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꽃-41화 (41/211)

검을 든 꽃 41화

[하루 가지고 안 될 거 같은데. 야, 너 단련 좀 해라.]

“나름 하고 있는 거 알잖아. 돌아온 게 고작 두 달 전이야.”

[어? 두 달밖에 안 됐어?]

“3월 17일에 돌아왔고, 오늘이 5월 18일. 딱 두 달이지. 찻숟가락이나 들던 아가씨 몸으로 이 정도면 빠른 거라고.”

[아, 몰라. 더 빨리 튼튼해지란 말이야! 네가 누워 있으니까 너무 심심해! 심심해애!]

“시끄러워, 입 다물어. 머리 울린다.”

[치이.]

에키는 마검의 칭얼거림을 무시하고 열이 오른 뺨을 수건으로 문질렀다. 그러면서 서랍 안쪽에 있던 니콜의 전보를 마나를 이용해 당겨 왔다.

-호위 임무로 귀빈과 함께 아젠카 방문 예정, 하얀 사자에 대한 이야기는 그때에.

“귀빈은 누구고 도착은 언제야. 아무리 전보비가 비싸다지만 제일 중요한 걸 빼먹으면 어떡해, 니콜 언니.”

에키가 한숨을 쉬며 전보를 내려놓았다. 마나에 실린 종이는 하늘하늘 날아 서랍 속으로 들어갔다.

황가와 로아즈 백작가에 있던 마검의 일은 그녀 혼자 생각해 봤자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였다.

그녀는 생각을 포기하고 이불 속에 파고들었다.

잠이 들락 말락 하는 찰나에, 누군가가 방으로 오는 게 느껴졌다. 두 명이었다.

에키는 실눈을 뜬 채 문 쪽을 주시했다. 곧 노크 소리가 들렸다.

“에키네시아 생도, 안에 있어? 들어가도 될까?”

“자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노크라니요. 무례합니다.”

“그럼, 노크 없이 들어가도 돼? 그게 더 무례한 거 아냐?”

“……그건 그렇습니다만.”

문 밖에서 작게 티격태격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는 목소리였다. 파티마와 앨리스. 에키는 몸을 일으켜 등 뒤에 베개를 받쳤다. 곧 문이 열리고, 식사 쟁반을 든 앨리스와 파티마가 방 안에 들어섰다.

“에키네시아 생도! 아프다며!”

“안녕하세요, 파티마 선배님. 별거 아니에요.”

파티마가 일어나 있는 에키를 보자마자 냉큼 달려와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녀는 에키의 이마와 제 이마를 양손으로 짚어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늘 침대에서 나올 생각하면 안 되겠다. 기다려, 내가 좋은 약을 가져올 테니까!”

“안 그러셔도 되는…….”

“점수 따려는 거니까 봐줘. 난 아직 너 포기 안 했어!”

파티마가 생글생글 웃고는 순식간에 방 밖으로 사라졌다. 앨리스가 미안한 표정으로 다가와 에키의 앞에 쟁반을 내려놔 주었다.

“미안합니다, 에키. 파티마 선배님이 왜 제가 혼자 식사를 하러 온 거냐고, 당신은 어디 있냐고 물어서.”

“파티마 선배님이면 그럴 만하죠. 그런데 이건…….”

앨리스가 그릇 뚜껑을 열어주었다. 김이 모락모락 날 정도로 따뜻한 스튜였다. 큼직하지만 부드러운 고기와 야채가 든, 자극적이지 않은 크림 스튜.

공용식당의 오늘 아침 메뉴에는 없던 음식인데다 아무리 봐도 환자를 위한 것이었다.

에키가 의아하게 그 스튜를 보자 앨리스가 그녀에게 스푼을 챙겨주며 설명했다.

“쉴 때 쉬더라도 식사는 해야 합니다. 주방에 부탁해서 만들어 왔으니 먹어요.”

“……가서 훈련하랬더니, 주방까지 가서…….”

“에키가 식사를 하고 나면 훈련하러 갈 거니까 걱정 마십시오. 정 걱정되면 낫고 나서 대련해 주면 되잖습니까.”

앨리스가 빙긋 웃었다. 에키는 스푼을 쥔 채 고개를 약간 숙였다.

“거, 걱정이 아니라……. 고마워요, 앨리스.”

작게 대답하는 그녀의 얼굴이 약간 빨갰다. 부끄러워하네. 앨리스는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았다.

그 대련과 신입생 순위전 이후, 마물 토벌 때를 제외하고 에키와 앨리스는 대체로 붙어 다녔다.

앨리스는 그렇게 함께 다니며 에키네시아 로아즈가 의외로 무르다는 걸 알아차렸다. 정확히는 호의를 보이거나 약하게 구는 사람한테 물렀다.

악의는 아무렇지도 않게 넘기면서 호의는 받는 것도 주는 것도 부끄러워한다.

그러면서 또 솔직할 땐 솔직해서, 대놓고 당신이 기사에 어울린다느니, 당신이라면 검을 나누어도 즐거울 것 같다느니, 그런 말들을 태연히 하고.

앨리스는 저도 모르게 흐뭇한 얼굴로, 스튜를 먹는 에키를 보았다. 한동안 달그락거리는 스푼 소리만 들렸다. 그러다 요란하게 문이 열렸다. 파티마였다.

“얘들아, 내가 오는 길에 엄청난 소식을 들었어!”

그녀는 들뜬 얼굴로 말하고는 쪼르르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곤 손에 들고 있던 작은 유리병을 에키의 쟁반 위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아, 이건 꿀에 약초를 절인 건데, 차처럼 타 먹으면 돼. 우리 집안에서 내려오는 민간요법이야. 몸에 좋아, 맛도 있고. 어쨌든, 진짜 빅뉴스야, 빅뉴스!”

“무슨 일인데 그러십니까?”

앨리스가 의아하게 물었다. 파티마가 침대 발치에 걸터앉더니 반짝이는 눈으로 에키와 앨리스를 바라보았다.

“말해 줄 테니까 대신에 우리 클럽 와라.”

“…….”

“전에 너희 친해지면 둘이 같이 클럽 들어오기로 했잖아!”

“그 말에 제가 대답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요, 파티마 선배님.”

“안 넘어오네. 칫.”

에키의 대꾸에 파티마가 입술을 비죽였다. 에키는 꿀과 약초가 섞여 담겨 있는 유리병과, 거의 다 비운 스튜 그릇을 번갈아 보았다. 깔깔하던 목 안이 따듯한 스튜로 데워졌다. 스튜 그릇과 유리병을 나란히 놓으니 마음이 흐물흐물 풀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는 사이 파티마가 할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됐어, 그냥 말해 줄게. 5월 30일이 전체 순위전인 건 알지? 그날에…….”

“파티마 선배님.”

“응?”

“위즈덤은 어떤 클럽이에요?”

부루퉁하던 파티마의 얼굴이 에키의 질문에 불을 켠 것처럼 밝아졌다. 그녀가 침대를 짚고 그들 쪽으로 바짝 몸을 들이밀었다.

“우, 우리 클럽은! 좋은 클럽이야!”

“……그러니까 어떻게 좋은 클럽인 데요?”

“어어, 음, 일단 자율적이야! 어, 그리고, 어……. 잠깐만.”

파티마는 에키를 볼 때마다 클럽에 들어오라고 계속 말했으면서도, 어떤 클럽이냐고 물어 올 줄은 몰랐던지 잠시 버벅거렸다. 그녀가 고심하며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앨리스가 에키에게 물었다.

“클럽에 들어갈 생각입니까, 에키?”

“글쎄요, 들어보고요. 앨리스는요? 클럽에 소속되어 있어요?”

“아니요. 그다지 끌리지가 않아서…….”

“왜 클럽이 별로라고 생각하는데, 너희는?”

파티마가 불쑥 끼어들었다. 앨리스가 갸웃거리더니 답했다.

“지금의 클럽은 대부분 사교모임에 가깝더군요. 출신과 가문에 따라 모여서 본국의 일에 대해 논하고 같은 라인의 준기사나 기사를 초빙하여 강습을 받는. 그게 나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원하는 바와는 좀 달라서, 지금으로선 그다지 들어갈 생각이 없습니다.”

에키는 알지 못했던 얘기였다. 그녀는 사관학교의 주류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생활을 했으므로. 특이한 옷차림이라는 기행도 기행이지만, 입학 첫날부터 스콰이어로 지명되어 바라하에게 따로 교육받은 탓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바라하 선배가 브레드, 그놈 같은 것들이 모여 있는 클럽도 있다고 했었지.’

병신으로도 황당한데 병신이 모여 있는 클럽까지 있다니 기가 차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났다.

파티마가 앨리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번에는 에키를 바라보았다.

“에키네시아 생도는? 왜 클럽에 관심이 없어?”

“전 그냥 단체행동이 번거로워서요. 얽매이고 싶지 않아요.”

“흐음. 두 사람 얘기 잘 들었어.”

파티마가 씨익 웃었다. 그녀가 가슴을 쭉 펴며 단언했다.

“그런 너희 둘에게, 위즈덤은 그야말로 딱이야! 딱! 그러니 둘 다 우리 클럽에 와!”

“대체 그 위즈덤은 어떤 클럽입니까? 대부분의 클럽에 대해서는 들어 봤지만 위즈덤은 처음 듣습니다.”

앨리스가 미간을 희미하게 찌푸린 채 묻자, 파티마가 냉큼 대답했다.

“모를 수밖에. 위즈덤은 내가 초대 클럽장이고, 클럽원은 현재 아무도 없거든.”

“……네?”

“내가 만든 클럽이란 말이야. 소수 정예, 자율행동, 지혜로운 기사가 되는 걸 추구하는…….”

“아니, 잠깐만요, 그럼 지금까지 클럽원이 한 명도 없었단 말이세요?”

에키가 황당하다는 어조로 물었다. 파티마는 헤실거리며 눈을 피했다.

“너희가 들어오면 두 명이 생기지. 으음, 사실 말이야, 내가 원하는 형태의 클럽은 사관학교에 없더라고. 그래서 클럽장이 될 수 있는 2학년이 되자마자 클럽을 개설했지.”

“선배님이 원한 클럽은 어떤 건데요?”

“일단 지금의 클럽들처럼 몇십 명에 이르는 대규모는 아니야. 클럽 파티도 귀찮고, 출신지나 가문 간의 관계를 따져가며 클럽원을 받고 싶지도 않아. 유서 깊은 전통 같은 걸 만들 생각도 없고. 정치를 끌어들이기도 싫어. 그냥 나는, 사관학교에 처음 클럽이 생겼을 때처럼, 뛰어난 인재들이랑 같이 훈련을 하고 싶을 뿐이야.”

“……그렇군요. 정치……. 제가 느낀 위화감이 그것이었습니다. 지금의 클럽들은 너무 거대하고, 정치적인 성향이 강했습니다. 정치도 중요하지만, 제가 원하는 클럽은 생도 간의 순수한 훈련 모임이라서. 그런 클럽은 이미 남아 있지 않더군요. 취지에 무척 공감이 갑니다.”

앨리스가 약간 놀란 얼굴로 주억거렸다. 파티마가 눈동자를 굴리더니 말을 이었다.

“우리 클럽은 일주일에 한 번, 모여서 함께 대련하는 시간을 가질 거야. 더 모이고 싶은 사람은 각자 약속을 잡아 더 모이고, 스승을 모서 강습받고 싶으면 내게 말하면 돼. 내가 알아서 섭외를 해볼 테니까.”

“그게 다입니까?”

“응, 그 외에는 자율. 사람마다 맞는 훈련 방식은 다른 법이잖아? 도움이 필요하면 돕겠지만, 다른 클럽들처럼 강제적인 훈련은 하고 싶지 않아. 열 명 이상 인원을 늘릴 생각도 없어. 여섯 명에서 여덟 명 정도가 최적이라고 생각해. 그래야 한 번 모일 때마다 전원 대련이 가능하잖아.”

에키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느슨한 규칙이었다. 어차피 파티마 외에 클럽원이 없다면, 앨리스와 함께 위즈덤에 들어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단체 행동에 얽매일 일이 없을 테니까.

처음 이상한 소문이 퍼져 있을 때부터 소문에 아랑곳하지 않았던 파티마가 마음에 들기도 했고.

‘클럽에 들면 파티마 선배 검술도 도와줄 수 있겠구나. 마물 토벌 때 보니까 조금만 고치면 훨씬 발전하겠던데. 내 검술도 혼자 실력을 늘렸다는 것보다는, 클럽 덕분에 검술이 늘어났다고 하는 게 더 자연스럽겠지. 음, 나쁘지 않네.’

에키는 고민하며 앨리스를 살짝 돌아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눈치챈 앨리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사이의 눈짓을 알아차린 파티마의 얼굴이 환해졌다.

“들어오는 거야? 응?”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