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35화
그녀 자신을 노린다면 봐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 주위에 해를 끼칠 것 같다면, 절대로 용납하지 않겠다.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검을 든다. 주위 사람을 잃는 경험은 한 번으로도 충분해. 이제 아무도 잃지 않겠어.’
에키는 서늘한 눈으로 이안의 시체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후회도 동정도 없다. 화풀이를 한 게 아니라 더 이상은 내버려 둘 수 없다는 판단으로 처리했으니 마검의 살의에 휘둘린 것도 아니다.
새 삶에서는 손에 피를 묻히고 싶지 않다는 감정은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겠다는 결심에 비하면 너무나 사소했다. 그들을 살려내기 위해 그녀가 보냈던 세월은 결코 녹록치 않았고, 기회는 한 번뿐이므로.
돌아서는 그녀의 걸음에는 미련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는 아까 던져둔 검을 다시 쥐고, 옆에 있던 등불을 들었다. 다음으로 부싯돌과 등기름 병을 꺼냈다. 그녀 자신의 막사였던 터라 위치를 잘 알았다. 그녀는 기름을 막사 안에 전부 뿌린 후에 등불 안의 초에 불을 붙였다.
그 뒤에 막사 입구의 천을 젖히고 밖을 살폈다. 그림자 병사들의 수가 많이 줄었다. 마물들은 이제 목을 꺾어 올려다봐야 할 만큼 거대해져 있었다. 바라하는 아까 그 자리 그대로였다.
호흡을 고르고 마나 코어를 움직였다. 소리 없이 그녀의 몸이 막사를 벗어났다. 그와 동시에 그녀는 등불을 막사를 향해 집어 던졌다. 유리가 요란하게 깨지는 소리가 나고, 그 안의 불이 막사에 순식간에 옮겨 붙었다.
“키이이이이이!”
근처에 있던 마물들이 요란한 소리와 타오르는 불에 시선을 돌렸다. 철판을 손톱으로 긁는 것 같은 울음 소리를 내며 그것들은 불을 향해 움직였다.
그녀는 마물들이 불타는 막사에 정신이 팔린 틈에 들키지 않고 늪의 위를 이동했다. 바라하가 있는 막사는 멀지 않았다. 도착하자마자 망설임 없이 막사 안으로 몸을 들였다.
들어가는 순간, 휙 하고 커다란 손이 그녀의 멱살을 잡아채어 막사 기둥에 짓눌렀다. 다가온 검이 목덜미에 드리워졌다가, 흠칫 놀라며 멀어졌다.
“……에키네시아 로아즈?”
그녀를 알아본 노란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피할 수 있었지만 일부러 잡혔었던 에키는 담담하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바라하 선배님.”
“네가 왜 여기에…….”
“일단 좀 놓아 주시겠어요?”
“어, 아, 미안.”
얼이 빠진 채 중얼거리던 바라하가 화들짝 놀라 그녀를 짓누르고 있던 팔을 떼었다. 에키는 구겨진 옷깃을 바로잡으며 그를 살폈다.
“다친 곳은 괜찮으세요?”
“그 정도야 긁힌 상처 수준이지. 잠깐, 네가 어떻게 알아?”
“눈앞에서 봤잖아요.”
“아, 그랬지……. 아니 그보다 너, 왜 이 안에 있는 거야?”
“어쩌다 보니 삼켜졌어요. 이안 선배님도 함께 들어왔는데 어디 계신지는 모르겠네요.”
에키는 덤덤히 거짓말을 했다. 이안이란 말에 바라하가 험악하게 웃으며 이를 드러냈다.
“그 자식은 죽든 말든……. 아니, 됐다. 그놈은 잊어라, 에키. 알아서 살겠지. 찾아다닐 여유도 없고.”
“네.”
바라하가 성자도 아니고, 자신을 찔러 결절로 밀어 넣은 놈을 찾을 리가 없었다. 에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라하는 입가를 만지작거리더니 천천히 말했다.
“그건 됐고……. 너는 일단 여기 숨어 있어. 아까부터 지켜보니 그림자 병사들이 전부 잡아먹힐 때까지는 크게 위험하지 않을 것 같거든.”
“선배님은요?”
“이 막사에 먹을 게 없어서. 나가서 다른 막사에서 찾아보려고. 길게 버텨야 하니 식량이 필요하겠지.”
“결절에 들어가보신 적 있으세요?”
“아니. 하지만 결절이 소멸할 때까지 이 안에서 버티기만 하면 나갈 수 있는 것 정도는 안다.”
바라하가 밖을 보며 무뚝뚝하게 말하더니 문득 에키를 돌아보았다. 그는 한 차례 호흡을 고르고,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걱정하지 마. 우리는 살아서 여길 빠져나갈 테니까.”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에 긴장이 어렸다. 그는 그 공포를 드러내지 않았다. 대신 그녀를 안심시키고 싶은 듯 빙긋 웃어 보였다. 에키는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다가 나직이 물었다.
“……우리가 이 안에서 버틸 수 있을까요?”
“물론. 불안하면 나를 믿어. 너처럼 조그만 후배 하나쯤은 건사할 수 있으니까.”
바라하가 유쾌한 어조로 말하더니 에키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의 손은 무척 크고 따뜻했다.
[누가 누굴 건사하게 될지 저놈이 알긴 할까. 얘도 참 같잖다.]
마검이 툴툴댔지만 에키는 희미하게 웃음을 머금었다. 그의 마음씀씀이가 고마웠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뭘. 그럼 걱정 말고 기다려. 금방 다녀올 거야.”
바라하가 웃는 얼굴로 끄덕이더니 막사를 뒤져 식량을 담아올 자루를 찾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를 지켜보며 생각을 했다.
‘자, 그럼 어떻게 할까.’
예전에는 결절 내부를 쓸어버리고 저절로 결절이 소멸할 때까지 기다려서 빠져나왔었다.
그 뒤에 결절에 대해 조사하면서 결절을 벗어날 방법에 대한 단서를 얻었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탁상 공론에 불과한 수단으로, 실제로 가능할지는 의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자료에 결절이 생기는 조건을 추측한 것도 있었던 기억이 나는데. 음, 일단 이건 나중에 생각하고.’
“선배님.”
“응?”
에키는 막사 밖으로 나갈 채비를 하고 있는 바라하를 불러 세웠다. 그리고 망설이는 기색으로 말을 꺼냈다.
“제가 사실, 결절에 꽤 관심이 많았거든요. 그래서 예전에 관련 책들을 좀 읽어봤어요.”
“그래? 뭔가 아는 게 있어?”
바라하가 반색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까지나 하나의 가설일 뿐이라고 되어 있었지만요. 결절에는 시작점이 있대요. 라키아기오사가 공간을 베어낼 때, 그 베인 상처의 시작점 말이에요.”
“음.”
“그 책에서는 결절의 시작점이 세상과 이어져 있는 지점일 거라고 주장했어요. 결절은 세계와 분리되어 있지만, 완벽하게 떨어져나간 건 아니잖아요? 일정 시간이 지나면 원래대로 되돌아가니까.”
“확실히 그렇지.”
“결절이 되돌아가는 걸 라키아기오사가 베어낸 상처가 아무는 거라고 치면, 시작점이 제일 먼저 아물지 않겠느냐, 따라서 시작점이 가장 원래의 세계와 가까울 거다, 라고 하더군요.”
“……일리 있는데. 가장 먼저 아문다는 건 그곳이 가장 먼저 세상에 닿는다는 뜻일 테고, 그렇다면…….”
“네. 시작점을 찾아낸다면 거길 통해서 결절을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요?”
“좋은 생각이야. 그 시작점이 통과할 수 있는 형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찾아볼 가치가 있어. 그냥 버티기만 한다고 해도 그곳부터 결절이 열릴 테니까…….”
바라하가 턱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에키는 자신이 보았던 그 책의 추측이 맞길 빌었다. 안 그러면 마물을 쓸어버린 다음 버티는 수밖에 없을 테고, 그렇게 되면 그녀가 마나를 써야 하니까. 바라하의 실력으로 이 결절에서 살아남는 건 불가능했다.
“문제는 그 시작점을 어떻게 찾느냐는 건데.”
“혹시 결절이 생겨나는 모습을 보셨었어요?”
“아니, 비상종을 듣고 나왔을 땐 이미 부풀어 오른 뒤라서. 하지만 캠프 중앙의 허공에서 시작된 것 같긴 했지. 그럼…….”
“그 근처에 시작점이 있을 확률이 높겠네요.”
그녀가 말을 받았다. 바라하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맞아. 에키, 여기서 빠져나가면 다 네 덕이다.”
그가 에키의 등을 가볍게 쳤다. 흥분해서 힘 조절이 덜 되었는지 그녀가 약간 휘청거렸다. 피할 수 있는 걸 그냥 맞아줬더니 제법 아팠다. 에키가 샐쭉 눈을 흘기자 바라하가 어색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어, 저기, 미안. 좀 들떴다.”
“됐어요. 얼른 시작점이나 찾아보죠.”
에키는 등을 문지르며 막사 입구 쪽으로 향했다. 바라하는 그런 그녀의 뒷모습과 제 손을 번갈아 보았다. 그녀의 등은 몹시 좁았다. 비를 맞아 달라붙은 드레스 때문에 더 여려 보인다.
그럼에도 아까 닿았을 때, 그녀는 떨고 있지 않았다. 바라하는 불쑥 솟구친 말을 참지 못하고 그녀를 불렀다.
“에키.”
“네?”
“넌 두렵지 않아?”
에키가 그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바라하에게 감도는 불안을 알아차렸다. 안심시켜 주고 싶었다. 그가 그녀를 안심시키려 했듯이. 에키는 살짝 웃었다.
“선배님이 절 지켜 주신다면서요.”
흔들림 없는 목소리. 부드러운 표정. 바라하의 얼굴이 찰나 흐트러졌다. 에키가 그에게로 다가와 팔의 옷깃을 쥐었다. 장갑에 감싸인 손은 그에 비하면 너무 작았다. 그 손이 망설임 없이 그를 당겼다.
“전 선배님을 믿고 안심할 테니까, 선배님도 절 믿어주세요. 우리, 같이 여길 나가죠.”
바라하는 그녀에게 이끌려 입구로 걸음을 옮겼다. 그는 멍하니 자신보다 한참 아래에 있는 연한 분홍색 정수리를 응시했다. 그리고 나지막하게 답했다.
“……그래. 같이 나가자, 에키네시아.”
그들은 함께 막사의 천을 살짝 젖혔다. 그사이 그림자 병사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수가 줄었다.
거대한 마물들이 붉은 액체가 가득한 바닥을 헤치며 돌아다녔다. 육중한 발이 움직일 때마다 질척한 액체 위로 파문이 퍼져나갔다. 그르릉거리는 소리와 철판을 긁는 것 같은 소리, 날카로운 비명 같은 울음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그 마물들 중에 에키가 이름을 아는 마물은 하나도 없었다. 동종으로 보이는 마물도 없었다. 하나하나가 개성적으로 기괴했다. 애초에 이 마물들은 진짜 마물이라기보다 결절 내부의 이상 현상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 이상한 것들에게도 공통점은 있었다. 제일 작은 놈도 2층 건물 높이는 될 법한 거대한 덩치라는 점, 그리고 어떤 놈이건 마나를 쓰지 못하는 스콰이어 두 명이서는 이기기 어려워 보인다는 점이었다.
“아무래도 쉽게 지나가긴 힘들겠네요. 그림자 병사가 별로 안 남았어요.”
에키가 속삭였다. 약간 멍한 낯이던 바라하가 그녀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는 밖을 확인하더니 눈썹을 모았다.
“확실히, 먹잇감이 없어서 배회하는 놈들이 많군.”
“잠시만요.”
에키는 돌아서서 막사 안을 뒤졌다. 누구의 막사인지는 몰라도 부싯돌과 등기름은 필수품이니 있을 것이다. 그녀는 금방 기름병과 부싯돌 통을 찾아냈다.
“뭘 하려고?”
“마물은 대부분 불을 보면 관심을 보이잖아요. 불 근처에는 인간이 있다는 걸 아니까.”
바라하의 의문에 답해 주며 그녀가 침대보를 잡아당겼다. 그녀는 검을 뽑아 그것을 길게 잘라내었다.
“선배님, 이거, 뭉쳐서 기름을 적셔 주세요.”
“미끼로 쓰려는 거군.”
“네.”
바라하가 그녀가 잘라내는 천조각을 뭉쳐 기름에 적시기 시작했다.
무게를 주기 위해 동전이나 단추 같은 잡동사니도 넣었다. 그는 식량을 담으려고 챙겼던 자루에 천뭉치들을 담으며 에키에게 물었다.
“이런 건 어디서 배웠지?”
“우리 가문의 기사분들이 여행 중에 이렇게 하시더라고요.”
“의외군. 용병들이 주로 쓸 법한 임기응변인데.”
“그런가요? 전 잘 모르겠어요.”
에키는 내심 뜨끔했다. 용병들이 하는 걸 보고 익힌 수완인 게 사실이었으므로, 바라하는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