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30화
“그대가 생도 선발 시험을 치를 때 직접 보았다. 그리고, 순위전의 결과도 안다. 그대는 탁월해.”
애매하다. 탄신 연회 이야기처럼. 기억이 있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기억이 없다고 가정해도 그의 이상한 행동들마다 납득이 갈 만한 이유가 있다.
아니면, 그녀가 그에게 기억이 없길 바라서, 그쪽에 더 가능성을 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저도 모르게 필사적으로 그에게 기억이 없다는 증거를 찾고 있는지도.
정말로 모르겠다. 혼란스러웠다. 에키는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높게 평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도, 주의해 다오. 마물은 인간과 다르니.”
“예, 주의하겠습니다.”
그녀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그가 빤히 그녀를 보더니 뒤로 물러났다.
“그럼, 돌아가서 편히 쉬도록.”
“그런데, 단장님.”
물러나던 그가 멈춰 서서 말하라는 듯 눈길을 주었다. 에키는 망설이며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결국 질문을 던졌다.
“왜 막사에 돌아오셨으면서 불을 켜지도 않고 계셨던 건가요?”
“…….”
“혹시 제가 주무시려던 것을 방해했나요?”
“……잠을 자려던 것은 아니었으니, 그대는 개의치 않아도 된다.”
묘한 얼굴로 대답한 그가 완전히 돌아섰다. 이만 가보라는 뜻이었다. 에키는 머뭇거리다가 그의 등에 대고 인사를 한 다음 막사를 나왔다.
그녀는 제 막사로 돌아오자마자 그대로 쓰러지듯 간이침대에 누웠다. 등불 빛이 일렁여 막사의 천장에 이상한 그림자를 그려냈다. 제멋대로 흔들리는 그것들은 무엇에 의해 만들어진 그림자인지 알기 어려울 정도로 모호했다.
유리엔이 보이는 모호한 태도는 무엇에 의해 만들어진 그림자일까.
머리가 복잡해서 눈을 감아 버리는데 눈치를 보느라 입을 다물고 있던 마검이 종알종알 떠들었다.
[너한테 마물 조심하라고 하다니, 너보다 약한 게. 네가 결절 하나를 혼자서 완전히 쓸어버린 적도 있는 걸 알면 기겁하겠지? 쟤 참 같잖다. 그치?]
“유리엔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지 마. 아니, 넌 아예 그 사람 이름도 입에 담지 마.”
[맞는 말인데 왜! 치사한 인간!]
“닥쳐, 발.”
[주인은 나보고 맨날 닥치라고만 해. 서럽다.]
“네놈이 맨날 사람 죽이자고 칭얼거리는 거 그만두면, 나도 좀 더 다정해지겠지.”
[……야, 네가 나한테 다정하게 굴면 그게 더 이상할 거 같아. 그냥 이대로 지내자.]
“……변태 자식.”
그녀의 핀잔에 마검이 궁시렁거렸다. 에키는 누운 채로 꾸물꾸물 움직이며 옷을 벗어 던졌다. 화장 지우기가 굉장히 귀찮았다. 왜 마법사들은 화장을 지우는 마법도구 같은 건 발명하지 않는 걸까. 마나전보보다 그게 더 잘 벌릴지도 모르는데.
그녀는 비척비척 일어나 화장을 지웠다. 잠옷을 걸치고, 장갑을 민무늬의 실크로 바꿔 낀 다음 다시 간이 침대에 누웠다. 그녀는 잠들기 전에 지나가듯 마검에게 물었다.
“살의 쌓인 거, 마물로는 안 풀리겠지?”
[아무것도 안 죽이는 것보다야 훨씬 낫겠지만……. 알잖아? 나를 이루는 살의는 근본적으로 인간이 인간에 대해 품은 감정이야. 내 껍데기가 널 조종할 때도 그래서 인간만 찾아다녔지. 잘 알면서 왜 물어?]
“그냥.”
[깔끔하게 이안 죽이자니까, 응? 죽어 마땅한 놈이잖아! 그냥 슥! 해 버리자고, 쉽잖아! 일단 죽이고 나면 너도 후련할 걸?]
“됐으니 잠이나 자.”
[쳇.]
에키는 눈을 감았다. 전처럼 선명한 꿈을 꿀까 걱정했으나, 그 밤의 꿈은 무척 흐렸다. 화려한 색이 가득한 연회장에서 누군가와 춤을 추는 꿈이었다.
이루어진 적 없으나 이루어지길 바랐던 소망은 이성이 잠들어버린 꿈 속에서만 몰래 피었다.
* * *
흰 까마귀 협곡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협곡의 입구로 들어가기 전부터 음산한 기운이 퍼져 나왔다. 안쪽에서는 쇠를 긁는 듯한 소리와 짐승의 울부짖음이 뒤섞인 괴성이 간간이 들려왔다. 낮인데도 안개가 자욱했다. 악취가 안개와 함께 흘렀다.
“전쟁이 꽤 험했나 봐요.”
“끓는 기름을 부었다더라고. 많은 수가 고통스럽게 죽었으니 마물이 창궐할 법하지. 구울이랑 스켈레톤이 많을 것 같은데. 레드캡도 나오려나?”
에키의 말에 바라하가 답했다. 그들은 곧 협곡 입구에 멈춰 섰다. 바라하가 에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잘 다녀와라. 단장님 곁에서 떨어지지 말고.”
“네, 선배님.”
토벌단은 반으로 나뉘어 오른쪽은 단장 유리엔이, 왼쪽은 기오사 오너 테레사가 맡았다. 부단장 바론은 소수의 준기사들과 함께 캠프를 지키기 위해 남았다. 그로 인해 그의 스콰이어인 바라하도 막사에 남게 되었다.
‘괜찮겠지……?’
원래대로면, 이번 마물 토벌에서 바라하는 죽는다. 하지만 에키로서는 그가 정확히 어떤 사건으로 인해 죽었던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가 아는 건 그 일이 비가 쏟아지고 번개가 치는 밤에 벌어졌다는 사실 뿐이다.
일단 밤이 되기 전엔 캠프로 돌아올 테니, 괜찮을 거다. 에키는 바라하에게 인사를 하고 오른쪽의 기사들이 몰려 있는 곳에 합류했다.
그녀는 검은 드레스에 챙이 넓고 깃털 장식이 달린 모자를 쓰고 있었다. 장례식용 검은색은 아니고, 보랏빛이 약간 도는 매끄러운 재질이었다. 일부러 마물의 피 같은 게 좀 튀더라도 티가 나지 않을 드레스로 골랐다.
일정이 길지 않을 예정이라 짐은 약간의 육포와 물, 잡다한 도구가 든 작은 가방 하나뿐이었다. 보통 허리띠에 다는 것이지만 드레스 위에 그렇게 달았다간 꼴이 우스워질 터였다. 그래서 에키는 패티코트 아래, 허벅지쯤에 띠를 둘러 가방을 달았다.
반대쪽 다리에는 보조용 단검을 찼다. 양쪽 다리의 무게가 많이 다르므로 균형을 잡기 어려운 게 정상이었으나, 그녀는 그런 사소한 것에 구애될 수준은 한참 지나 있어서 불편하지 않았다.
그 상태로 검은 그냥 손에 들고 있으니, 장식 삼아 검을 들고 놀러 나온 귀족영애처럼 보였다. 장식이라기엔 검이 너무 싸구려이긴 했지만. 에키는 들러붙는 시선을 무시하고 앞으로 향했다.
행렬의 가장 앞에서 유리엔이 다른 기사들과 함께 무언가 의논하고 있었다. 에키는 약간 떨어진 곳에 서서 기다렸다.
논의가 끝난 유리엔이 돌아섰고, 기사들은 흩어져 행렬로 돌아갔다. 준기사나 생도들의 떨떠름한 시선과 달리 기사들은 에키의 차림새에 관심이 없거나 재미있다는 듯 웃기만 했다.
유리엔은 그녀의 옷차림이 아니라 얼굴에 시선을 두었다. 그가 그녀를 스쳐가며 속삭였다.
“멀어지지 말도록.”
대답을 원하는 말은 아니었다. 그녀를 지나친 유리엔이 기사, 준기사, 생도들이 정렬해 있는 앞에 섰다. 푸른 눈이 조용히 그들 사이를 훑었다. 작게 오가던 소란함이 그 시선에 사그라들었다. 유리엔이 입을 열었다.
“협곡 내부의 마물은 구울과 스켈레톤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레드캡이 출현할 수도 있으니 발아래를 항상 주의해서 살펴라. 또한, 듈라한을 목격할 경우 준기사와 생도들은 상대하지 말고 직속 기사에게 보고하라. 지급한 은가루가 떨어질 경우 직속 기사의 임시 스콰이어에게 보급을 받고, 부상자가 발생할 경우 직속 기사에게 보고한 후 캠프로 빠지도록 한다. 사망자는 내지 않는다. 이상, 질문 있나?”
그의 목소리는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마나가 담겨서 행렬의 끝까지 울려 퍼졌다. 딱딱하고 서늘한 음성이었다. 잘 벼린 칼날 같은 분위기.
목소리를 높이지 않아도 기사들은 하나같이 그에게 집중했다. 존경, 경애, 복종, 기대, 그런 것들이 그들 사이에 흘렀다. 유리엔은 건조하게 그런 시선들을 받아넘겼다.
에키는 유리엔의 뒤에 선 채 낯선 것을 보듯 그를 보았다. 그러고 보니 원래 그녀가 알던 그는, 마검의 악마를 토벌하러 왔던 창천기사단장은 이런 분위기였었다. 그때 그녀는 다가오는 그를 보며 서늘한 칼날이 겨누어지는 감각을 느꼈으니까. 어제처럼 무방비한 미소를 짓는 남자가 아니라.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거나 질문하지 않자, 유리엔이 오른손을 뻗었다. 손바닥에 황금빛 무늬가 있었다. 성검의 문양. 그 위로 새하얀 검이 솟아났다.
은은한 황금빛 문양에 휘감긴, 자루와 칼날이 하나의 금속으로 이루어진 순백의 검. 그 옛날 대장장이가 인간의 정의를 재료삼아 칼날을 만들고, 인간의 사명감으로 문양을 박아 넣어 만들어낸 검. 성검(聖劍) 랑기오사.
유리엔이 그 검을 쥐었다. 그는 구호를 외치거나 기합을 지르지는 않았다. 성검을 쥔 기사단장은 앞서 걸으며 조용히 명했다.
“지금부터 흰 까마귀 협곡 토벌을 시작한다.”
귀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모든 이들의 귓가에 그 명령이 들렸다. 둘로 나뉜 창천기사단은 협곡의 양측으로 쏟아져 들어가기 시작했다.
안개를 헤치고 들어가자마자 악취가 콧속으로 밀려들었다. 안개 안쪽의 세상에서는 썩어가는 시체가 일어나 걸으며, 살점이 붙은 더러운 백골들이 떠돌았다. 구울과 스켈레톤이라 불리는 마물들. 그것들은 산 자의 냄새를 맡자마자 괴성을 내지르며 몰려왔다.
여기저기서 마나로 덮인 검이 허공을 갈랐다. 마스터인 기사가 훑고 지나가면 그 아래에 소속된 준기사들이 숨통을 끊었고, 생도가 뒤쫓아 마무리를 했다. 그것이 기사 한 명을 중심으로 구성된 창천기사단의 기본 부대였다.
구울과 스켈레톤의 수는 엄청났지만, 마스터의 앞에서 그것들은 걸어다니는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전진은 안정적이었고 어디에도 위기는 보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토벌’이었다.
잿빛의 물결이 기사들에게 지워져 갔다. 창천기사단이 왜 최강의 기사단이라 불리는지 증명하는 풍경이었다.
그중에서도 유리엔은 단연 눈에 띄었다. 유리엔에게는 후속 부대가 없었다. 있을 필요가 없었으므로. 군대의 장군은 경호받는 지휘관이지만, 창천의 기사단장은 지휘관이 아니라 1인 부대였다.
하얀 성검 위로 백색 마나가 어렸다. 검이 움직이는 궤적을 따라 달무리처럼 하얗게 마나가 남았다. 보기에는 몹시 아름다웠으나 그 결과물은 파괴적이었다. 흰 마나에 닿은 마물들은 거의 가루가 되다시피 했다.
‘마나의 증폭과 파마(破魔), 악한 것을 상대할 때 보다 강력해지는 힘.’
에키는 유리엔의 뒤를 따르며 성의 능력을 떠올렸다. 랑기오사는 에키가 오너의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해서 사용하지 못했던 기오사 중 하나였다. 그래도 유명한 검이라 능력은 알고 있었다.
에키가 랑기오사의 주인이 될 수 없었던 건 당연했다. 성검은 악행을 저지른 적이 있는 자에게는 제 몸을 내주지 않는다. 그때의 에키네시아는 학살자였으므로, 그녀는 랑기오사를 쥘 수조차 없었다.
오너가 되면 새겨지는 문양을 통해 기오사를 보관하고 불러낼 수 있지만, 오너의 조건을 채우지 못한 기오사는 직접 들고 다녀야 했다.
희고 아름다우나 쓸 수 없는 검. 그녀를 믿어준 유일한 사람이자, 그녀의 손에 죽은 유리엔의 검. 자신을 절대로 주인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그 성검을 가지고 다니며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던가.
‘닿을 수 없는 사람인 거지. 결코 내게 자신을 허락하지 않던 랑기오사처럼.’
에키는 쓴웃음을 띤 채 유리엔의 뒤를 따랐다. 후속 부대가 없는 그의 뒤에 있는 건 그녀 혼자였다. 유리엔이 워낙 압도적으로 휩쓸고 있기에, 그의 뒤에 있는 그녀는 한가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한가하다는 건 그녀의 기준이었다. 최전방에서 치고 나가는 기사단장을 뒤쫓는 창천의 단원들은 대부분 기사단장이 아니라 에키를 보고 있었다. 기사단장은 자주 보았지만, 에키네시아는 오늘 처음 보았으니까. 그리고 그들은 하나같이 비슷한 생각을 떠올렸다.
‘괴물이 자기 같은 괴물을 찾아내서 스콰이어로 삼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