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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든 꽃-34화 (34/211)

검을 든 꽃 34화

“일부러 결절에 끌고 들어왔냐고요? 네, 맞아요.”

“뭐? 미쳤어?”

“안 미쳤어요. 아, 그리고 지금 고민 중이니까 되도록 입을 다물고 계시는 게 좋을 텐데.”

“고민이라니, 무슨…….”

에키는 눈동자만 굴려 뒤를 보았다. 상황 파악이 덜 되어 얼떨떨하던 이안은 그 눈에 얼음물을 뒤집어 쓴 것처럼 전신이 차가워졌다. 에키네시아의 눈빛은 섬뜩했다. 그녀가 입꼬리만 올려 웃었다.

“제 손으로 죽일지, 바라하 선배님한테 결정을 맡길지 고민 중이거든요. 자꾸 떠들면 기분이 더러워져서 지금 죽일지도 몰라요.”

“……죽인다고? 누구를?”

“당연히 이안 선배님이죠.”

이안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는 주춤 물러서며 검을 쥐었다. 도무지 그녀가 농담을 하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에키는 다시 눈을 돌려 밖을 보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이안에게 등을 보였다. 그러면서 축축하게 젖어 온몸에 달라붙은 분홍색 머리카락을 모아 쥐어짜더니 대충 손으로 빗었다.

“제가, 정말 어지간하면 사람은 안 죽이고 싶거든요. 죽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수천 명쯤, 음, 아니다, 만 단위겠구나……. 몰라요, 세어본 적이 없어서. 어쨌든 억지로 그 정도 죽이고 나면 선배님도 제 심정을 절실히 이해하게 될 거예요. 아, 선배님은 성격상 영원히 이해 못 할 수도 있겠네요.”

“무슨 헛소리를…….”

“되도록 피는 안 보고 싶다는 소리예요. 좀, 평화롭게 살고 싶다고요. 예쁜 옷 입고, 맛있는 거 먹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사는 삶. 누구도 죽이지 않고 누구에게도 위협 받지 않는 삶. 그렇게 살고 싶은데. 근데 말이죠. 음.”

대강 머리를 가다듬은 그녀는 이제 푹 젖은 드레스 자락을 짜내고 있었다. 그녀는 평온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말하면서 생각해 보니까…… 사람이라고 쳐주기 어려운 것도 사람이랍시고 봐줘야 하나 싶네요. 바라하 선배님 찾을 때까지 끌고 다니기도 힘들고. 보아하니 여기, 저로서도 만만치 않을 거 같아서요.”

[주인아, 나! 나! 나 써줘! 너무 좋아! 어차피 결절 안이라서 아무도 없잖아!]

바르데르기오사가 그녀의 살의에 반응하여 들뜬 목소리로 졸라댔다. 에키는 마검에게 답해 주는 대신 계속해서 말했다.

“차라리 절 노리지 그랬어요. 그럼 가소로워서 그냥 내버려뒀을 건데. 선배님이 저한테 무슨 짓을 하든 전 괜찮거든요. 그런데…….”

말을 하면서 그녀는 계속 바라하의 기척을 찾고 있었다. 찾았다. 멀지 않았다. 바라하는 어느 막사 안쪽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살아 있다. 다행히 마물들이 아직 많이 남은 그림자 병사들을 잡아먹느라 막사들을 헤집고 다니진 않는 듯했다.

겨우 안심한 에키는 밖에서 시선을 떼고 이안을 돌아보았다. 그는 이 기괴한 상황을 이해할 수 없는지 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말을 마무리했다.

“그런데, 다른 사람 건드리는 꼴은 못 봐주겠어요.”

이안이 잠깐 침묵하더니, 미소를 지었다. 억지로 쥐어짜낸 웃음은 어색했다.

“내가 무슨 짓을 했다는 거야? 에키네시아 생도, 무언가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그런 것보다 일단 여기서 살아나가는 걸 고민해야…….”

“그건 선배님은 고민할 필요가 없는 문제고요. 선배님이 지금 고민해야 할 문제는 따로 있어요.”

에키는 물을 짜낸 드레스 자락을 팡팡 쳐서 폈다. 우산은 버리면서도 끝까지 들고 있었던 제 검을 내려다보더니, 그것을 옆에 던져버렸다. 그녀는 빈손으로 사뿐사뿐 이안을 향해 다가갔다. 젖어 짙어진 분홍색 머리카락에 감싸인 작은 얼굴이 속삭였다.

“선배님은 반성하고 바뀔 수 있는 인간일까요?”

“……난 네가 지금 무슨 이야길 하고 있는 건지 전혀 모르겠어.”

잠시 침묵하던 이안이 눈썹을 늘어뜨리면서 상처받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파래졌던 안색이 약간 돌아왔다. 그는 천천히 손을 올려 에키의 어깨에 얹었다. 그녀는 그의 손을 쳐내지 않았다.

“내가 누굴 건드렸다는 건지도 모르겠고. 네가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모양인데…….”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달래듯 그녀의 어깨를 쓰다듬던 손이, 목덜미 근처로 오는 순간, 에키는 번개처럼 그의 손목을 잡아챘다. 두꺼운 손목은 그녀의 손 안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녀가 잡은 손목을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역시 절대 안 바뀔 것 같네요, 선배님은.”

그녀는 힘주어 그의 손목을 비틀었다. 검보라색 실크 장갑에 감싸인 손은 연약해 보였지만, 마나가 그 안에 휘돌자 굉장한 악력을 보였다.

이안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비틀린 그의 손에서 면도칼처럼 작은 단검이 툭 떨어져 내렸다. 바라하를 찔렀던 그 단검이었다.

에키는 떨어지는 단검을 무시하고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왜 그랬어요?”

“윽, 이거, 놓…….”

“뭐가 불만이라 그랬냐고, 묻고 있잖아요. 지금이야 뭐, 제가 추궁하니까 절 치워버릴 셈으로 찌르려 한 것 같고. 바라하 선배님한테는 왜 그랬냐고요.”

“씨발.”

이안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그의 표정이 처음으로 무너졌다. 고통으로 악귀처럼 일그러진 얼굴. 그가 그녀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눈이 돌아 있었다.

“당장 안 놔? 너야말로 죽고 싶어?”

에키는 되레 그의 손목에 준 힘을 더했다. 우드득하고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그제야 그를 놓아주었다. 이안은 멀쩡한 손으로 손목을 움켜쥐고 비틀거리며 소리를 질렀다.

“크, 으, 으윽……. 너, 너, 씨발, 미친년이!”

“목소리.”

“컥.”

“낮춰요. 여기, 결절 안이라고요. 밖에 아까 봤잖아요? 마물이 그 소리 듣고 들어오면 어쩌시게요.”

에키는 그의 목을 틀어쥐었다가, 천천히 내려놓았다. 이안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창백해진 얼굴로 에키를 올려다보았다. 그녀가 그의 앞에 쪼그리고 앉으며 오른손의 장갑을 벗었다. 그러곤 그 맨손으로 무릎 위에 턱을 괸 채 다시 물었다.

“왜 그랬는지 말해 봐요. 납득이 가면 선배님을 살려줄지도 모르니까.”

“미친……. 괴물 같은 년…….”

“솔직해지신 건 좋은데,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돼요?”

에키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의 시선이 멀쩡한 그의 다른 손목에 닿았다. 명백한 의도를 담은 시선이었다.

그것을 알아차린 이안은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숨을 몰아쉬더니,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제 얼굴을 문질렀다. 꿀꺽 침을 삼키고, 몇 차례 마른 입술을 축인 다음 그가 입을 열었다.

“내가…… 바라하를 결절에 왜 밀어 넣었냐고?”

“네, 아까부터 묻고 있잖아요.”

“……그걸 정말 몰라서 물어?”

이안이 으득 이를 갈았다. 그는 얼굴을 감싼 손 너머로 에키를 노려보았다.

“난 최선을 다했다고. 빌어먹을 기사 새끼들 입안의 혀처럼 굴어주고, 짜증나는 생도 대표직까지 하면서, 씨발, 그렇게 했는데, 대체 왜? 임시 스콰이어도 아니었던 사막 떠돌이 새끼가 난데없이 오너의 스콰이어가 되는 건데? 왜, 드레스나 입고 다니는 골빈 년이 입학 첫날부터 단장의 스콰이어로 지명받냐고! 불공평하잖아! 노력도 안 한 년놈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나직하게 시작했던 그의 목소리는 뒤로 갈수록 거칠고 빨라졌다. 짓씹어 뱉어내는 것처럼 들렸다. 에키는 그를 빤히 쳐다보다가 되물었다.

“그게 다예요? 고작 그것 때문에 바라하 선배님을 결절로 밀어 넣었다고요?”

“고작? 너한테는 그게 고작이야? 운 좋고 편한 길만 걸어서 내 발버둥이 네년한텐 고작으로 보여? 내가, 씨발, 얼마나 노력했는데! 아무 노력도 안 한 것들이 운만 처 좋아서는, 쉽게 얻어내고……!”

“아무 노력도, 안 했다고.”

그녀가 이안의 말을 끊었다. 차가운 음성이었다. 심상찮은 분위기에 이안이 움찔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보여요? 당신 말고 다른 사람들은 다 쉽게 사는 걸로 보여? 남들이 가진 건 전부 운이 좋아서 얻었을 뿐이야? 그런 이유로, 죽이려 했다고?”

에키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비틀었다. 노력하지 않았다고. 쉽게 얻었다고? 제멋대로 움직이는 몸뚱이 안에 갇혀 절규했던 6년과, 지금 이 시간, 이 삶을 얻기 위해 개처럼 굴렀던 9년이,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차오른다.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시야가 새까맣게 물드는 것 같아 심호흡을 했다. 살의에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분노하는 건 괜찮아도, 행동할 때는 언제나 냉정해야 했다. 자제심을 잃어서는 안 된다. 마검의 주인이기 때문에.

고개를 숙인 그녀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분노를 걷어내고 냉정으로 생각했다. 이안 펠레트로를 어떻게 할지를. 그녀는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어보았다.

이안은 그녀가 동요한 걸 눈치챘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녀는 자신을 보고 있지 않았다. 늘어뜨려진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목이 가늘었다. 게다가 그녀는 빈손이었다. 그녀의 검은 막사 입구에 아무렇게나 구르고 있었다.

기회다. 어쩌면 유일할지도 모를.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안은 멀쩡한 손으로 재빠르게 검을 뽑아 에키의 목을 향해 휘둘렀다. 그러나 검이 하얀 목에 닿기 직전에, 그는 불에 덴 것 같은 통증이 가슴께에서 퍼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커…….”

입을 벌리자 뜨거운 것이 목으로 넘어왔다. 쉽사리 그의 검을 피한 에키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주었던 마지막 기회를 이안 펠레트로가 스스로 걷어찼다.

에키는 더 이상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그녀의 오른손에는 없던 검이 쥐어져 있었다. 유리처럼 투명한 칼날, 검은 손잡이. 칼날에 새겨진 문양을 따라 붉은 피가 고였다.

[으아……. 너무 오랜만이야, 이 느낌. 좋다…….]

마검이 배부른 고양이처럼 갸릉거리는 목소리를 냈다. 에키는 이안의 몸에서 바르데르기오사를 비틀어 빼냈다. 그가 스르륵 무너져 내리며 덜덜 떨리던 눈이 감겼다. 즉사였다. 바르데르기오사에 묻었던 붉은 피는 검에 스며들 듯 사라졌다. 마검이 콧노래를 불렀다.

[아오, 이제 좀 후련하네. 어때, 너도 시원하지? 살의 제법 풀린 것 같은데!]

“글쎄.”

에키는 건성으로 대꾸하고 마검을 회수했다. 검은 금세 그녀의 손바닥 안으로 사라졌다. 그녀는 오른손에 장갑을 도로 꼈다. 그리고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이안의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마검이 의아한 듯 물었다.

[왜? 찝찝해? 괜히 죽인 거 같아?]

“그건 아니고.”

[그럼 왜?]

“각오를 좀 수정했을 뿐이야.”

[각오라니, 무슨 각오?]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각오.”

[뭔데? 나도 알려줘!]

“넌 몰라도 돼.”

[쳇, 쳇, 쳇! 맨날 치사해.]

죽은 이안을 내려다보며 그녀는 생각했다. 자신이 아니었다면, 이 자리에 죽어 있는 게 이안이 아니라 바라하일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을.

지워진 과거에는 확실히 그랬을 것이다. 이안 펠레트로는 멀쩡히 살아 3년 후에는 기사가 되고, 바라하 이슬라프는 마물 토벌 때 사망했을 테니까.

‘두 번의 기회는 없을 거라고, 카이로스기오사가 말했었지. 이제 누가 죽든 되살리지 못해. 그럼…… 지켜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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