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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든 꽃-37화 (37/211)

검을 든 꽃 37화

[뭐 해?]

“본격적으로 움직이려면 거추장스럽거든.”

검이 움직이는 대로 패티코트와 드레스가 잘려나갔다. 무릎 아래가 시원해졌다.

내친 김에 치렁거리는 소매도 되는 대로 잘랐다. 천조각들이 하늘하늘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녀는 그중에 하나를 잡아채어 그것을 리본삼아 긴 머리카락을 높게 묶어 올렸다.

롱소드를 챙겨 들던 그녀는 칼날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손질 한 번 안 해주고 마구 굴린 싸구려 검은엉망이었다. 에키는 그것을 내던지고 바라하의 허리춤에서 그의 검을 풀어냈다.

“좀 빌릴게요, 선배님.”

바라하의 검은 일반 롱소드보다 큰 그레이트소드였다. 그녀가 쓰기엔 지나치게 커 보였다. 물론 그녀는 그런 것에 구애받지 않았다.

에키는 습관대로 검집을 내팽개치려다 그게 바라하의 것임을 상기하고는 얌전히 한쪽에 내려놓았다.

바라하의 검은 잘 길들인 명검이었다. 튼튼해 보인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왼손에 그것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오른손을 늘어뜨렸다.

[어? 어? 나? 나 써주는 거야? 우와, 우와! 이게 얼마만이야!]

“수가 많잖아. 게다가 대부분 처음 보는 것들이고.”

손바닥에서 흘러내리듯 검이 생겨났다. 에키는 뽑아낸 바르데르기오사를 왼손으로 쥐고, 왼손에 있던 바라하의 검을 오른손으로 바꿔 쥐었다. 마검의 유리처럼 투명한 칼날 위에서 문양이 빛을 뿜었다.

[나, 능력 써도 돼? 응? 써도 돼?]

“그래. 그러려고 널 꺼낸 거니까.”

가까워진 마물들이 내지르는 괴성이 귀를 찔러왔다. 그녀는 몰려드는 것들을 향해 마검을 겨누며 속삭이듯 말했다.

“그러니 마음껏 날뛰어봐, 바르데르기오사.”

바르데르기오사의 능력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살육 특화. 마검은 기오사 시리즈 중에서도 살육에 특화된 검이므로, 오너는 직감적으로 눈앞의 대상을 죽일 때 어떤 방법이 가장 효율적일지를 깨닫게 된다. 그것은 지금처럼 난생 처음 보는 마물들을 상대할 때 몹시 유용한 능력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마음껏이면, 네 몸 다 써도 돼?]

“그건 아니지, 망할 마검아. 늘 그렇듯이 왼팔만.”

[좋아, 그게 어디야! 신난다!]

주인의 허락이 떨어지자 마검의 손잡이에서부터 검은 기운이 뭉클거리며 올라왔다. 그것은 왼팔을 잠식하며 기어올라 에키네시아의 머리카락 일부와 왼쪽 눈동자를 검게 물들였다.

마검에 쌓이는 살의는 마나로 변환된다. 그 마나를 이용하면, 마검이 오너의 육신을 조종하는 게 가능했다.

각성 전의 마검이 숙주를 조종하는 것도 이 능력 덕분이었고, 쌓이는 살의를 해소하지 않으면 오너가 의도치 않은 살인을 벌이게 되는 이유도 이 능력 탓이었다.

에키는 오른손잡이였지만 왼손으로도 검을 꽤 잘 다뤘다. 거기에 마검까지 사용하면 양손잡이나 다름없었다.

다수를 상대할 때면 오른손엔 그녀가 원래 쓰는 검을, 왼손에는 바르데르기오사를 쥐고 왼팔 자체를 마검에게 넘겨주는 방식을 썼기 때문이다.

왼손의 마검은 그녀가 통제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 싸웠다. 지워버린 과거에 이런 방식을 자주 사용한 탓에, 그녀는 마검이 없는 상태에서도 왼손으로 검을 쓰는 것에 제법 익숙해졌다.

몰려오는 것들 중 선두에 있던 마물이 그녀에게 도달하여 코앞으로 짓쳐들었다. 형상은 표범 같았지만 다리가 여섯 개, 눈은 열 개도 넘는 데다 진흙처럼 피부가 흘러내리고 있는 기괴한 놈이었다. 그놈의 바로 뒤로는 온몸이 비늘로 둘러싸인 외눈박이 거인 같은 것이 쿵쿵거리며 따라붙었다.

짓쳐든 표범이 그녀를 향해 앞발을 휘둘렀다. 에키는 대지를 박차고 뛰어오르는 것으로 그 공격을 피했다. 엉망으로 잘라져 미니스커트가 되어 버린 드레스 자락이 그 도약 탓에 바람을 받으며 부풀었다.

마나를 사용하는 그녀의 도약력은 굉장했다. 걸어 다니는 2층 건물 수준인 마물의 정수리가 내려다보일 정도의 높이까지 단숨에 도달했다. 그 높이에서 솟구쳐 오른 힘과 중력이 잠시 균형을 이루었다.

극히 짧은 무중력의 순간. 검은색과 보라색의 두 눈동자가 목표를 눈에 담았다.

[인간 비슷하게 생긴 거! 저건 내 거야!]

“알아서 해.”

보랏빛 마나가 그녀의 팔을 타고 흘러 오른손의 그레이트소드에 감돌았다. 그녀는 그 검을 휘둘렀다. 보라색 검기가 검에서 분리되어 허공을 가르며 쏘아졌다. 검기는 앞발을 땅에 짚은 채 사라진 인간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표범의 몸뚱이를 반으로 갈라버렸다.

바르데르기오사는 에키네시아의 왼팔을 움직였다. 검은 마나는 여러 가닥으로 나뉘어서 먹이를 노리는 뱀처럼 외눈박이 거인의 정수리를 파고들었다. 거인의 머리가 박살이 났다.

왼팔과 오른팔이 따로 놀면 균형을 잡는 것조차 힘든 게 보통이었다. 그러나 에키는 능숙하게 제 몸을 다루었다.

공중에서 마물 두 마리를 처리한 그녀가 고양이처럼 부드럽게 착지했다. 검은색이 섞인 분홍색 머리카락이 길게 흩날렸다.

쓰러진 놈들을 짓밟으며 다른 마물들이 차례로 몰려들었다. 동료의 죽음 따위는 마물들에게 아무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에키는 착지와 동시에 땅을 박차고 앞으로 뛰었다. 수면 위를 나는 제비처럼 빠른 움직임. 곰과 늑대를 섞어놓은 것 같은 놈의 다리 사이에 도달하자마자 그레이트소드를 아래에서 위로 올려 베었다.

길게 남는 보라색 궤적. 검 위에 덧씌워진 마나가 한순간 폭발적으로 늘어나 거인의 검처럼 커졌다.

반토막이 난 마물이 쓰러졌다. 그 사이 왼손은 검은 마나를 휘감고 옆으로 접근하던 다른 마물을 꿰뚫었다.

벤 마물은 돌아보지 않았다. 살육에 특화된 마검의 주인은 본능적으로 급소를 알아보며, 그녀에겐 그 급소를 노릴 실력이 넘치도록 있었으므로.

곧바로 다음 마물로 이동했다. 발톱 하나가 그녀의 몸뚱이만 한 마물이 그녀를 으깰 듯이 앞발을 내리친다. 그녀는 그 앞발 위로 쉽사리 올라탔다. 다른 마물이 그런 그녀를 노리고 짓밟는다. 이미 그 자리에 그녀는 없다. 앞발을 짓밟힌 마물만 이 괴성을 질러댔다.

왼손의 바르데르기오사가 괴성을 지르는 마물의 머리를 토막 내는 사이 채찍처럼 내리쳐지는 다른 마물의 꼬리를 오른손의 검으로 막는다. 스치기만 해도 부러질 것처럼 보이는 팔이, 태연히 육중한 공격을 버텨낸다. 뒤로 약간 밀려나긴 했지만 흔들림은 없다.

다시 뛰어오르고, 베어내고, 착지하고, 달려들고, 몸을 낮추었다가, 찌르고, 올라타고, 막고, 쳐낸다. 가느다란 몸이 중력의 지배를 받지 않는 것처럼 공중을 누볐다.

움직이는 궤적을 따라 보라색 마나가 남았다가 흩어져 사라진다. 마검의 새카만 마나가 불꽃처럼 휘감겼다가 뱀처럼 사방을 헤집는다.

악기의 현을 어루만지듯 부드럽게 검이 스쳐간 자리가 폭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터져나간다. 사뿐히 디딘 곳은 구두 끝이 닿는 순간 쇠망치에 짓눌린 것처럼 으스러졌다.

이것이 에키네시아 로아즈의 검 스타일이었다. 가벼운 신체를 이용해 날아다니다시피 움직이며, 지나간 후에야 베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나비처럼 다가와 닿는 순간에 이빨이 드러나는 검.

움직이는 범위는 무서울 정도로 넓어서 공중까지 활용하는 반면 검이 그리는 궤적 자체는 지극히 단순했다.

하지만 단순하다고 해서 허투루 검을 놀리는 건 아니었다. 검이 움직이기 전에 이미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끝나서, 막상 검이 움직일 때는 풀이 과정 없이 직선으로 해답을 꿰뚫는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아낌없이 퍼붓는 마나와 정교한 마나 통제 능력이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타고난 마나 친화력이 이 정도가 아니었다면 단련이 덜된 몸으로 이런 힘을 발휘하진 못했을 것이다.

물론 아무렇지도 않을 수는 없어서, 다음날엔 무리한 몸이 근육통을 호소하게 될 예정이었다.

‘끝나고 나면 몸살 나겠네. 그래도 예전에 결절에 들어갔을 때보단 쉬워. 그 결절에 비해 여기가 만만한 곳도 아닌데. 하긴, 그것도 몇 년 전 일이니까……. 그사이 실력이 늘긴 늘었구나.’

[49마리째! 아으, 인간 상대면 더 재밌었을 텐데!]

“좀 닥치고 싸워, 발.”

[싫어! 으차, 50마리! 마음껏 날뛰라며!]

“입까지 날뛰란 소린 아니었는데.”

[몰라, 안 들려! 안 들린다아아! 51마리!]

마검이 흥분한 어조로 떠들어댔다. 에키는 포기하고 검을 움직였다.

오랜만에 남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고 마나를 펑펑 써가며 몸을 움직이니 사실 그녀도 좀 후련했다. 웅크리고 앉아 있다가 기지개를 펴는 기분. 싸워야 할 상대도 거리낄 것 없는 마물이었다.

그녀의 입가에 설핏 미소가 떠올랐다.

눈을 뜬 바라하가 본 건 바로 그 광경이었다.

“아야야…….”

그는 일어나자마자 뒷목을 잡고 신음했다. 그러느라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 고개를 드는 순간 굳어버렸다.

한 손에는 검은 마나에 휘감긴 투명한 검, 다른 한 손에는 보라색 마나에 휘감긴 바라하의 검을 쥐고, 힘들지도 않은지 약간 미소마저 띤 채로 에키네시아가 허공을 날고 있었다. 천조각으로 묶어 올린 긴 머리카락이 꼬리처럼 흩날렸다.

실제로는 나는 것이 아니라 높이 뛰어오른 것뿐이지만 바라하의 눈에는 비행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무슨……. 말도 안 되는…….”

꿈인가? 가장 먼저 그 생각이 들었다. 바라하는 마른세수를 하고, 제 옆에 얌전히 놓여 있는 빈 검집을 확인한 다음, 다시 앞을 보았다.

에키네시아가 양손에 검을 들고 마물을 쓸어버리고 있었다. 그 공포스럽던 마물들은 일방적으로 학살당해 이제 몇 마리 남지도 않았다.

팔뚝을 꼬집어 보았다. 멍이 들 정도로 꼬집어도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고개를 흔들고 눈을 비빈 후에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에키네시아 로아즈가 마물의 무릎을 밟고 뛰어오른다. 그녀에게 밟힌 곳이 산산이 부서졌다. 순식간에 까마득한 높이에 있던 마물의 눈앞에 도달한 그녀가, 그 눈알들을 검으로 베어내고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깔끔한 동작. 푸른 피가 비처럼 흩뿌려졌다. 제멋대로 잘라낸 소매 때문에 희고 가는 팔뚝이 고스란히 보였다.

붉은 액체와 마물의 피가 여기저기 튄 데다 잘라져 끝단이 엉망인 치마 아래로 날씬한 다리가 뻗어 있었다.

굽 높은 구두를 신은 발이 바닥을 디딘다. 그리고 다시 하늘로 뛰어오른다.

압도적이고, 아름답다. 바라하는 생각을 잊었다. 의문과 경악보다 감탄이 먼저 뇌리를 점령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는 홀린 듯이 그녀를 지켜보았다.

마지막 마물이 쓰러졌다.

사방에 널브러진 마물의 시체가 가득했다. 에키는 그 사이에 서서 그레이트소드를 한 차례 크게 휘둘렀다. 검에 묻어 있던 피가 떨어져나갔다.

마검은 알아서 제 몸에 묻은 피를 흡수하고는 얌전히 그녀의 손 안으로 사라졌다. 검게 물들었던 왼쪽 눈동자와 머리카락은 마검의 마나가 거두어지며 원래의 색을 되찾았다.

바라하는 그녀가 검을 집어넣고 나서야 그 투명한 검의 정체를 깨달았다. 창천의 스콰이어가 바르데르기오사의 생김새를 모를 리가 없다.

‘마검 바르데르기오사……?’

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리고 바라하 쪽을 돌아본 에키의 안색도 희게 질렸다.

에키는 그에게 보통 사람이라면 적어도 반나절 이상 기절해 있을 만한 충격을 주었다. 바라하가 워낙 크고 튼튼하니까 조금 더 빠르게 정신을 차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긴 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기절시킨 지 두 시간 만에 깨어날 줄은 몰랐다.

머리가 아득해졌다. 어디부터 어디까지 본 걸까. 그가 마검을 알아봤을까. 그의 입을 다물게 하는 게 가능할까. 들키면 어떻게 되는 걸까.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유리엔이었다. 절대로,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만은 절대로.

[어? 쟤가 왜 일어나 있어? 언제부터 일어난 거야? 다 봤겠네! 봤으면 죽여야지! 알려지면 안 되잖아, 그치? 죽이자!]

전투의 흥분이 가시지 않은 어조로 마검이 떠들어댔다. 에키는 지친 손으로 눈가를 문지르고, 신음에 가까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느릿하게 마물의 시체들 사이를 가로질러 바라하에게로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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