었다. 엘기오사의 오너는 기오사 오너들 중 가장 무력한 존재였기에 스스로를 지킬 수가 없었다.

에키는 창천 소속이 아니었으므로 그 사건이 일어난 정확한 시기나, 발견된 장소, 사건의 내막이 어땠는지 등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그냥 그런 일이 있었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지금 이 시점에 엘기오사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물론 성녀 살해 사건이 발생하고 나면, 창천기사단은 엘기오사를 회수하여 기오사 홀에 보관하게 된다.

그 이후부터는 엘기오사의 행방이 명확해진다. 회귀 이전의 에키가 엘기오사를 찾아낼 수 있었던 이유도 그 덕분이었다.

현재 시간대에 엘기오사가 어디에 있는지 알았다면 그녀는 아젠카로 오기 전에 그것부터 찾으러 갔을 것이다.

‘……아니지, 어차피 엘기오사는 내가 쓸 수 없는 기오사잖아. 미리 찾아내도 의미가 없어. 성녀 살해 사건은 아는 게 없어서 막을 방법도 모르겠고.’

에키는 쓴웃음을 띠었다.

인간의 자비심으로 칼날을 만들고, 인간의 사랑으로 장식을 덧붙인 치유검(治癒劍) 엘기오사는, 검술과 관계없이 주인을 선택한다.

그 검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누군가를 증오해 보지 않은 자만이 오너가 될 수 있었다.

엘기오사로는 아무도 죽이거나 다치게 할 수 없다. 그 검으로는 심장을 찔러도 다치지 않으니까. 엘기오사로 벨 수 있는 건 엘기오사의 오너뿐이었다.

자기 자신 외에는 누구에게도 상처를 낼 수 없는 검이자, 모든 인간을 사랑하고 치유하는 자애의 검.

에키로서는 쥐는 것이 불가능한 기오사였다.

그녀는 성녀 살해 사건에 시선을 두다가 고개를 젓고는 그 아래에 다음 사건들을 썼다.

-6. 1631년 겨울, 제국 악마토벌단 결성, 마검의 악마에게 전원 몰살.

-7. 1632년 가을, 마검의 악마로 인해 아젠카 몰살, 기오사 오너 전원 사망(유리엔 사망)

둘 모두, 과거에는 일어났으되 현재에는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에키네시아가 더 이상 마검의 악마가 아니므로.

마지막 줄의 마지막 글자에서 깃펜이 길게 머물렀다. ‘사망’이라는 글자. 그 간단한 글자 아래에 얼마나 깊은 것이 맺혀 있는지. 양피지에 닿은 부위에서 잉크가 핏방울처럼 번져나갔다.

그녀는 깃펜을 내려놓고 긴 한숨을 쉬었다. 유리엔의 사망 시점까지만 따져보면 당장 생각나는 큰 사건은 이 정도였다.

벌써부터 많은 것이 바뀌었다. 그 중 어떤 일이 유리엔의 약혼이라는, 이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을 불러일으킨 걸까. 변화한 게 너무 많아서 감이 잡히질 않았다. 아니면, 사실 유리엔의 약혼은 사건이 바뀌며 나타난 나비 효과가 아니라…….

‘유리엔도 지워진 과거를 기억하고 있으니까, 그것 때문일지도 몰라. 예를 들면,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미처 고백하지 못했던 걸 죽으면서 후회했다던가. 그래서 이번에는 바로 고백하고 약혼을…… 하게 되었다던가.’

생각이 이어지면서 어지러움이 심해졌다. 가슴 안쪽에 통증이 고였다가 흘러내렸다. 몸살 탓일 것이다. 몸살 탓이어야 했다. 건강한 몸과 멀쩡한 정신으로 다시 보면 다른 생각이 나겠지.

에키는 깃펜을 내려놓고 양피지를 둘둘 말아 안 보이는 곳에 감췄다. 그리고 침대로 돌아가 도로 누웠다.

푹신한 솜 아래로 몸이 잠겨드는 듯했다. 깊은 물속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 같다. 그녀는 가늘게 숨을 내쉬고 눈을 감았다.

감은 눈꺼풀 안쪽으로, 결절에서 나왔을 때 보았던 그의 표정이 떠오른다. 마치 죽은 줄 알았던 연인이 살아 돌아오는 장면을 본 듯한 표정. 그녀를 사랑하는 것 같은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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