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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든 꽃-32화 (32/211)

검을 든 꽃 32화

[유리엔도 이러고 있을까? 아, 아니다. 걔는 회귀 전에도 이 마물 토벌에 참여했을 테니까, 이때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겠네! 그럼 넌 그냥 쉬면 되잖아? 걔가 알아서 구하겠지, 그 덩치 큰 놈은.]

마검이 투덜거렸다. 에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 그다지 생각을 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으므로. 집중할 만한 것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어느 순간, 이변이 감지되었다. 에키는 짐승처럼 소리조차 내지 않고 목만 돌려 그쪽을 응시했다. 퍼붓는 비에 경계를 서는 사람들 외에는 다들 막사에 틀어박혀 있는데, 막사 밖으로 나오는 기척이 잡혔다.

바라하 쪽이 아니었다. 유리엔이 막사를 벗어났다.

에키는 그의 막사 바로 옆이었기에 살짝 벌려둔 입구의 틈으로 그를 볼 수 있었다. 그는 우산도 쓰지 않고 후드가 달린 망토만 쓴 채로 비를 그대로 맞으며 걸어 나와, 바라하와 부단장의 막사가 있는 쪽을 지그시 보았다. 그러더니 돌아서서 다른 곳으로 향했다.

[뭐야, 저거 어디 가?]

“유리엔 함부로 부르지 말랬지.”

[야, 그게 중요해? 하여간 쟤가 지금 이상한 데로 가잖아! 어떻게 할 거야?]

에키는 짧은 순간 격렬하게 고민했다. 이 빗속에,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자 어딘가로 가는 유리엔을 따라가 볼 것인가? 아니면 바라하에게 위기가 닥치는지 계속 지켜볼 것인가.

시간이 부족했기에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검을 챙겨 들었다. 우비 대용으로 매끄러운 재질의 망토를 꺼내 뒤집어쓴 다음, 짙은 보라색의 우산을 들었다.

[따라가 보게?]

“유리엔이 알고 있는 건 확실하잖아. 지금 그가 막사를 비운다는 건, 뭔가 알고 하는 행동이겠지.”

[그랬다가 자리 비운 사이 캠프에 무슨 일 터지면 어쩌려고?]

“너무 멀리까지 따라갈 생각은 없어. ……어쩐지, 멀리 가지도 않을 거 같고.”

마나 코어에서부터 마나가 전신에 휘돌았다. 에키는 기척을 지웠다. 전문적인 훈련을 한 사냥꾼이나 암살자들에 비할 순 없어도, 어느 분야에서 달인에 이르면 관련 있는 다른 분야도 일정 수준은 되는 법이다. 적어도 유리엔에게 안 들킬 자신은 있었다.

‘어두운 색 입길 잘했네.’

빗속에 몸을 감추고 그녀는 조용히 유리엔을 뒤따랐다.

그의 은발과 흰 제복을 가린 검푸른 망토가 비에 흠뻑 젖어들고 있었다.

그가 경비를 서고 있는 준기사들을 피해 캠프를 벗어났다. 유리엔은 목적지를 확실히 알고 있는 것처럼 거침없이 움직였다.

흰 까마귀 협곡 입구는 날씨가 맑았다면 캠프에서 잘 보일 만한 거리에 있었다. 그는 똑바로 협곡으로 향했다. 다가갈수록 불길한 안개가 짙어졌다. 유리엔이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에키는 잠시 망설이다 캠프 쪽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폭우 속의 캠프는 잠잠했다. 결국 그녀도 안개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유리엔은 협곡 내부로 깊게 들어가지는 않았다. 입구에서 가까운 오른쪽 곡벽으로 다가가더니 젖은 바위와 흙의 사이를 훑었다. 그가 가만히 오른손을 늘어뜨렸다. 손바닥에서 하얀 성검이 흘러나와 그의 손에 쥐어졌다. 어둠 속에서 성검이 희미하게 빛을 뿜었다.

[야, 쟤 뭐 찾는 거 같은데?]

마검이 의아한 듯 중얼거렸다. 에키도 같은 의문을 품었다.

‘마나를 쓰고 있는 것 같은데……. 뭘 찾는 거지?’

그녀는 툭 튀어나온 나무 뒤에 숨은 채 우산 너머로 조용히 그를 지켜보았다. 성검이 뿜어내는 은은한 빛에 그의 옆얼굴이 비쳤다. 그린 듯이 반듯한 선. 내리깐 눈썹이 푸른 눈에 그늘을 드리웠다.

그가 손을 뻗어 벽에 대더니 천천히 더듬어 나간다. 젖은 흙으로 손이 엉망이 되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다 그의 손이 한곳에서 멈췄다. 그는 잠시 그 자리를 손끝으로 더듬다가, 손을 떼었다. 그러곤 곧바로 성검을 들어 그 지점에 찔러 넣었다. 흰 검은 두부를 가르듯 부드럽게 흙벽을 파고들었다. 그 순간.

“끼아아아아아아아아아!”

소름끼치는 비명이 빗소리를 헤집으며 울려 퍼졌다. 타이밍 좋게 천둥이 울어 그 날카로운 소리를 반쯤 묻었다. 비명과 동시에 성검이 박힌 벽이 갈라지며 다 썩은 시체들이 무더기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그 시체들 위로 형체 없는 허연 연기 같은 것들이 솟구쳤다. 눈이라고 할 법한 위치에 시뻘겋고 형형한 빛이 구슬처럼 박혀 있었다. 입도 없는 그것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쥐구멍에 불을 놓은 것처럼 쏟아져 나왔다.

‘스펙터(Specter)!’

에키는 보자마자 그것들의 정체를 알았다. 대표적인 유령형 마물. 실체가 없어 연기처럼 어룽거리는 저것들은 물리적으로는 아무 짓도 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마물들 중에서 가장 위험한 축에 속했다.

스펙터는 인간에게 들러붙는다. 스펙터에 빙의된 인간은 마물처럼 주위를 공격한다. 마스터급 기사라면 저항할 수 있지만, 마나를 쓸 수 없는 자들은 속수무책이었다.

‘바라하 선배가 무슨 사고로 죽었는지 짐작이 가네.’

대비하지 못한 상태에서 캠프에 스펙터들이 몰려왔다면, 기사를 제외한 준기사나 생도들 중 많은 수가 스펙터에 씌여 날뛰었을 것이다. 그것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많은 희생이 발생했겠지.

이렇게 천둥번개가 치는 밤에 귀신에 씌어 날뛰는 동료라니, 악몽이 따로 없었다. 창천기사단처럼 강한 집단이라 해도 대량의 피해가 날 만했다.

그리고 유리엔이 왜 혼자 여기로 왔는지도 알았다. 스펙터에 저항하지 못할 사람이라면 도움은커녕 짐이 된다. 어떻게 스펙터들이 근처에 있는 것을 미리 알아차렸는지 묻는다면 대답하기 어렵기도 하고.

‘기오사 오너 중에, 기억이 있는 건 유리엔 혼자구나.’

퍼뜩 그런 깨달음이 왔다. 만약 기억이 있는 기오사 오너가 또 있었다면 그 사람도 스펙터들을 미리 처리하러 왔을 테니까. 이 자리에 유리엔만이 있다는 건 기오사 오너 중에 기억이 있는 게 그 혼자라는 뜻이 된다.

내심 안도하면서도 왜 하필 그중에서 기억이 있는 게 유리엔이냐는 대상을 찾을 수 없는 원망이 솟았다. 속이 무너지는 기분에 에키는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와, 징그럽게 많다.]

마검이 질린 듯 중얼거렸다. 제 모습을 드러낼 생각이 없는 그녀조차 찰나 도와야 하나 고민될 정도로, 몰려나오는 스펙터의 수는 만만찮았다.

안개 속으로 스펙터가 쏟아진다. 그것들은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며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인간인 유리엔 근처를 맴돌았다. 귀기 서린 붉은 눈이 안개 속을 떠돈다. 간을 보는 듯한 유영이 이어졌다.

유리엔은 벽에 꽂은 성검을 손으로 쥔 채 움직임 없이 고요했다. 비에 푹 젖어 회색으로 보이는 은발에서 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그의 턱에 맺혔던 빗물은 고이고 부풀다가 아래로 툭 떨어졌다.

그 물방울이 빗물이 고인 웅덩이에 닿는 것과 동시에, 갑작스럽게 스펙터들이 유리엔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전신이 흐린 그림자들 속으로 삽시간에 삼켜졌다. 반투명한 것들이라 해도 수백이 겹치고 겹쳐 엉겨 붙자 유리엔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야……. 저거 위험한 거 아니냐?]

“……아니, 괜찮아.”

에키는 속삭이듯 답하며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스펙터들이 달려드는 순간 저도 모르게 검을 움켜쥐었던 손에서 힘을 뺐다. 그녀가 나설 필요는 없었다.

유리엔이 벽에 박아 넣었던 랑기오사를 뽑아내었다.

하얀 검을 따라 흰 마나가 흐른다. 덧씌워지고, 덧씌워져서, 검의 형체조차 마나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될 정도로. 그러자 성검 주위에 떠도는 황금빛 문양이 눈부신 빛을 뿜었다. 마나가 폭발적으로 팽창했다. 그리고 검이 움직였다.

“끼아아아아아아아!”

아까보다 좀 더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허공을 찢었다. 소멸의 고통이 느껴졌다. 흰 마나가 달처럼 사방을 베어나갔다. 스치는 족족 스펙터들은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소멸했다. 안개가 그 서슬에 함께 휘말려 파도처럼 밀려났다.

에키는 안심하고 나무에 등을 기대었다.

“악한 것을 상대할 때 가장 강해지는 검이니까.”

[랑기오사 능력이 그거긴 하지.]

“랑기오사도, 그리고 그도 말이야.”

그녀는 설핏 웃었다. 하얀 마나와 성검의 황금빛에 둘러싸인 그는 고결해 보였다. 그녀의 손바닥에 들러붙은 검은 얼룩과는 다르게.

스펙터들이 모조리 소멸하는 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 터였다. 에키는 끝까지 지켜보지 않고 자리를 떴다. 그녀는 캠프 쪽으로 천천히 돌아갔다.

긴장이 풀리자 피로가 느껴졌다. 이제 걱정할 필요 없이 쉬면 되겠지. 바라하도, 그 누구도 죽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안개를 벗어났다. 그리고 캠프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그녀는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공간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굴절되는 유리처럼, 혹은 퍼져나가는 수면처럼.

작게 생겨난 일그러짐이 점점 커진다. 그것은 캠프의 허공에서 생성되어 아래로 뻗어가고 있었다. 비와 어둠에 잠겨 있던 캠프가 뒤늦게 그것을 알아채고 미친 듯이 비상종을 울렸다.

에키는 그것을 보자마자 달렸다. 저것에 빨려 들어가면 끝장이다. 기오사 오너라 해도 쉽사리 생환을 장담할 수 없다.

회귀 이전 에키네시아는 기오사 하나를 얻기 위해 저것에 제 발로 들어가긴 했었지만, 그녀도 거기서 살아 나오느라 반쯤 죽을 뻔했다.

‘대체, 여기서 왜 결절이 생겨나는 거야!’

결절. 공간을 잘라내어 만들어진 마디. 기존의 세상과 분리되는 공간. 공간의 신검 라키아기오사가 공간을 베어낸 흔적.

고정된 자리에서 시간을 관조하는 신검 카이로스기오사와 달리, 신이 공간을 재료로 만들어낸 신검 라키아기오사는 그 성질대로 공간을 표류한다.

그 검은 형상조차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았다. 기록에 제 모습을 드러낸 적도 없다. 누구도 본 적 없는 라키아기오사의 존재는 ‘결절’로 증명된다.

라키아기오사는 공간을 가르며 돌아다닌다. 그리고 그 갈라진 공간은 결절이 된다.

결절 안이 어떤 공간이 되는지, 그 안에 무엇이 있을지는 들어가 보기 전에는 아무도 확신할 수 없다.

다만 어느 정도 짐작할 방법은 있었다. 라키아기오사는 공간을 창조하는 게 아니라 이미 있던 공간을 베어 분리해 내는 것이므로, 결절이 생겨난 환경이 결절에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면, 평화로운 마을에서 뛰노는 아이들 근처에서 결절이 생겨나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결절의 내부는 어린아이들이 꿈꿀 법한 요정들이 가득한 동화 같은 세상이다. 빨려 들어간 아이들은 한동안 실종되긴 해도 누구도 다치지 않고 돌아온다. 그리고 요정을 보았다며 재잘거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운이 좋은 환경은 흔치 않았다. 세상은 동화보다 훨씬 건조하고 질척하므로. 대부분의 결절은 기괴하고 위험했다.

이번 같은 경우, 흰 까마귀 협곡 같은 마물 소굴 근처에서 생겨난 결절이니 그 속은 지옥일 확률이 높았다.

‘유리엔이 알고 있었다면 여기에 캠프를 치지 않았겠지. 이 결절은 예전에는 일어나지 않았던 일인 거야. 젠장, 왜……!’

에키는 이를 악물고 달렸다. 결절이 부푸는 속도는 일정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나마 사람이 걷는 속도 정도였지만 갑자기 펑 터지듯 커질지도 모른다.

그럼 범위 내의 것들을 모조리 집어삼키고 분리되겠지. 그게 언제 원상 복귀될지, 그 안에 삼켜진 자들이 결절이 사라질 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일그러지는 공간 아래에서 창천의 단원들이 황급히 짐을 챙겨 달아나고 있었다. 그녀는 달아나는 사람들을 빠르게 눈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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