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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든 꽃-33화 (33/211)

검을 든 꽃 33화

앨리스. 파티마. 그들은 준기사나 기사와 함께 캠프 밖으로 나왔다. 일단 무사했다.

테레사가 미하일을 끌고 나오더니 소년을 캠프 밖에 던져놓고 도로 캠프 안으로 들어간다.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였다.

부단장 바론이 결절 바로 근처에서 막사들을 헤집으며 남은 사람이 있나 확인하고 있다. 바라하는 바론을 따라다니며 돕고 있었다.

그리고 이안 펠레트로가 그 근처에 보였다.

거리가 멀었다. 에키는 캠프 밖으로 뛰쳐나가는 사람들을 거슬러 그 쪽으로 향했다. 누군가가 그녀를 붙잡아 말리려 했으나 그녀는 물 흐르듯 그 손을 피했다. 몰려나오는 단원들 때문에 속도를 낼 수 없었다. 마나를 써서 뛰어오르면 간단하겠지만 그건 지나치게 눈에 띄는 짓이었다.

결절의 가장자리, 일그러진 유리구슬 같은 그것이 조금씩 커져 갔다. 바론이 근처의 막사를 거의 다 확인하고 빠져나갔다. 바라하가 바론의 뒤를 좇았다. 이안이 그를 불러 세웠다.

거리가 꽤 되는데도 에키의 감각에는 그들의 대화가 똑똑히 들렸다.

“왜, 생도 대표?”

“생도들 막사는 다 확인했다고 생각했는데, 신입생 막사 중에 확인 안 한 게 있어.”

“신입생? 누구?”

“에키네시아 로아즈, 막사가 따로 있어서…….”

여기서 왜 자신의 이름이 나오는가. 에키는 어이가 없었다. 그녀는 소리를 높여 바라하를 불렀다. 하지만 요란한 비상종 소리와 단원들의 소음에 그녀의 목소리는 묻혀버렸다.

‘그냥 마나를 쓸까, 아니, 그럴 수는…….’

갈등이 휘몰아쳤다. 유리엔이 그녀가 마검의 악마인지, 그냥 괴짜 천재인 에키네시아 로아즈일 뿐인지 시험하고 있을 텐데, 마나를 쓰는 모습까지 보일 순 없었다. 지나치게 비정상적이다.

그녀가 고민하는 사이 바라하는 방향을 돌려 에키의 막사 쪽으로 가고 있었다. 이안이 그의 뒤를 따랐다.

마음이 급해졌다. 에키는 거슬리는 단원들을 밀치며 다가갔다. 성가신 우산을 내팽개쳤다. 와중에 다른 단원의 검집에 걸렸는지 망토가 당겨지자 망토도 내던졌다.

쏟아지는 비, 축축한 냄새, 젖어드는 옷과 머리카락, 간간이 내리치는 번개, 하늘을 으스러뜨리는 것처럼 들리는 천둥소리, 귀를 찢어버릴 듯 울리는 비상종 소리, 초조한 고함소리, 불안한 표정들.

그 너머로, 바라하가 에키의 막사에 도달해 입구의 천을 젖히는 게 보인다.

그녀의 막사는 중앙 근처였다. 바로 위에 범위를 넓혀가고 있는 굴절된 공간이 있었다. 오른쪽으로 한 걸음만 더 가도 저 결절에 삼켜질 것이다.

이안이 바라하의 뒤로 다가갔다. 에키는 앞에 있던 준기사 하나를 거의 넘어뜨리다시피 밀치고 그들에게로 달렸다.

“바라하 선배님!”

드디어 그녀의 목소리가 닿았다. 바라하가 막사에서 고개를 빼내 그녀 쪽을 돌아보았다. 남자의 표정이 그녀를 보고 안심한 듯 살짝 풀어졌다.

그와 동시에, 그의 몸이 비틀거렸다. 넘어질 정도로 휘청거린 건 아니었다. 그냥 뒷걸음질 한 번 정도면 똑바로 설 수 있을 작은 불균형. 그러나 그 걸음은 결절에 닿아버렸다.

굴절된 공간 너머로 바라하의 몸이 삼켜져 사라졌다.

뒤늦게 도달한 에키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 자리를 보았다. 바라하가 사라진 자리에 이안이 서 있었다. 그는 능숙하게 손을 감추며 충격을 받은 것처럼 신음을 흘렸다.

“맙소사, 바라하…….”

에키는 비에 흠뻑 젖은 채 우뚝 서서 그를 보았다. 바라하의 덩치에 가려져서 다 보진 못했지만, 그녀는 언뜻 스쳐간 모습조차 놓치지 않았다. 극도로 집중한 상황이었으니 더욱 그랬다.

이안 펠레트로는 방금 소매 속으로 단검을 감췄다. 조잡하고 작은, 면도칼 수준의 단검이었다. 그 단검의 끝에 붉은 피가 묻어 있었다. 등 뒤에서 바라하를 찌르고 밀어, 그를 결절에 닿게 만들었다. 상처 자체는 별거 아니었겠으나 그로 인해 잃은 균형이 치명적이었다.

이안은 황망한 얼굴로 바라하를 삼킨 결절을 보더니, 다급히 에키에게 다가왔다. 그가 그녀의 어깨를 잡고 당기며 말했다.

“에키네시아 생도, 여기서 뭘 하는 거야! 여긴 위험해. 나가자.”

에키는 그를 돌아보았다. 이안은 걱정과 공포가 범벅된 표정을 그려내고 있었다. 그 얼굴이 어찌나 온순하고 선량해 보이는지 기가 찼다. 그녀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사관학교가 아니라 극단에 들어가시지 그랬어요, 선배님.”

“응? 무슨 소리니? 일단 나가자. 나가서 얘기해.”

에키는 흘긋 밖을 보았다. 단원들은 거의 다 빠져나갔다. 부단장 바론이 자신을 따라오던 바라하가 사라진 것을 뒤늦게 알아채고 돌아오고 있었다. 그는 바라하보다도 더 거구인 근육질의 남자였다. 결절 코앞에 있는 그들을 발견한 그의 우직한 얼굴에 당황이 어렸다.

“너희, 뭐 하는 거냐! 밖으로 나가!”

바론의 육중한 어깨 너머로, 몰려 있는 단원들 너머로, 캠프를 향해 달려오고 있는 하얀 남자가 보였다. 유리엔. 거리가 멀어 그의 얼굴까지는 볼 수 없었다. 에키는 다가오는 바론을 다시 보았다.

〈밖으로 나가지 말고, 여기서, 나와 함께 죽자.〉

지워진 과거, 다른 기사들이 죽어 널브러진 가운데에서 피투성이가 된 바론은 그렇게 말했었다. 그의 등 뒤로 굳게 닫힌 성문이 있었다. 바론이 밖으로 내보낸 기사와 준기사들, 생도들이 시민을 대피시켰다. 비명이 성벽을 넘어 그녀에게까지 들려왔다.

에키네시아는 웃는 얼굴로 그에게 다가갔다. 바론이 검을 들었다. 광검(狂劍) 살릭기오사. 인간의 분노와 광기를 재료로 만들어진 그 검은, 짐승의 이빨이 돋은 것처럼 삐죽삐죽하고 거대했다. 그의 거구와 어울리는 대검이었다.

그녀는 광기에 몸을 맡기고 야수처럼 날뛰는 그를 제압했다. 그 목을 날리고 성문을 열었다. 결국 바론은 그녀를 막지 못했지만, 그가 번 시간 덕에 살아난 목숨이 꽤 있었을 것이다.

“지금 나가겠습니다. 부단장님, 그런데 바라하 생도가…….”

이안이 앞으로 걸음을 옮기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저 바론에게, 그의 스콰이어가 결절에 삼켜졌단 소리를 하려고? 네 손으로 그런 짓을 저질러 놓고서? 에키는 웃었다. 절로 웃음이 나왔다.

‘죽어야 할 인간은 살고, 살아야 할 인간은 죽고. 싫은데, 이거.’

앞으로 걸음을 옮기는 이안의 등에 그녀의 손이 닿았다. 큰 힘은 필요하지 않았다. 등 뒤로 바짝 결절이 다가왔다. 그녀는 다리에 힘을 빼며 뒤로 넘어졌다. 그와 동시에 넘어지고 싶지 않은 것처럼 이안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결절이 물거품처럼 부드럽게 그들을 삼켰다. 부단장이 눈을 부릅뜨며 손을 뻗는 모습이 일그러진 시야 저편으로 멀어졌다.

“이런……!”

바론의 손은 허공을 갈랐다. 그가 본 것은 에키네시아가 넘어지고 이안이 비틀거리더니 둘 다 결절에 빨려들어 가버리는 장면이었다.

바론은 창백하게 질린 안색으로 결절을 바라보았다. 잔뜩 부풀어 오른 결절은 불규칙적으로 흔들렸다. 터진다. 저건 곧 터질 것이다. 강렬한 예감에 바론은 본능적으로 마나까지 사용하여 쭉 빠졌다.

그의 예감은 맞았다. 결절이 확 부풀어 올랐다. 그것은 바람을 불어넣은 풍선처럼 커지더니, 캠프 전체를 거의 다 집어삼킨 다음 흔적도 없이 소멸했다. 캠프에 있던 막사들이 모조리 사라졌다. 그 자리에 남은 것은 파헤쳐진 땅뿐이었다.

그는 멀거니 굳었다. 그런 그의 뒤로 거칠게 몰아쉬는 숨과 함께 다가오는 기척이 있었다.

“바론 경.”

“단장님.”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지금.”

바론은 삐걱거리는 목을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보고를 하기 위해 입을 열었던 그는 유리엔의 얼굴을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바론의 나이는 마흔이 넘었다. 그는 전대 단장 때부터 기오사 오너였던, 가장 경력이 긴 오너였다. 그리고 유리엔은 그가 처음으로 거둔 스콰이어였다.

바론은 유리엔이 사관학교 2학년, 열아홉 살일 때 그를 스콰이어로 삼았었다. 유리엔이 스물세 살에 마스터가 되어 정식 기사가 되면서 그 관계는 자연스럽게 해지되었고, 그가 최연소 단장이 되면서부터는 상하관계가 역전되었다.

자신의 스콰이어였던 자를 상관으로 모시고 있지만, 바론은 그 사실에 불만을 가진 적이 없었다. 처음 그를 스콰이어로 삼을 때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자신을 뛰어넘으리라는 걸 예상했으므로.

그러니까 바론은 유리엔이 사관생도일 때부터 단장이 된 지금까지 근 9년째 그를 봐왔다. 스콰이어와 로드의 관계에서 부단장과 단장의 관계로 바뀌긴 했어도.

유리엔은 그런 바론으로서도 처음 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에키네시아 로아즈는? 그녀는 어떻게 되었지?”

그가 쥐어짜내듯이 물었다. 바론은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설 뻔했다. 그가 아는 유리엔은 항상 정도를 걸으며, 인간적인 욕심이라고는 없는 것처럼 고요하고 서늘한 남자였다. 그를 볼 때면 끓는점이 높다 못해 아예 없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랬던 그가 지금은 누구 하나를 찢어죽일 듯한 살기와, 동시에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듯한 위태로움을 보이고 있었다. 끓다 못해 기화되고 있는 것 같다. 지독하게 낯설었다.

바론은 약간 더듬으며 대답했다.

“결절에, 삼켜진 것 같습니다.”

“결절은 어디로 간 거지? 이미 분리되었나?”

“예, 방금 분리되었습니다.”

라키아기오사가 완전히 공간을 베어내어 결절이 이 세상과 분리되고 나면, 그것을 찾을 방법도 그 안으로 들어갈 방법도 없었다. 시간이 홀러 그 잔해가 저절로 쏟아져 나올 때까지.

유리엔은 아무것도 남지 않은 자리를 바라보았다. 하얗게 질린 얼굴이 부서져 내릴 것처럼 보였다.

* * *

결절 안은 밖과 같은 공간이었다. 정확히는 같지만 다른 공간이다. 똑같은 막사들, 똑같은 캠프인데, 다른 법칙에 지배받는다.

비 내리던 밤 대신 불길한 황혼이 드리운 저녁이었다. 바닥이 질퍽질 퍽했다. 검게 보일 정도로 붉은 액체가 늪처럼 바닥을 메우고 있었다. 그 사이로 병사의 복장을 한 그림자들이 몰려다니며 서로를 찔러댔다. 그러나 그림자여서 그들 중 누구도 쓰러지지 않았다.

마물들이 바닥에 흐르는 액체에서 솟구치고, 피 같은 황혼에서 흘러내렸다. 그것들은 병사의 그림자들을 날름날름 집어삼키더니 점점 덩치를 키웠다. 그림자들은 바로 옆의 병사가 마물에게 먹혀도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만을 찔러댔다. 그 광경은 막 태어나는 지옥처럼 비현실적이었다.

에키네시아는 뒤로 넘어지며 물거품 같은 감촉을 느낀 순간 도로 균형을 잡았다. 굽 높은 앵클부츠가 철퍽하고 늪을 밟았다. 구두는 돌이킬 수 없는 꼴이 되었다. 그녀는 똑바로 서며 쥐고 있던 이안의 옷자락을 놓아주었다.

“이게…….”

이안은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에키는 그를 내버려두고 일단 주위를 살폈다. 결절에 들어가본 경험은 한 번뿐이지만 그래도 무경험자와는 다른 법이다. 한 번 들어가서 개고생한 후로 나름 결절에 대해 조사도 꽤 했었다.

[와, 여기 뭐야? 되게 기분이 좋아지는데?]

바르데르기오사가 신이 난 목소리로 떠들었다.

‘살의가 아주 넘쳐흐르는 공간인가 보네. 전쟁터였으니 당연하겠지.’

에키는 싸우는 그림자 병사들과 마물들을 확인한 다음 재빨리 옆에 있던 막사 안으로 숨었다. 마침 결절에 같이 삼켜진 그녀 자신의 막사였다.

어정쩡하게 있던 이안이 그녀를 따라 들어왔다. 에키는 그를 내버려두고 막사 밖을 살폈다. 바라하를 찾는 게 가장 급했다.

“……너.”

뒤에서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에키는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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