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36화
둘이 함께 만들자 금세 자루 안이 기름투성이 천뭉치로 가득 찼다.
에키가 등불 안의 초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풍성한 소맷자락과 치맛자락으로 빛이 새어 나가지 않게 등불을 감싸 들었다. 그와 그녀가 눈을 마주쳤다.
“갈까.”
“가죠.”
바라하가 자루에서 천뭉치를 하나 꺼냈다. 그는 그녀가 들고 있는 등불 속 초에 천뭉치를 가져다 댔다. 기름에 흠뻑 젖은 천은 금방 타올랐다.
바라하는 막사 밖으로 그것을 힘껏 집어 던졌다. 그르릉, 하는 울음소리가 들리더니 막사 앞에 있던 마물 두엇이 불덩어리가 되어 날아가는 천뭉치를 따라 움직였다. 그들은 그 틈에 잽싸게 막사를 빠져나왔다.
막사와 막사의 사이를 이동하고, 마물이 어슬렁거리면 천뭉치에 불을 붙여 던지는 것을 반복했다. 서로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눈짓만으로도 손발이 맞았다.
캠프의 중앙은 빈 공터였다. 붉은 액체가 그 안에 그득 고여 있었다. 열 마리가 넘는 마물이 그 안에서 배회했다. 그 주위로는 단장, 부단장과 그들의 스콰이어용 막사가 보였다.
에키의 막사는 불타 무너져 있었다. 이안의 시체는 그 안에서 재가 되었거나, 아니면 그녀가 불을 붙이며 몰려든 마물의 식사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그녀는 잠시 그곳에 시선을 두었다가 금세 고개를 돌렸다. 바라하는 그들이 서 있는 곳에서 가장 가까운 부단장의 막사 안으로 빠르게 숨어들었다. 에키가 뒤따랐다. 그들은 들고 있던 등불과 자루를 내려놓고 숨을 골랐다.
“공터 안에 마물이 너무 많은데.”
바라하가 골치 아프다는 듯 중얼거렸다. 에키는 천 사이로 밖을 내다보았다. 그녀가 유심히 살피기만 하자 바라하가 그녀의 뒤로 다가오더니 그녀의 위쪽에 머리를 대고 밖을 살폈다. 에키가 작게 말했다.
“선배님, 저기.”
“응?”
“저 위쪽에, 뿔이 세 개인 마물의 머리 위 허공……. 보이세요?”
“……저건가. 그 시작점이라는 것.”
허공에 기묘한 자국이 있었다. 종이를 접었다가 편 것 같은 길쭉한 흠. 그 흠은 공터 위에서 시작해서 시뻘건 노을이 드리운 하늘로 길게 뻗어 있었다. 흠의 끄트머리가 아지랑이처럼 일렁거렸다. 기이한 광경이었다.
“저기까지 가는 건 둘째치고, 저거, 닿아도 되는 걸까요? 그 책 내용은 그냥 추측일 뿐이라서…….”
에키가 혼잣말처럼 물었다. 머리 위에서 바라하가 신음 비슷한 한숨을 흘렸다. 그러더니 큼직한 손이 턱 하고 그녀의 머리 위에 올려졌다.
“가만 있는다고 해서 빠져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뭐든 해봐야지.”
“그건…… 그렇죠.”
“어디 보자.”
바라하가 막사 내부를 둘러보더니 검을 뽑아들었다. 그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로드. 좀 부수겠습니다.”
“선배님?”
그가 검으로 간이침대를 부쉈다. 그러곤 조각난 나무를 침대보 위에 주섬주섬 쌓아올렸다. 에키는 그가 뭘 하려는지 이해했다. 저 많은 마물들을 한동안 떼어 놓으려면 천뭉치 정도의 불로는 무리일 테니 나무를 이용해 더 큰 불을 놓으려는 것이다.
그녀는 그를 도와 침대보 위에 불에 탈 만한 물건들을 찾아 쌓아올렸다. 부단장의 막사는 순식간에 강도가 든 것 같은 몰골이 되었다.
바라하가 장작거리로 가득 찬 침대보를 뭉쳐 걸머졌다. 에키는 그가 말하기도 전에 기름병을 챙겼다. 그것을 본 그가 눈웃음을 지었다.
“네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네가 여기에 나와 같이 있다는 걸 신께 감사하고 싶어지는군.”
“제가 믿을 만한가요?”
에키가 웃으며 말을 받았다. 바라하가 낮게 웃음을 흘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지.”
“뭔데요?”
“네가 아니었으면 미쳤을지도 모르니까.”
“……네?”
무슨 뜻인지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바라하는 그녀를 지나치며 아무렇지도 않게 덧붙였다.
“여기에 혼자 남았다면 말이야. 가자, 근처에서 이걸로 불을 질러야지. 공터에서 좀 떨어진, 그래, 디트리히 경의 막사 정도면 딱 좋겠군. 안 그래도 그 인간 막사에는 한 번쯤 불을 질러보고 싶었거든.”
에키는 잠시 침묵하다가 그의 뒤를 따랐다. 공터 쪽을 향한 입구가 아니라 뒤쪽의 천을 들어 올리고 빠져나와, 마물에게 들키지 않도록 목표한 막사로 이동하는 내내 그녀는 그의 말을 곱씹었다.
‘나야 대항할 무력도 있고, 결절 내부의 기괴한 꼴을 경험한 적이라도 있지만…… 바라하 선배는 싸워서 살아남을 방법도 없고, 난데없이 결절에 끌려 들어온 거니까.’
발아래를 흘끗 보았다. 진득하게 고여 있는 붉은 액체는 아무리 봐도 피처럼 느껴졌다.
멀쩡하던 캠프가 핏물에 잠겨 있고, 난생 처음 보는 거대한 마물들이 돌아다닌다. 하늘은 시뻘겋고 서로를 찌르다 잡아먹히는 병사의 그림자들은 광기 그 자체처럼 보인다.
이런 곳에 혼자 남았는데, 빠져나갈 방법도, 싸울 힘도 없어서 막막히 죽음을 기다려야 한다면, 정말로 정신이 나갈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바라하에게 에키의 존재 자체와 그녀가 제시한 약간의 희망은 굉장한 위안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불안을 최대한 감추며 그녀에게 자신을 믿으라고, 지켜 주겠다고 한 그가 얼마나 강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도 알겠다.
‘지킬 것이 있으면 혼자일 때보다 강해지는 사람.’
앨리스와는 다른 의미로, 기사에 어울리는 사람이다. 그녀는 앞서가는 그의 커다란 뒷모습을 보았다. 지워진 과거에는 기사가 되지 못하고 죽었었지. 이번에는, 그가 살아서 기사가 되는 걸 보고 싶어졌다. 앨리스처럼.
‘살리려 하길 잘했어.’
에키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띠었다.
디트리히의 막사는 공터에서 잘 보이는 위치에 있었다. 그 자리까지 가는 동안 두어 번 마물을 발견했지만, 그들은 남은 천뭉치를 이용해서 요령껏 피해갔다.
바라하가 디트리히의 막사 안에 짊어지고 온 장작감을 던져 넣었다. 에키가 그 위에 기름을 부었다. 디트리히의 막사에 있던 기름병도 찾아내어 죄다 뿌렸다. 그 후 막사에서 빠져나와 다른 곳에 숨은 다음, 등불을 막사를 향해 던졌다.
펑, 소리를 내며 불길이 확 타올랐다. 근처에 있던 마물들이 움찔거리는 게 눈에 보였다. 마물들이 슬금슬금 거대한 모닥불처럼 타오르는 막사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에키와 바라하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들은 말없이 달렸다. 거친 걸음에 발아래 붉은 액체가 튀어 올라 전신을 적셨지만 그런 것을 꺼릴 틈은 없었다.
공터에 도달했다. 공터는 비어 있었다. 성공적으로 마물을 유인한 듯했다. 그러나 시간이 많지는 않을 터였다. 마물이 불에 이끌리는 건 그 근처에 인간이 있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고, 인간이 없는 걸 확인하면 금방 관심을 잃을 테니까.
시작점은 높은 허공에 있었다. 바라하가 재빨리 공터 한쪽에 있던 깃대를 잡았다. 네 장의 날개를 편 매가 수놓인 깃발이 깃대 끝에 달려 있었다. 그가 깃발이 달린 쪽을 에키를 향해 내밀었다.
“올라타, 들어 올릴 테니까!”
마나를 쓰는 것도 아닌데 사람 하나가 매달린 깃대를 들어 올리겠다고? 에키는 당황해서 그를 돌아보았다가 그의 팔뚝을 보는 순간 납득했다.
그녀는 대답대신 곧바로 깃대 위에 올라탔다. 바라하가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깃대를 똑바로 세워 들어올렸다. 깃발이 늘어지며 창천의 문장이 펄럭거렸다. 그의 근육이 터질 듯 부풀었다.
한껏 높아진 에키의 시야에 캠프의 풍경이 훤히 들어왔다. 아직 마물들은 불타는 막사를 뒤적이고 있다.
“조심해! 손 말고, 검으로 먼저 건드려봐!”
아래에서 바라하가 소리치며 깃대를 조정했다. 결절의 시작점이 가까워졌다. 에키는 한 손으로 깃대를 쥐고, 상체를 뻗으며 검을 뽑았다. 검집이 아래로 떨어져 첨벙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칼끝으로 접힌 자국 같은 허공을 찔렀다.
찌르는 순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직감이 들었다.
“캬아아아아!”
“그르륵, 그르륵!”
사방 모든 곳에서 일제히, 마물이 울부짖었다. 모든 마물이 눈을 돌려 시작점을 바라보았다. 충혈되었거나, 뻥 뚫렸거나, 일그러졌거나, 툭 튀어나와 있는 수백 개의 눈알들이 동시에 그녀를 바라본다. 어지간한 에키로서도 오싹 소름이 끼치는 모습이었다.
아래에 있던 바라하도 일이 틀어진 것을 알아차렸다. 그가 바로 깃대를 내렸다. 어느 정도 내리다가 팽개치며 에키를 향해 팔을 벌렸다.
“에키!”
그 신호를 알아들은 그녀는 그를 향해 뛰어내렸다. 바라하가 그녀를 받아 안았다. 드레스 자락이 그 서슬에 확 부풀어 올랐다가 가라앉았다. 에키는 그의 어깨를 짚은 채 초조하게 입을 열었다.
“선배님, 이건 아무래도.”
“우선 도망가자.”
바라하가 말을 끊더니 그녀를 안은 채로 달리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쿵, 쿵, 쿵, 하는 육중한 걸음소리가 다가왔다. 바닥의 액체가 그 진동에 자잘한 파문을 그려냈다. 땅이 흔들린다.
에키는 그의 어깨 너머로 몰려드는 거대한 마물들을 보았다. 적어도 수백. 마물들의 눈동자는 모조리 그와 그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내려주세요!”
“너보단, 내가, 빠를 거야. 괜찮아, 어떻게든, 숨으면 일단…….”
바라하가 숨을 몰아쉬며 답했다. 에키는 자신을 단단히 받쳐 안은 그의 팔과, 대지를 울리고 막사를 짓밟으며 달려오는 마물들을 번갈아 보았다. 마물들의 서슬에 붉은 액체가 파도처럼 밀려나고 있었다.
바라하의 속도는 마스터가 아닌 인간치고는 굉장히 빨랐지만, 그의 다섯 걸음보다 마물의 한 걸음이 더 길었다. 짓밟히는 건 시간문제다.
에키네시아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보라색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죄송해요, 바라하 선배님.’
속으로 사과를 한 다음 그녀는 손날로 바라하의 뒷목을 내리쳤다. 단번에 기절할 만큼의 힘을 담았다.
“윽…….”
짧은 신음과 함께 바라하의 몸의 덜컥 무너졌다. 에키는 그의 팔에 힘이 풀리자마자 아래로 뛰어내려서 쓰러지는 그의 몸을 받았다. 대비를 했음에도 팔이 덜컥 꺾일 뻔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푸념했다.
“윽, 더럽게 무거워…….”
[덩치가 크잖아. 근육덩어리라 더 무거울 걸. 근데 주인아, 어쩌려고?]
“어쩌긴.”
에키는 기절한 바라하를 업었다. 키 차이가 심하다 보니 그의 발이 바닥에 질질 끌렸다. 그건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그녀는 달리기 시작했다. 마나가 폭발적으로 휘돌았다. 자신보다 훨씬 크고 무거운 남자를 짊어졌는데도 월등히 빠른 속도가 나왔다. 마물들과의 거리가 점점 벌어졌다.
이대로 달아날 수 있으면 편하겠지만,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캠프를 벗어난 에키가 어느 순간 멈췄다.
[이 앞이 결절의 가장자리야?]
“그래, 벽이야.”
결절은 분리된 공간이다. 당연히 끝이 있었다. 에키는 구두 끝으로 허공을 밀어보았다. 공중에서 막혀서 움직이지 않았다.
“충분해, 여기라면 뒤쪽을 경계할 필요가 없으니까.”
그녀는 바라하를 그 보이지 않는 벽에 기대 앉혔다. 그리고 그로부터 돌아서서 마물들이 몰려오는 쪽을 보았다. 눈으로 거리를 가늠하며 들고 있던 싸구려 롱소드를 드레스 자락에 밀어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