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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든 꽃-40화 (40/211)

검을 든 꽃 40화

“된 건가?”

바라하가 막사 위의 그녀를 향해 물었다. 에키가 고개를 끄덕였다.

“감이 좋아요. 어쩐지 될 것 같……!”

그녀의 말이 끝나기 전에 결절 전체가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다. 허공의 금이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부스러지는 계란 껍데기처럼, 황혼에 물들어 있던 하늘이 조각 나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 너머로는 새파랗게 맑은 하늘이 보였다.

발아래에서는 액체가 희미하게 흐려지더니 천천히 사라졌다. 마물의 시체들은 가루처럼 흩날리며 소멸했다. 망가진 막사들만이 그대로 남았다.

공간이 일그러졌다 펴지며 진동이 일었다. 멀미가 날 것 같아 에키는 입을 틀어막았고, 바라하는 막사 기둥을 붙들었다.

그 모든 이변은 갑작스럽게 멈췄다. 안개가 사라진 흰 까마귀 협곡이 멀찍이 보였다. 하늘은 푸른 낮이었다. 캠프가 있었던 바로 그 위치. 결절에 삼켜졌던 것들이 모두 제자리로 복귀했다.

“진짜 돌아왔군…….”

바라하가 믿기지가 않는 듯이 중얼거렸다. 에키는 막사 아래로 뛰어내리며 주위를 확인했다.

찰나 굉장한 속도로 접근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방어하려던 그녀는 그것이 누구의 기척인지를 깨닫고 팔을 멈췄다.

“단장……. 흡.”

무어라 하기도 전에, 끌어안겼다.

절박한 움직임. 은은한 향이 났다. 은실 같은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그녀의 위로 마구 쏟아져 내렸다. 단단한 가슴팍이 제복 너머로 느껴졌다. 그 속에서 심장이 부서질 듯 뛰고 있었다. 그의 가슴팍에 눌린 그녀의 뺨에 그 박동이 느껴질 정도로.

큰 손이 그녀의 뒷머리를 감싸 안았다. 그 다음, 머리카락 사이로 스며들 듯 파고들어 아직 젖어 있는 머리를 쓸어 넘긴다. 다른 한 손이 턱을 치켜든다. 턱 선을 더듬고 올라가, 그녀의 눈가를 어루만진다. 이어 볼을 쓰다듬어 본다.

그 손끝은 가늘게 떨고 있었다. 환상이 아니라 실제인지를 확인하는 듯한 느낌. 낮고 고통스러운 신음이 머리 위에서 들렸다.

에키네시아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에게로 쏟아져 내린 긴 은발 사이로 유리엔의 얼굴이 보였다.

그 얼굴을 본 순간,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생각이 비었다.

무너졌다가 간신히 복구된 것 같은, 메마른 사막을 헤매다 겨우 물가에 닿은 것 같은, 잃어버렸던 빛을 되찾은 장님 같은, 오열과 환희 중에 무엇을 먼저 표현해야 하는지 가늠하지 못하는 듯한, 그런, 얼굴.

푸른 눈이 물에 젖은 하늘처럼 일렁거렸다. 눈매가 붉게 흐트러졌다. 입매는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를 판단하지 못하고 그저 떨기만 했다. 눈가에 고인 눈물이 흐르기 직전처럼 아슬아슬하게 부풀어 있었다.

유리엔 드 하르덴 키리에에게서 보리라고는 절대로 상상하지 못했던 표정.

아니, 꼭 그가 아니라 해도, 그 누구에게서도 본 적이 없었던 표정이었다.

마치 그녀가, 그에게,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소중한 존재라도 되는 양.

‘왜…….’

왜 그렇게. 왜, 그런 얼굴로, 나를 보는 건가요, 당신은,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을 보는 것 같잖아. 왜? 당신이 그럴 리가 없는데. 당신은 기억하고 있으면서. 내가 저지른 짓들을, 내가 당신을 파멸시켰던 날을.

아, 그래, 당신은 내가 그 악마라는 걸 모르는 거죠, 그렇죠? 나를 방심시키기 위해, 사랑을 가장하는 건가요?

그게 아니면 말이 되질 않아. 당신이 날 사랑할 리가 없으니까. 나를 안다면, 이럴 리가 없으니까.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거야. 알면서도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건 불가능하잖아.

그럼, ‘악마’가 아닌 나는, ‘에키네시아 로아즈’는, 당신에게 어떤 존재인가요? 그 표정은 누구를 향한 거죠? 당신이 지금 보이는 감정은…… 진짜인가요?

두서없이 생각이 떠돌았다. 착각해 버릴 것 같아서, 에키는 거칠게 그를 밀쳤다. 유리엔은 힘없이 그녀에게서 밀려났다. 완전히 무방비하게 그녀를 안고 있었던 듯했다. 반사적인 긴장이나 경계조차 전혀 하지 않고.

밀려난 그가 천국에서 쫓겨난 방랑자처럼 혼란한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그러다가 천천히 푸른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은빛 속눈썹이 몇 차례 깜박이고 나자 그 눈은 평정을 되찾았다. 눈가를 만지작거리는 손에 고였던 눈물이 흐르지 않고 닦여나갔다. 흐트러졌던 표정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침착해진 그가 가장 먼저 한 것은 사과였다. 아직 여운이 남아, 더듬거리는 목소리.

“그대에게 무례한 짓을 했군. 걱정을……. 안심이, 되어서. 갑자기 끌어안아서 미안하다.”

“……아뇨, 괜찮습니다. 조금 놀랐을 뿐이에요.”

“정말로 실수였다. 무례를 용서해 다오.”

“아닙니다, 단장님. 신경 쓰지 마세요.”

“그대는 괜찮은가? 다친 곳은?”

“아무 데도 다치지 않았어요. 시간이 얼마나 지났나요?”

“……이틀.”

서로 오가는 말이 사이에 벽을 치는 것처럼 조심스러웠다. 상대가 부서지거나 달아날까 봐, 스스로가 자제하지 못하고 선을 넘을까 봐, 두려워하는 것처럼.

갑작스러운 일에 당황해 지켜보고 있던 바라하만이 그것을 알아차렸다.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건 대체 뭐지. 문득 마구간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유리엔의 시선을 받는 순간 저도 모르게 에키로부터 물러났던 일.

바라하는 그들 사이에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단장님.”

“……바라하. 그대도 무사했군.”

“예. 결절 내부에 마물이 많았지만, 에키네시아 생도가 함께 있어준 덕에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제가 뭘 했다고요, 바라하 선배님께서 다 하셨죠. 전 선배님을 도운 것뿐인 걸요.”

바라하의 말에 에키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멍하던 머리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정신이 들었다. 들킬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모든 것을 점령했다.

그녀는 바라하에게 마구 눈짓을 했다. 숨겨준다고 했잖아요, 이 망할 선배님아!

바라하는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유리엔을 응시하며 말했다.

“에키네시아 생도가 없었다면 살아 돌아오지 못했을 겁니다. 그녀의 공이 큽니다. 그녀가 저를 지켜준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합니다.”

“바라하 선배님!”

에키가 참지 못하고 그에게 다가가 옆구리에 손을 대었다. 가볍게 손을 얹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매섭게 꼬집는 행위였다. 바라하는 쑤시는 옆구리를 무시했다. 에키는 난감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마물이 별거 아니었으니까요. 선배님이 너무 치켜세워 주시네요.”

유리엔의 표정은 담담했다. 그러나 아주 잠깐, 그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바라하는 놓치지 않았다. 바라하의 옆구리에 닿은 에키의 손에 그의 눈길이 잠시 머물렀다. 유리엔은 곧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둘 다, 결절에서 무사히 살아 돌아와 주어서 고맙군. 돌아가면 따로 포상이 나갈 것이다. 그동안 있었던 일과 복귀 일정 등은 부단장에게 듣도록. 다시 한 번, 귀환을 환영한다. 고생했다.”

사무적인 어조였다. 그는 곧 돌아서서 멀어졌다. 다른 사람들이 그들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에키는 그들 중에서 창백해진 얼굴에 간신히 안도를 띄우고 있는 앨리스를 발견했다. 가슴 한구석이 따뜻해졌다. 그녀는 앨리스에게 시선을 둔 채 퉁명스럽게 바라하를 불렀다.

“선배님.”

“왜.”

“숨겨 주신다면서요.”

“숨겨줬잖아?”

“제 덕이라고 하면 어떡해요?”

“사실인데 뭘. 그리고 너, 실력이 늘어나는 모습 보일 거라며. 이 기회에 죽음의 위기를 겪으며 검술 늘었다고 해.”

“……말은 잘하시네요.”

“칭찬 감사히 듣지.”

그사이 앨리스가 달려왔다. 그녀는 에키 앞에 서서 한참 호흡을 고르더니, 왈칵 화를 내며 말했다.

“걱정했잖습니까!”

“미안해요, 앨리스.”

“사과할 일은 아니고요!”

“아.”

바라하에게는 부단장 바론이 다가왔다. 그는 무거운 눈으로 바라하를 바라보더니 그의 어깨를 꾹 쥐었다. 바론의 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대신 어깨를 쥔 손이 많은 말을 하고 있었다. 바라하는 깊게 고개를 숙였다.

* * *

1629년 5월 15일, 창천기사단은 흰 까마귀 협곡 토벌을 종료했다.

돌발적으로 결절이 발생하여 생도 한 명이 사망했으나, 그 불운한 생도 외에는 부상자만 있었다. 결절이 발생한 것치고는 정말 적은 피해였다.

사망한 생도에 대한 의혹이 잠시 일었으나, 생존자들의 진술을 통해 파악한 결절 내부의 상황을 고려해 봤을 때 마물에 의한 사고일 확률이 높아 곧 잠잠해졌다.

사망자는 전사자로 예우하여 기사단장이 직접 생도의 가족에게 편지와 위로품을 보냈다.

토벌단이 아젠카로 귀환한 건 그로부터 이틀이 지난 5월 17일이었다.

오랜만에 기숙사에 도착한 에키네시아는 그녀가 떠나 있는 사이 도착한 한 통의 마나 전보를 보았다. 발신자는 니콜 시즈튼이었다.

-호위 임무로 귀빈과 함께 아젠카 방문 예정, 하얀 사자에 대한 이야기는 그때에.

5막. 드러나는 것과 통제할 수 없는 것

아젠카로 돌아온 에키네시아가 제일 먼저 한 건 병상에 드러눕는 일이었다.

전날 저녁에 기숙사 방에 도착해서 전보를 보고 잠들 때까지는 괜찮았는데, 다음날 아침에 쓰러지는 바람에 룸메이트인 앨리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사실 에키는 결절에서 나온 다음날부터 이미 앓고 있는 중이었다. 결절 내부에서 그렇게 날뛰었으니 예정된 몸살이었다. 토벌을 마무리하고 귀환해야 하는데 병상에 드러누울 순 없어서 티를 내지 않았을 뿐이다.

귀환하는 동안에는 기오사 오너 쪽이 아니라 사관생도들과 함께 움직여서 유리엔과 마주치지 않았다.

에키는 내심 그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왠지 그와 마주쳤다간 또 몸 상태를 들켜버릴 것 같아서.

그렇게 내내 몸살 난 채로 움직였으니 오늘도 괜찮을 줄만 알았다. 눈을 뜨자마자 몸 상태가 좋지 못한 걸 깨닫고도, 별거 아니겠지 했던 것이다.

그 무시의 결과는 욕실로 들어가다가 쓰러지는 것으로 돌아왔다.

솔직히 에키는 쓰러진 게 쪽팔렸다. 마스터도 아니고 마스터 위의 경지씩이나 되어서 몸살을 못 이겨 쓰러지다니.

‘그냥 마나로 지탱할 걸. 너무 얕봤어.’

“에키, 의사를 부르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앨리스가 안절부절못하며 대야에 물을 떠 왔다. 그대로 내버려두면 계속 옆에 붙어서 간호할 것 같은 기세라 에키는 그녀를 말렸다.

“뭘 의사를 불러요. 진짜 괜찮아요. 그러니까…….”

“괜찮긴 뭐가 괜찮습니까. 열이 이렇게 높은데!”

“그냥 좀 누워 있으면 낫는다니까요. 앨리스는 당장 가서 훈련해요, 훈련. 전체 순위전이 얼마 안 남았잖아요.”

“하지만…….”

“이건 그냥 사소한 몸살이에요. 누워서 자면 낫는 몸살. 그러니까 나가서 할 일 해요. 앨리스가 있으니까 신경 쓰여서 잠이 안 온단 말이에요.”

에키는 짜증까지 내어가며 겨우 앨리스를 내보냈다. 전체 순위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앨리스의 시간을 빼앗기는 싫었다. 정말로 그저 몸살일 뿐이기도 하고.

몸살 자체는 예상했던 일인데, 아무래도 귀환하는 와중에 드러누울 순 없어서 억지로 참던 게 더 안 좋은 영향을 끼친 것 같았다.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마나를 쓰면 평소처럼 움직일 수 있겠지만 급한 일도 없는데 그럴 이유는 없었다.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쉬어야지.’

에키는 침대에 푹 파묻혔다. 그 상태로 마나를 이용해 앨리스가 두고 간 대야의 물에 수건을 적셨다. 젖은 수건이 공중에 둥둥 떠서 그녀의 머리 위에 얌전히 놓였다. 차가워서 기분이 좋았다. 그녀는 수건에 손을 댄 채 중얼거렸다.

“내일이 정식 스콰이어 임명일인데. 유리엔은 왠지 눈치챌 것 같단 말이지……. 오늘 푹 쉬면 좀 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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