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꽃-39화 (39/211)

검을 든 꽃 39화

그녀가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보라색 눈동자와 노란 눈동자가 한동안 서로를 담고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검을 짓누르고 있던 에키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에키는 검에서 손을 떼고 물러나 앉았다. 바라하가 몸을 일으키며 목덜미를 문질렀다. 식은땀이 손에 흠뻑 묻어났다.

“믿을게요, 선배님.”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가느다란 목소리로 덧붙였다.

“목에 상처, 죄송해요.”

“뭘, 이건 모기가 문 수준이지. 등에 있는 상처보다도 작은 걸.”

“아……. 그러고 보니 그 상처는 괜찮으신 거예요?”

“응급처치 해놨어. 괜찮아.”

바라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일어났다. 그가 뒷목을 주무르며 말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누구에게도 네 비밀을 말하지 않을 테니 안심해도 돼. 로드께도 침묵할 거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주저앉아 있던 에키가 그를 따라 일어났다. 그녀가 바닥에 구른 바라하의 검과 검집을 주워 그에게 내밀었다. 바라하가 검을 받아 허리에 찼다.

“사실 듣고 싶은 얘기는 더 많은데, 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더 이상 마물이 없으니, 결절이 열릴 때까지 기다리면 되나?”

“시험해 보고 싶은 게 있어요.”

“응?”

“우선 시작점으로 돌아가죠.”

에키가 돌아서서 걸었다. 바라하가 그녀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는 저보다 한참 작은 그 뒷모습을 보며 쓴웃음을 띠었다. 지켜주려던 후배한테 지켜지게 되다니. 죽이겠다는 협박까지 듣고.

그런데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앞서 걷는 뒷모습을 보면서 가슴께가 떨렸다. 기분 좋은 떨림이었다.

평소처럼 완벽하게 꾸민 것도 아닌, 흐트러지고 엉망인 차림인데 그녀에게서 눈을 떼기가 어렵다. 동그란 뒤통수가 귀엽고, 가느다란 목은 홀릴 것 같고, 짤막해진 드레스 아래로 드러난 다리는…… 모르겠다, 구석구석 안 예쁜 곳이 없어 보였다.

솔직히 아까 그녀가 칼 들고 올라탔을 때 흉흉한 살기보다 다른 것 때문에 더 긴장했다. 바라하는 입가를 손으로 가리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단단히…… 반했구나.’

반한 순간이 언제인지는 명확했다. 심지어 그 순간은 한 번도 아니었다. 속이 간질간질해지면서 손아래에서 입꼬리가 올라갔다.

사막의 남자는 원하는 여자가 생기면 돌진한다. 게다가 돌진하기 전에 완벽하게 쟁취하기 위한 계획부터 세우므로 그들의 사랑은 성공률이 높았다.

바라하는 곧바로 어떻게 하면 그녀를 얻을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비밀을 공유한 사이가 되었으니, 앞으로 더 친밀해질 거고. 아무리 봐도 날 살리려고 결절에 들어온 것 같으니까 기본적으로 호감도 있는 거 같고. 여러모로 좋은 출발이군.’

등 뒤에서 바라하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른 채, 에키는 마검이 떠드는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결절이 왜 갑자기 생겼는지, 조금 알 것 같아. 사실 전 주인 때도 결절을 자주 봤거든. 그 사람도 너처럼 카이로스기오사로 시간을 되돌렸잖아? 관계가 있는 거 아닐까?]

“……카이로스기오사로 인해 생긴 왜곡을 라키아기오사가 따라온다던가?”

[그럴지도 몰라. 어쨌든 변화의 주축은 너잖아. 네가 시간을 되돌린 당사자니까. 바뀌는 게 많을수록 결절이 자주 생기는 거 아냐?]

“전 주인 때는 어땠는데?”

[걘 이것저것 미래를 바꾸려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정해진 걸 함부로 바꾸면 안 된다면서 얌전히 살더라고, 지금 생각해 보니까 결절 때문인 것 같아. 걔가 뭘 많이 바꿀수록 근처에 결절이 자주 생겼거든.]

“……망할.”

[야, 확실한 건 나도 몰라. 그냥 그렇다는 소리지.]

“충분히 알아들었어.”

그녀는 이를 갈며 대꾸했다.

그들은 서로 다른 생각에 빠진 채로 시작점에 도달했다. 마물도 그림자 병사도 하나도 남지 않아서 산책하듯 가벼운 길이었다.

“에키, 여기서 뭘 하려고?”

“시작점을 다시 찔러보려고요.”

“마물이야 네가 다 죽였으니 위험하진 않겠지만……. 그게 효과가 있을까?”

“결절 안의 마물이란 건 결국 결절 내부 공간이 만들어내는 이상 현상의 일종이거든요. 진짜 마물이 아니라. 시작점을 찔렀을 때 마물들이 모조리 집중한 걸 보면 저게 결절의 약점이 맞긴 맞는 것 같아서요. 게다가 이건 라키아기오사로 만들어진 공간이니, 바르데르기오사로 찔러보면 무언가……. 앗.”

설명을 늘어놓던 에키가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허둥지둥 제 얼굴과 옷자락 등을 만져보더니 급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바라하가 의아하게 물었다.

“왜 그래?”

“저, 저, 잠시만요.”

에키가 불타버린 자신의 막사를 확인하고는 세상이 무너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바라하를 보며 절박하게 외쳤다.

“선배님! 선배님 막사에 거울 있어요?”

“……뭐?”

“거울이요, 거울! 이 꼴로 나갈 순 없단 말이에요!”

밖에 유리엔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전투로 굴러 망가진 몰골로 나갈 수는 없었다. 이건 마검을 쓸 때와 너무 비슷한 느낌이지 않는가.

멍해졌던 바라하의 표정이 곧 웃음을 참는 것처럼 일그러졌다. 그는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제 막사 쪽을 가리켰다. 손가락 끝이 부들부들 떨렸다.

“거울, 응, 있을, 크흡, 있을 거야. 간이침대, 푸흡, 바로 옆에 있는, 상자를, 열어봐. 흠흠.”

미처 참지 못한 웃음이 말 사이사이로 새었다.

에키는 뾰족한 눈으로 그를 한 번 흘긴 다음 그의 막사 쪽으로 달렸다. 그가 말한 대로 간이침대 옆 상자를 열자 제일 위에 거울이 놓여 있었다. 그녀는 심호흡을 하고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야, 옛날 생각나는 꼴인데?]

튄 피와 액체, 얼룩. 지저분해진 머리. 엉망이 된 옷까지. 머리색과 눈동자 색이 다르다 해도 마검에 휘둘리던 시절을 연상시킬 만한 꼴이었다.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뒤따라온 바라하가 막사의 천을 젖히며 말했다.

“물 필요해? 씻고 싶은 거면, 수통이 보관되어 있는 막사를 아는데. 멀쩡할지는 모르겠지만.”

에키는 반색하며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네, 네! 무척 필요해요! 감사합니다! 저, 선배님, 옷도 좀……. 빌려주실 수 있을까요?”

“내 옷은 네게는 심하게 클 텐데.”

바라하가 난감한 듯 말하며 그녀를 아래위로 훑었다. 그러다 그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흘러내릴 정도로 큰 자신의 옷을 걸친 그녀의 모습을 상상한 탓이었다. 그는 벌겋게 달아 오른 낯을 가리기 위해 급히 고개를 돌렸다.

“선배님?”

“……테레사 경의 막사에서 옷을 빌리도록 해. 바로 근처거든. 상황이 상황이니 이해해 주시겠지.”

“아, 그러면 되겠네요. 감사합니다. 선배님.”

“나도 씻고 옷을 갈아입어야겠군.”

“네, 아참, 결절 안에서 있었던 일, 대강 말을 맞춰야 할 것 같아요.”

바라하가 붉은 액체로 엉망이 된 제 옷을 살피다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더니 말을 이었다.

“전부 숨기긴 어려우니……. 다른 건 다 사실대로 말하고, 나온 마물들만 구울 수준이었다는 걸로 바꾸죠.”

“구울 수준?”

바라하는 저도 모르게 산더미만 한 마물들의 시체가 널려 있을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에키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래야 말이 될 테니까요. 둘이서 마물을 처리하고 결절이 사라질 때까지 버틴 걸로 해요.”

“……그래, 네 말대로 하지. 네가 기오사 오너인 걸 숨기려면 그쪽이 나을 테니까. 참, 이안이 같이 들어왔다고 하지 않았어? 지금까지 조용한 걸 보니 마물한테 죽었나? 개자식, 기어 나왔으면 가만 안 뒀을 텐데.”

바라하가 짐승처럼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에키는 자연스럽게 시선을 피하며 대꾸했다.

“글쎄요, 워낙 정신이 없어서…….”

“뭐, 그건 결절을 벗어나면 알게 되겠지. 가자. 위치를 안내해 줄 테니.”

“네.”

바라하는 금세 관심을 끊고 앞서서 걸었다. 그들은 수통이 보관된 막사로 향했다. 다행히 수통들은 망가지지 않고 잘 남아 있었다. 각자 한 통씩을 챙겨서 다른 곳으로 향했다. 에키는 바라하에게 들은 테레사의 막사로 들어갔다.

“미안해요, 테레사 경. 좀 빌릴게요.”

그녀는 작게 중얼거리고 막사 안을 뒤졌다. 테레사는 앨리스처럼 수수하게 다니는 편인데다 에키보다 키가 컸지만, 그래도 여성인 터라 빌릴 만한 물건이 많았다.

가장 먼저 옷을 찾아냈다. 구석구석 뒤지기는 미안해서 제일 위에 있던 흰 블라우스와 가죽바지, 가죽자켓, 가죽장갑을 챙겼다. 가죽신발도 있었지만 너무 커서 맞지 않았다. 엉망이 된 앵클부츠를 대충 씻어서 신어야 할 듯했다.

바지는 허리와 길이가 남았지만, 대강 벨트로 졸라매고 아랫단은 접으면 될 것 같았다. 블라우스는 가슴 쪽이 약간 답답하긴 해도 입을 만했다. 속옷까지 빌릴 필요는 없어서 다행이었다.

무엇보다 화장품이 있다는 게 기뻤다. 립스틱과 화장용 숯연필, 피부 톤을 잡아주는 커버 크림 정도만 있었으나 이 정도로도 충분했다. 솔직히 말하면 기대하지 않았던 물건들이라 눈물 나게 반가웠다.

에키는 막사 뒤에서 수통의 물로 샤워를 한 다음,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빗었다. 화장까지 하고 나니 평소처럼 화려하진 않아도 깔끔하고 단정한 모습이 되었다.

그녀는 테레사의 막사에 있는 거울을 몇 번이나 확인했다. 마검의 악마를 연상할 만한 구석이 남았는지, 어딜 봐도 바지를 입었을 뿐인 백작 영애 ‘에키네시아 로아즈’로만 보이는지를 계속 살폈다. 불안감이 차올랐지만 이 이상 어떻게 할 방법은 없었다.

“에키, 다 되었나?”

“아, 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멀찍이서 바라하가 부르는 음성이 들렸다. 에키는 물기가 남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닦으며 막사를 나왔다. 젖은 머리카락이 깨끗해진 흰 피부 위에 달라붙어 있었다. 바라하가 움찔 놀라더니 슬쩍 시선을 돌렸다.

“머리카락이 덜 마른 것 같은데. 천천히 하지.”

“아뇨, 이 안에 오래 있는 건 별로잖아요. 시작점이 가설대로 될지도 모르겠고. 일단 가보죠.”

그들은 다시 시작점이 있는 공터로 향했다. 바라하가 저번처럼 깃대를 들려는 것을 에키가 막았다.

“들어주지 않으셔도 돼요.”

그녀는 오른손의 가죽장갑을 벗어서 주머니에 넣고, 바르데르기오사를 뽑아냈다. 마검을 본 바라하가 흠칫 놀라며 약간 물러섰다.

[쟤 표정 봐. 내가 무슨 전염병 덩어리야? 쳇, 쳇.]

‘저 정도면 굉장히 양호한 반응이지.’

에키는 마검을 쥐고 대지를 박찼다. 바닥에 고여 있는 붉은 액체가 그 서슬에 튀어 올랐지만, 그녀는 순식간에 튀어 오른 액체들보다 높은 곳에 도달했다.

허공에 그어진 흠이 높아진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는 공중에서 마검으로 그것을 길게 베었다. 베는 순간, 공간 전체가 경직되는 느낌이 들었다.

에키는 아래로 떨어져 내리며 일부러 막사 위에 착지했다. 테레사의 옷을 더럽히고 싶지 않아서였다.

마검을 회수하고 장갑을 다시 끼며 하늘을 보니 시작점을 중심으로 길게 그어진 금이 보였다. 그 금 주위로 자잘한 금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