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31화
유리엔의 움직임을 전혀 방해하지 않으면서, 그가 놓친 자잘한 마물들에게는 확실하게 검을 꽂아 넣는다.
그녀는 지극히 효율적이고 단순한 움직임으로 마물의 숨통을 끊었다. 화려한 기교나 눈에 띄는 기술은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모습은 시선을 끌어당겼다.
하얀 마나를 휘감은 은발의 기사단장 뒤로, 검보랏빛 드레스 자락이 춤을 추는 것처럼 넓게 퍼져서 휘돈다. 치렁치렁한 소매가 단순한 검의 움직임을 대신해 허공에 복잡한 선을 드리웠다.
땅굴을 파고 숨어 있다가 발목을 붙잡는 레드캡이 손을 뻗는다. 그녀는 아래를 보지도 않고 가벼운 스텝만으로도 그것을 비켜선다. 이어 리본으로 장식된 앵클부츠의 높은 굽이 레드캡의 팔을 짓밟아 고정하고, 은가루를 바른 검이 망설임 없이 마물의 미간에 꽂힌다.
그러고 나면 팍 튀어 오르는 마물의 피를, 마차가 튀기는 진흙을 피하는 아가씨처럼 인상을 쓴 채 피한다.
풍성한 깃털이 달린 모자는 그 모든 행동 와중에도 날아가지 않았다. 그녀가 움직일 때 얼마나 균형을 잘 유지하는지를 얌전히 머리에 얹혀 있는 그 모자가 증명했다.
그 덕에 그녀는 아직 핏자국 하나 없이 출발할 때와 똑같은 상태였다. 안개와 걸어 다니는 시체와 악취가 가득한 공간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그 모습이 유지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그녀의 실력에 대한 증거였다. 썩어가는 눈알을 덜렁거리는 마물이 덤벼들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건 덤이었다.
‘단장님이 난데없이 스콰이어를 지명했다고 하더니만.’
‘천재는 천재를 알아보나…….’
‘괴물끼리 모였네. 다 큰 괴물, 자라나는 괴물.’
‘옷 보고 제정신인가 싶었는데……. 저 정도면 뭘 입고 다니건 간에 뭐라 할 말이 없다.’
뒤에서 보던 이들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저도 모르게 그녀를 향해 시선이 간다.
그러다 그들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에키네시아가 걸음을 옮기며 아무렇지도 않게 드레스 자락을 끌어 올린 탓이었다. 시체가 뛰어다니는 마물 소굴에서 레이스 패티코트 아래로 보이는 짙은 스타킹은 예상치 못한 광경이라 자극이 과했다.
‘은가루가 떨어졌네.’
에키로서는 당연히 무언가 의도를 가지고 한 행동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리 높게 걷어 올리지도 않았다. 그녀는 한 손으로 드레스 자락을 휘감아 들고, 다른 손으로 허벅지에 가죽벨트로 고정해 둔 가방을 열었다.
마나를 쓰지 못하는 자들은 마물을 상대할 때 검에 은을 갈아 축복을 섞은 가루를 바른다. 일반 검으로는 재생력이 좋은 마물에게 타격을 주기 어렵기 때문이다. 유령형 마물은 아예 은가루를 바른 검이 아니면 벨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
사실 에키에게는 필요 없는 도구였지만, 마스터임을 숨겨야 하므로 그녀도 은가루를 사용했다. 은가루를 검에 바르면서 그녀는 달려드는 해골 하나의 다리를 발로 걷어찬 다음 앵클부츠의 길쭉한 굽으로 머리를 부쉈다.
‘은근히 유용하잖아, 이거.’
픽 웃으며 구두 굽을 내려다보던 그녀의 미간이 구겨졌다. 마물의 피와 체액, 뼛가루로 검은 구두는 엉망이 되어 있었다. 나름 좋아하는 신발이었는데. 어쩔 수 없지. 그녀는 내심 한숨을 쉬고 다시 검을 들었다.
유리엔은 전혀 걱정이 되지 않았다. 수가 많을 뿐 상위 마물인 듈라한 같은 건 보이지도 않았으니까. 듈라한이 떠도 걱정이 안 될 판에 이런 조무래기 소굴에서 그를 걱정하는 건 낭비다.
그녀는 은근슬쩍 시선을 돌려 대열의 후미를 살폈다. 앨리스의 금발을 찾는데 반짝반짝한 다른 금발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미하일이었다.
‘테레사는 왼쪽 협곡인데, 쟤가 왜 여기 있지?’
의아해져서 잠시 살펴보니 미하일은 나름 잘 싸우고 있었다. 그러다가 눈이 딱 마주쳤다. 미하일이 내내 흘깃흘깃 에키를 훔쳐보고 있었던 탓이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미하일은 턱 끝까지 새빨개져서는 확 고개를 돌려버렸다.
‘왜 저래?’
에키는 갸웃거리다가 곧 관심을 끊고 앨리스를 찾았다. 그녀는 마물의 피를 좀 뒤집어쓰긴 했지만 무사했다. 혹시 위태로운 부분이 있을까 걱정되어 몇 차례 더 살폈지만 앨리스는 그녀답게 성실하고 꼼꼼하게 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파티마나 이안은 이쪽이 아니라 테레사 쪽 토벌단에 속해 있어서 보이지 않았다.
에키는 비로소 안심하고 전방을 보았다. 한눈을 파는 동안에도 그녀는 습관적으로 유리엔이 놓친 잡다한 마물을 처리했다. 생각보다 더 무난하니 약간 지루하기까지 했다.
해가 중천에 떠올라 기울기 시작하자 유리엔이 토벌단 전체를 멈춰 세웠다.
“잠시 휴식. 다들 식사를 하도록.”
단원들은 근처의 마물을 싹 처리한 다음 여기저기 걸터앉거나 기대서서 육포와 물로 점심을 때웠다. 에키 역시 육포를 꺼내 우물거리는데, 유리엔의 행동이 눈에 띄었다.
그는 식사를 하지 않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시선을 따라 하늘을 보았다. 안개가 자욱해서 보통 사람이라면 하늘을 볼 수 없겠지만, 유리엔이나 에키나 초인이라 그 정도 안개쯤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늘에는 구름이 몰려들고 있었다. 저녁쯤에 비가 쏟아질 확률이 높아 보였다. 구름이 검고 무거워 보이는 것이 번개까지 칠지도 모르겠다.
‘비, 번개, 밤.’
바라하가 죽었을 때의 상황. 에키의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하늘을 확인한 유리엔이 고개를 내렸다. 그와 그녀의 시선이 마주쳤다.
푸른 눈이 느리게 깜박였다. 그 눈 속에서, 그 행동들에서, 벼락같이 느껴지는 게 있었다. 에키는 그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차렸다. 방금 그들은 같은 것을 보고 같은 생각을 했다. 무슨 명령을 할지도 짐작했다. 깨달아 버렸다.
그가 그녀로부터 시선을 떼더니 단원들을 바라보며 명령했다.
“날이 좋지 않으니, 오후의 토벌은 내일로 미루고 캠프로 돌아간다.”
단장을 신뢰하는 그들은 아무도 이의를 표하지 않았다. 단원들이 주섬주섬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에키는 얼어붙은 채 서 있었다. 그녀의 곁으로 다가온 유리엔이 가볍게 그녀의 어깨를 짚었다.
“에키네시아 생도. 수고했다. 캠프로 돌아가면 푹 쉬도록.”
그 말을 남기고 그의 손은 금방 그녀로부터 떨어졌다. 에키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멀어지는 그를 바라보았다.
‘기억하고, 있어.’
[야, 쟤 아무래도, 확실히…….]
마검이 놀란 듯 중얼거렸다. 에키는 입을 다물고 돌아가는 단원들을 뒤따라 걸음을 옮겼다.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 그가 했던 말들을 모조리 모아보았다. 하얗게 빈 머릿속에 확신이 떠올랐다.
유리엔은 알고 있다. 지워진 과거들을. 지금은 일어나지 않은 일이 된 것들을. 그에게는 회귀 이전의 기억이 있다.
부정하고 싶었던 것이 확신이 되어 들이밀린다. 그녀는 멍한 머리로 생각했다.
‘그럼 왜 나를 증오하지 않지? 왜 나를 죽이려 하지 않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물이 모조리 죽어 악취와 안개만이 남은 길을 되짚어 돌아가며, 그녀는 계속해서 그 생각만을 했다.
그녀가 결코 쥘 수 없었던 랑기오사와, 피에 물든 분수대를 떠올렸다.
그 주위에 널려 있던 시체들과 생명을 잃은 아젠카를 떠올렸다.
그녀로 인해 최악의 단장이자, 창천을 멸망시킨 자로 낙인찍힌 그의 이름을 생각했다.
죽어가던 그의 눈을 생각했다.
만약, 유리엔이 마검에 물들어 로아즈 백작가를 몰살시키고, 부모님과 란셀리드의 시체를 밟고 그녀를 맞이했다면, 에키네시아는 그를 증오했을 것이다.
그의 잘못이 아니란 걸 머리로는 안다 해도 마음이 그를 용서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후 그의 손에 죽었다면, 숨이 완전히 끊어질 때까지 그에게 저주를 퍼부었을지도 모른다.
그래, 그녀는 그런 짓을 했다. 그에게.
심지어 유리엔은 그냥 피해자도 아니었다. 그녀를 믿고 무리를 해가며 마검을 극복하라고 기회를 주었던 사람이다. 그녀를 처리할 수 있는데도 스스로 거부하고 제 터전으로 그녀를 끌어들였다.
‘얼마나, 후회했을까. 얼마나 원망했을까.’
에키는 도저히, 도저히 그가 그녀를 증오하지 않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가장 긍정적으로 생각해서, 그녀에게 약간의 연민을 품었을 수는 있다. 그의 고결한 성품 탓에 그녀를 저주까진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래도,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그 끔찍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그가, 그녀에게 어젯밤 같은 무방비한 미소를 보일 수는 없다. 자신을 죽였던 자 앞에서 그렇게 웃을 수는 없다. 그녀에게 호의를 보일 리가 없다.
“모르는 거야. 그게 아니면 말이 안 돼.”
에키는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말끝이 비명처럼 거칠었다. 혼자서 궁리하고 있던 마검이 잽싸게 그녀의 말을 받았다.
[몰라? 누가 뭘 모른다는 거야?]
“내가…….”
그녀는 뒷말을 하지 않고 삼켰다. 아무리 작은 목소리라도, 근처에 캠프로 돌아가는 단원들이 있는데 발음하고 싶지 않았다. 마검이라는 단어는.
유리엔은 에키네시아 로아즈가 마검의 악마라는 걸 모르고 있는 거다. 아니면 의심은 해도 확신할 수는 없는 상태거나.
그와 처음 재회한 직후에 했었던 추리가 떠올랐다.
‘그에게 기억은 있지만, 증거가 없어서 지켜보기만 하는 상태라면, 나를 언제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마검의 악마로 의심하고 있다면…… 최대한 가까이에 두고 감시하겠지. 확신할 수 있는 증거를 찾을 때까지. 그래, 이것 말고는 설명이 되지 않아.’
그렇게 생각하니 놀랍도록 맞아 들어간다. 그녀에게 대련을 청한 이유도, 호의를 품은 것처럼 행동하는 이유도 알 것 같다.
유리엔은 그녀를 시험하고 있다. 시간이 되돌아간 지금, 누가 시간을 되돌렸는지 알지 못할 그는, 과거에는 없었던 사관생도인 에키네시아에게 회귀 이전의 기억이 있는지 알아 보려 할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에키네시아 로아즈’가 마검의 악마인지를 조심스럽게 탐색하고 있겠지.
그녀가 마검의 악마임을 확신하게 되면, 그는…….
입안이 지독하게 썼다. 마음속에서 무언가 짓이겨지는 기분이 들었다. 에키는 멍하니 앞을 보았다. 캠프로 돌아가는 유리엔의 뒷모습은 하얗고 정갈했다. 그녀는 그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서 눈을 감았다.
* * *
해가 진 이후부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빗방울이 막사의 천을 뚫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거센 폭우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천둥이 울고 번개가 하늘을 가로질렀다.
에키는 막사의 입구에 앉아 천을 살짝 젖히고 밖을 내다보았다. 빗줄기가 내리치는 밖은 새카맣게 어두웠다. 횃불이 비바람을 버티지 못해서 값비싼 마법등 두어 개만이 아슬아슬하게 빛을 뿜고 있었다.
간간이 번개가 칠 때마다 사위가 희게 드러났다가 가라앉았다. 요란한 빗소리에 어지간한 소리는 모조리 묻혔다. 빗소리와 천둥소리만 남은 침묵이었다.
침묵 속의 캠프는 평온했다. 테레사 쪽도, 유리엔 쪽도, 모두 사소한 부상 외에는 중상자조차 없이 귀환했으니까.
에키는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 턱을 괴었다. 그녀의 보라색 눈동자는 미동도 하지 않고 한쪽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는 낮과 똑같은 드레스 차림이었지만 고정된 시선과 고요하게 웅크린 몸 때문에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보였다.
[안 지루해?]
“별로.”
에키는 건성으로 대꾸했다. 그녀는 바라하의 막사 쪽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동시에 있는 대로 감각을 넓혀서 사방을 감지했다. 그 상태를 벌써 세 시간이 넘게 유지하고 있다.
지칠 만도 하지만 놀랍도록 정신이 명료했다. 그녀는 유리엔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 이 일에 더욱 집중하고 있었다. 머리를 깨끗이 비우고 오직 사방의 위험만을 탐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