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38화
바라하는 꼼짝도 하지 않고 앉은 그 상태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넋이 나가 있는 얼굴이었다.
에키가 그의 검으로 그의 목을 겨누었다. 칼끝으로 바라하의 턱을 들어 올린다. 그의 노란 눈에 그녀의 얼굴이 비쳤다. 그녀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보셨어요?”
“……본 게 너무 많아서, 뭘 봤냐고 묻는 건지 헷갈리는데.”
바라하가 천천히 답했다. 에키는 서늘한 눈으로 그런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숨을 한 번 고르더니 말을 이었다.
“마검, 바르데르기오……. 흡.”
말끝이 헛바람에 삼켜졌다. 에키가 그의 발치에 검을 꽉 소리 나게 꽂아 넣은 탓이었다.
그녀는 검을 꽂아놓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긴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녀가 무릎을 모으고 거기에 고개를 파묻은 다음 힘없이 중얼거렸다.
“아. 돌겠네.”
“……미안.”
“왜 사과를 하세요?”
“어……. 왠지 해야 할 것 같아서.”
에키는 황당해져서 고개를 들었다가, 푸슬 웃고 말았다. 그녀를 보고 있는 바라하의 얼굴이 백치처럼 멍해서.
그녀는 한 손으로 머리를 묶었던 천조각을 풀어낸 다음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마구잡이로 빗어 넘겼다. 지금 자신의 꼴이 평소와는 많이 다른 상태라는 걸 알지만 이미 다 들킨 마당에 그런 건 상관없었다.
바라하의 눈동자가 머리카락을 다듬는 에키의 손을 따라 이리저리 움직였다. 바보 내지는 동물처럼 보이는 행동이었다. 에키는 그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어 보았다.
“괜찮아요?”
“어, 음, 그러니까.”
바라하가 신음을 흘렸다. 정신을 차리려는지 고개를 내젓고, 미간을 손으로 꾹꾹 누르더니 힘겹게 입을 연다.
“기오사 오너?”
“네.”
“마검의?”
“……네.”
“마스터였어?”
“네.”
정확히 말하면 마스터보다 위 단계의 경지지만, 여전히 에키는 그 경지의 명칭조차 몰랐다. 그런 경지가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대다수였으니까. 그래서 그녀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내 뒷목 쳐서 기절시킨 거, 에키 너냐?”
“……네, 죄송해요.”
“들키기 싫어서?”
“잘 아시네요.”
에키가 쓴웃음을 지었다. 어떻게 할까. 바라하를 살리기 위해 결절까지 들어왔고, 그를 죽이려 든 이안을 죽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마검을 들켰다는 이유로 그를 처리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런 식으로 사람을 죽여댈 거면 실력을 감추고 사관생도가 되어 3년 후쯤 기사가 되는 계획을 세우지도 않았다. 밤에 기사단을 급습해서 지키는 자들을 모조리 죽이고 기오사를 털어 나왔겠지.
이안 같은 갱생 불가능 쓰레기라면 몰라도, 엄한 사람을 죽이고 싶진 않았다. 그녀 주위의 사람들을 위협하지 않는 한.
그러니 입을 막아야 한다. 마법사도 아닌 그녀에게 답은 처음부터 하나뿐이었다. 에키는 바라하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주저앉은 그와 그녀 사이에 그의 검이 박혀 있었다.
“선배님.”
“응.”
“저, 선배님 죽이기 싫어요.”
바라하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에키는 무릎에 턱을 괸 채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선배님이 제가 기오사 오너라는 걸 비밀로 해주시지 않으면, 전 선배님을 죽여야 해요.”
바라하가 온 사방에 소문을 내고 다닌다고 해도 그녀는 그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 죽이는 건 불가능했다.
그 끔찍한 기억들이 뇌리에 선명한데 어떻게 아끼는 사람을 제 손으로 죽일 수 있겠는가. 살리려고 몸부림 칠 수는 있어도, 그럴 수는 없었다.
그녀는 바라하가 기사가 되는 게 보고 싶었다. 그러니 이건 공갈협박에 불과했다. 그래도 빈말이라는 티를 내선 안 된다. 에키는 무표정하게 말을 이었다.
“비밀로 해주세요.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에요.”
“……음.”
바라하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는 제 앞에 오도카니 앉아 있는 그녀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입을 열었다.
“몇 가지 질문이 있는데.”
“말씀하세요. 하지만 전부 답해드릴 순 없어요.”
“우선, 마검을 가지고 있는데 왜 넌 멀쩡하지? 바르데르기오사는 주인을 조종하는 검이잖아.”
“답할 수 없어요.”
“……그럼, 앞으로도 쭉 자아를 유지할 수 있는지는, 답해 줄 수 있나?”
“네. 제가 완전히 미쳐버리지 않는 한은.”
“오너인 건 왜 숨겼어?”
“마검이니까요. 제가 안전하다는 걸 모두가 믿어줄 순 없겠죠.”
실제로도 완벽하게 안전하다고 하기엔 무리고. 에키는 누적되는 살의를 생각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오늘 약간 해소하긴 했지만 그 정도로는 역시 부족했다.
바라하는 에키의 말에 쉽게 납득했다. 마검의 악명이 워낙 드높은 덕분이었다.
“아, 그건 그렇군.”
“선배님은 용케 믿으시네요.”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잖아?”
바라하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의 시선이 에키의 등 뒤로 펼쳐져 있는 마물의 시체들에 가 닿았다. 그 다음, 그녀와 그 사이에 꽂혀 있는 그레이트소드에게로 시선이 이동했다. 그 시선을 알아차린 에키가 어깨를 으쓱였다. 하긴, 죽이겠다고 협박을 한 상황이니.
“그건 그렇죠.”
“창천기사단엔 왜 들어왔어?”
“마검을 버리려고요.”
“버려? 어떻게?”
“다른 기오사를 얻으면 되거든요. 그래서 기사가 될 생각으로 사관학교에 입학했죠.”
“다른 기오사를 얻으면 마검을 버릴 수 있는 건가?”
“네.”
거짓말이다. 마검은 지금이라도 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회귀 전의 기억을 모두 잃어 버리니까. 에키는 바라하에게 자신이 시간을 되돌렸다는 걸 알릴 생각은 없었다.
바라하가 생각을 정리하듯 이마를 짚었다.
“너 마스터잖아. 바로 기사가 되면 되는 거 아니야?”
“전 3년 정도의 시간을 두고 기사가 될 거예요. 스무 살짜리 마스터는 너무 수상하잖아요?”
“듣고 보니, 굉장히, 어, 심하게 비정상적이긴 한데……. 그게 사실이잖아. 단장님도 스물세 살에 마스터가 되었으니 네가 단장님보다 더 천재인 거지, 뭐. 천재면 그럴 수도 있지.”
바라하는 새삼스레 그녀의 나이를 자각한 듯 기괴한 표정으로 에키를 바라보았다. 에키가 고개를 기울였다.
“검술 교습을 받아본 적이 한 번도 없는 백작 영애 출신이라도요? 단장님은 어릴 때부터 검을 쥐셨죠.”
“……뭐?”
“바라하 선배님. 전 스무 살 이전에는 검을 쥐어본 적이 없어요.”
이건 사실이었다. 바라하의 얼굴에 경악이 퍼져나갔다. 에키는 입꼬리만 올려 웃었다.
“스무 살짜리 마스터가 등장하면 온 대륙에서 관심을 쏟겠죠. 제 출생부터 성장까지 모든 게 가십거리가 되고, 모두가 제 성장 과정을 파헤칠 거예요. 유리엔 단장님 때도 그랬잖아요.”
“……확실히 그랬지.”
“그럼 그들은 알게 되겠죠. 에키네시아 로아즈가 마스터가 되기 전까지는 검을 배운 적도 없다는 사실을 몰래 독학했다고 우기는 데도 한계가 있는 법이에요. 제 손엔 굳은살조차 없는 걸요. 사관생도로 3년을 지내다 마스터가 되는 거랑은 너무 다른 얘기잖아요.”
바라하가 에키에게 다가왔다. 에키는 그가 뭘 원하는지 알아차리고 손을 내밀었다. 장갑을 끼고 있지 않은 오른손이었다.
그는 그녀의 손바닥에 있는 검은 문양에 흠칫 놀랐다가, 조심스럽게 그 손을 더듬어 보았다. 보드랍고, 말랑말랑했다. 1년 이상 검을 휘둘렀다면 절대 가질 수 없는 손이었다. 그는 얼이 빠진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대체…… 넌 어떻게 마스터가 된 건데?”
“제가 마스터가 된 건 마검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그 점도 밝힐 수 없어요. 바로 마스터라고 하면 너무 말이 안 되니까, 단계적으로 실력이 느는 모습을 보여서 스물세 살쯤 마스터가 된 걸로 할 생각이었어요.”
“마검에 그런 힘도 있었어?”
“네, 그래요.”
이건 거짓말. 마검에게 주인을 마스터로 만드는 능력 따위는 없다. 주인을 조종해서 마스터와도 싸울 수 있게 만들 수는 있어도.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하네. 내가 그런 게 가능했으면 신검이다, 신검.]
마검이 툴툴거렸다. 에키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바라하가 한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그는 눈 위를 손으로 덮은 채 그녀를 불렀다.
“에키.”
“네.”
“마지막 질문인데, 너, 결절엔 왜 들어왔지?”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말이 되는 소릴. 내가 방금 네가 날뛰는 걸 다 봤는데. 넌, 일부러 들어온 거지. 실수로 삼켜졌을 리가 없어.”
바라하가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떼었다. 사막민족 특유의 짙은 피부, 검은 머리카락, 근육으로 꽉 찬 몸, 선명한 노란색 눈동자. 웅크린 맹수 같은 모습으로 그가 말했다.
“너, 나 때문에 들어온 거로군.”
“…….”
“내가 결절에 빨려 들어와서. 그렇지? 넌 결절 안에서도 살아나갈 자신이 있었으니까. 그래서 날 구하려고 들어온 거였어.”
전에도 생각했지만 바라하는 이상한 데서 눈치가 빨랐다. 에키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선배님을 살리려고 들어왔다고는, 민망해서 답할 수가 없었다. 얼굴이 홧홧해지는 느낌이었다.
“아뇨, 그냥 실수였다니까요. 넘어졌어요. 마스터라고 실수를 안 하는 줄 아세요?”
“실수라. 그러니까 실수로 넘어져서, 결절에 들어왔단 거라고? 나랑 관계없이? 그저 실수로?”
“제가 미쳤다고 결절에 제 발로 들어오겠어요? 넘어진 것도 창피하니까 자꾸 강조하지 마세요.”
에키가 울컥한 어조로 말했다. 바라하는 묘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더니 빙긋 웃었다.
“에키.”
“왜, 왜 그런 눈으로 보세요?”
“비밀 안 지키면 날 죽이겠다는 거, 거짓말이지?”
에키의 어깨가 짧은 순간 움찔거리는 걸, 바라하는 놓치지 않았다. 잠깐 침묵하던 그녀가 엄청난 속도로 움직였다. 그녀는 그들 사이에 꽂혀 있던 검을 뽑아서 바라하에게 덤벼들었다.
그 서슬에 그가 뒤로 넘어졌다. 바라하의 위에 올라탄 그녀가 그의 목에 검을 밀어붙였다. 칼날에 살갗이 조금 베여 피가 흘렀다.
“거짓말 같아요? 하나뿐인 목숨을 시험해 보시려고요? 여긴 결절이에요, 아무도 없는.”
건조하고 서늘한 목소리. 와 닿는 살기가 흉흉해서, 바라하는 반사적으로 몸을 굳혔다. 식인 마물에 짓눌린 기분이었다. 가볍고 보드라운 몸인데도.
그러나 몸이 긴장하는 것과 다르게, 그는 겁이 나지 않았다.
“에키.”
“…….”
“걱정하지 마.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아.”
바라하가 누운 채로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토닥였다. 그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넌 아니라고 하지만, 어쨌든 난 네 덕에 목숨을 구원받았다. 방금 저 마물들을 네가 쓰러뜨리지 않았으면 난 여기서 죽었을 테니까. 너는 내가, 생명의 은인이 지켜달라는 비밀조차 안 지킬 사람으로 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