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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든 꽃-29화 (29/211)

검을 든 꽃 29화

사실 별로 안 궁금했다. 에키는 예의상 의아한 표정을 지어주었다. 그녀의 평판을 챙겨주려는 게 고맙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그를 죽인 기억으로 인한 마음의 빚이 있으니까.

“내가 천재들을 좀 아는데. 대표적으로 지금은 구름 위에 계신 우리 단장님. 사관학교 시절엔 룸메이트였거든.”

바라하는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지 않고 고심하는 낯으로 침묵하고 있었다. 잠깐 그를 돌아본 디트리히가 턱을 문지르더니 픽 웃었다.

“쟤도 천재지. 어쨌든 그렇게 천재들을 지켜보니까 공통점이 있더라고.”

“뭔가요?”

“천재들은 다 또라이야. 그리고 저마다의 방법으로 그 또라이스러움을 드러내지. 나 같은 범재는 이해하기 어려운 세계니, 그러려니 하는 수밖에. 네 옷차림처럼 말이야.”

“……그거, 저도 천재라는 칭찬인가요?”

“어, 잘 알아듣네. 넌 훌륭한 또라이야.”

디트리히가 유쾌하게 웃더니 에키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칭찬인지 욕인지. 에키가 미묘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리자 그가 윙크를 했다.

“뭐, 또라이스럽다는 거랑은 별개로, 어쨌든 너 드레스 잘 어울린다고. 그 말을 하려던 거였어. 예뻐서 맘에 들어. 그러니까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 에키네시아 생도.”

[쟤가 곧 레밍기오사 주인 될 놈이지? 레밍기오사 녀석 취향 독특하네.]

‘……이 사람, 이런 성격이었어……?’

처절한 모습만 기억에 뚜렷해서 몰랐다. 에키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고 대꾸했다.

“……디트리히 경도 꽤나 천재이신 것 같아요.”

“그거 욕이지? 야, 너 응용력이 꽤 좋다? 그래도 천재라니까 고맙네.”

디트리히가 킬킬거리더니 여전히 심각한 표정인 바라하의 뒤통수를 가볍게 때렸다.

“윽, 디트리히 경! 뭐 하는 짓입니까!”

“잘해보라고 응원하는 짓. 잘해라. 그럼 난 간다.”

한바탕 그들을 휘저어놓은 디트리히는 그대로 자리를 떴다. 바라하는 뒤통수를 문지르며 한숨을 쉬었다. 디트리히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자 그가 에키를 돌아보았다. 그러더니 머리를 숙였다.

“미안.”

“사과할 만한 일은 안 하셨는데요, 선배님.”

“도와주려는 거였는데, 내 생각이 짧았다. 네 평판이 어떻게 될지를 생각하지 못했군.”

“괜찮아요, 그런 건.”

에키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바라하는 그녀가 ‘레이디’라서 도운 게 아니라 자신이 가르치고 있는 스콰이어 후배라서 도와주려 한 것뿐이다. 그 진심을 알기에 싫지 않았다. 그녀의 미소를 본 바라하가 짓궂게 웃으며 팔짱을 꼈다.

“그럼, 계속 도와준다?”

“아뇨, 그건 아니고요.”

에키가 망설임 없이 거절했다. 소문에 상관하지 않는 것과 별개로, 일부러 안 좋은 소문을 늘릴 필요는 없었다. 특히 타인과 얽힐 경우에는. 바라하가 큭큭거리더니 옆쪽을 가리켰다.

“나하고 부단장님 막사는 저기에 설치할 거야. 잘 안 되면 물어보러 와.”

“네, 감사합니다.”

“그럼, 수고해라.”

바라하까지 떠나고 나자 에키는 혼자 남았다. 그녀는 유리엔과 자신의 막사를 마무리했다. 수습기간 때 바라하에게 배운 게 있어서 서툴긴 해도 어렵진 않았다. 슬쩍슬쩍 마나를 써주면 힘이 부족할 일도 없고.

막사 설치를 끝낸 다음 그녀의 막사에 짐을 풀어놓고 나니 시간이 한밤중이었다. 옷가지와 장신구가 많아서 시간이 꽤 걸렸다.

에키는 마지막으로 잘 접힌 망토를 가방에서 꺼냈다. 별 특징이나 무늬가 없는 검푸른 색의 남성용 망토. 분수대 앞에서 유리엔이 그녀에게 덮어주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것을 무릎에 올려놓고 매만졌다. 간질간질한 감각이 어깨를 맴돌았다.

[그거 유리엔 거지?]

“응. 돌려줘야 하는데…….”

이걸 돌려주기 위해 그를 불러내 따로 만날 엄두가 나지 않아 여태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망토를 쥐고 막사 입구의 천을 살짝 젖혔다. 바로 옆에 있는 유리엔의 막사에는 불빛이 없었다. 도착하자마자 협곡 안쪽으로 이동해서 회의를 시작하더니 아직도 회의가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막사에 가져다 둬야겠다. 그가 오기 전에.’

이제부터 계속 가까이에 있게 되겠지만 그래도, 마주치는 일은 최대한 줄이고 싶었다. 그녀는 주위를 다시 한 번 살핀 다음 빠르게 그의 막사로 들어갔다.

5월이라 해도 북부라 날씨가 추운 탓에 막사의 천은 빛 한 점 새어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두꺼웠다. 흐린 달빛 정도만 있어도 훤히 볼 수 있는 에키로서도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앞이 보이지 않아도 알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가깝고 좁은 공간에서 사람의 존재를 모를 만큼 그녀의 감각은 둔하지 않았다.

막사 안에, 유리엔이 있었다.

불이 꺼져 있어 밖만 살피느라 미처 몰랐다. 바라하가 주도하긴 했지만 막사를 설치한 게 그녀 자신이라 안에는 신경을 덜 쓴 탓도 있었다. 게다가 유리엔 정도의 기사가 움직이지 않고 조용히 있으면 기척을 알아차리기 어려웠다.

다 변명이다. 그녀는 방심했다. 들어오기 전에 안의 기척부터 확인할 것을.

에키는 막사의 입구에 우뚝 멈춰 섰다. 조심스럽게 들어오긴 했어도, 그녀가 들어온 걸 그가 모를 리가 없다. 그럼에도 안쪽에서는 한동안 움직임도 소리도 없었다.

그냥, 망토를 돌려주러 온 것뿐이라고 말을 하면 되는데. 보이지 않는 어둠 너머에 유리엔이 있다고 생각하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에키는 망토를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를 앞에 두면 왜 이렇게 머리가 하얗게 비어버리는지.

극도로 초조한 시간이 흐르다가, 조용히 움직이는 기척이 났다. 유리엔이 등불에 불을 붙였다. 어른거리는 주홍색 불빛이 확 타오르며 막사 내부를 채웠다.

“에키네시아 생도.”

그녀를 불러놓고서 유리엔은 뒷말을 바로 잇지 않았다. 망설이는 느낌. 시선이 그녀를 비껴나서 허공에 잠시 머물다가, 천천히 그녀에게로 돌아왔다. 등불의 빛이 그의 잠잠한 눈 안에서 불꽃처럼 일렁거렸다.

“……무슨 일로 왔지?”

평소보다 묘하게 낮은 목소리였다. 에키는 주박에서 풀려난 것처럼 숨을 들이쉬고, 망토를 내밀었다.

“이걸, 돌려 드리려고…… 왔습니다. 늦게 드려서 죄송해요.”

유리엔은 말없이 그녀가 내민 것을 쳐다보았다. 등불 곁에 서 있던 그가 그녀에게로 다가온다. 다가오는 걸음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유리엔이 그녀의 손에서 망토를 받아 들었다. 가져가면서 손끝이 스쳤다. 장갑 너머로 살짝 스치기만 했는데도 그 감각이 뚜렷했다.

그는 접힌 망토를 들고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기에 에키는 차츰 진정할 수 있었다. 긴장이 모래처럼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녀는 유리엔을 살펴보았다. 주홍빛에 가까운 등불의 빛에 물든 그는 평소보다 조금 더 열기를 띤 것처럼 보였다.

내리깐 속눈썹이 깜박일 때마다 나비 날개처럼 떨리고, 그 아래의 푸른 눈이 파도가 치는 바다처럼 일렁거린다. 뭔가 말하고 싶은 듯 입술이 달싹였다가, 참고 삼키듯 다물리길 반복했다.

그 모든 신호가 의미하는 건 분명했다. 긴장하고 있다, 그가.

‘……왜?’

무언가 맥이 탁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까지 그 앞에서 그녀는 침착했던 적이 없다. 그러나 지금 처음으로, 마음이 차분해졌다.

비로소 보인다. 그가 그녀 앞에서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가. 몰랐던 게 이상할 정도로 그는 신중했다.

그녀가 그의 앞에 서면 바늘 끝처럼 예민해지듯, 그 역시 그녀 앞에 있으면 신기루를 더듬는 것처럼 조심스러웠다.

체감은 무척 길었으나 실제로는 얼마 되지 않는 정적이었다. 유리엔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저 이걸, 돌려주러 온 것뿐인가?”

“……네.”

다른 이유가 있어야 했나? 그가 무슨 생각으로 저런 말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에키는 머뭇거리다가 말을 덧붙였다.

“아, 저번에 약과 생강차……. 감사했습니다.”

“……그것들이 그대에게 도움이 되었나?”

“네. 무척이나.”

그 대답에 유리엔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를 눈에 담더니, 환하게, 그녀가 움찔 놀랄 정도로 밝게 웃었다.

눈매와 입매가 어찌나 무르게 풀어지는지 가슴께가 덜걱거렸다. 사람이 저렇게 무방비하게 웃을 수도 있나.

그 웃음의 대상이 자신이 아니었다면 그가 사랑에 빠진 줄로만 알았을 것이다.

조금 더 마주하고 있다가는 착각할지도 모르겠다. 그가 지워진 과거를, 자신이 저지른 짓들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아니었다면, 이 순간 자신은 착각에 빠져버렸을 것이다.

에키는 급하게 그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실례했습니다, 단장님.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에키네시아 생도, 잠시.”

유리엔이 돌아서는 그녀를 급히 불렀다. 에키는 막사 입구의 천을 쥔 채 멈췄다. 어깨를 잡을 듯 다가왔던 손이 닿지 않고 내려가는 것을, 예민한 그녀의 감각이 생생하게 느꼈다. 그가 조용히 물었다.

“……그대는 마물을 겪어본 적이 있는가?”

어쩐지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마검에 휘둘리던 시절에는 에키네시아가 지나간 폐허마다 마물들이 생겨나곤 했다. 하지만 마검은 인간을 죽이는 게 목적이었으므로 마물을 따로 상대하진 않았다.

에키가 마물에 익숙해진 건 마검을 극복하고 나서 기오사를 모으던 시절의 경험들 덕분이었다. 특히 어느 기오사 하나가 ‘결절’에 빨려 들어가는 바람에 마물의 피로 목욕을 할 정도로 개고생을 했었다.

물론, 귀족영애 ‘에키네시아 로아즈’로서는 겪어본 적이 없는 일이다.

“본 적이 없지는 않아요.”

에키는 두루뭉술하게 답했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약한 한숨. 그가 나직하게 말했다.

“마물은 특이한 생태를 가진 것들이 많다. 인간을 상대할 때와는 많은 것이 달라. 그에 대해 배운 바가 있는가?”

“……어느 정도는요.”

“그렇다면, 다행이겠지만…….”

또다시 주저하는 기색.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궁금하지만 돌아보기가 무서웠다. 아까 같은 표정을 또 보았다간 옛날에 부서졌던 감정이 되살아날지도 모른다.

그건 제 손으로 죽이고 파멸시켰던 그에 대한 모욕이었다. 염치라는 게 있으면 그래서는 안 된다. 에키는 입 안쪽 살을 지그시 깨물었다.

“에키네시아 생도. 내일 오전부터 토벌단을 둘로 나누어 흰 까마귀 협곡의 양쪽 위를 훑을 예정이다. 중앙은 마물의 수가 많으니 양쪽을 정리하고 하루쯤 휴식을 취한 후에, 생도들은 제외하고 기오사 오너들이 선두에 서서 뚫을 것이다. 스콰이어들은 제외되지 않는다. 그러니 그대도 중앙을 토벌할 때 참가하게 된다.”

유리엔이 딱딱한 말투로 빠르게 옮었다. 그는 한 차례 숨을 깊게 들이쉬더니 이어 말했다.

“그대의 검을 의심하지는 않지만…… 마물이란 예측하기 어려운 생물이니, 내 곁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주의해 주었으면 한다.”

“제 검을 의심하지 않으신다고요? 제가 검을 쓰는 것을 보신 적이 있나요?”

그의 조심스러운 걱정보다 이 점이 신경이 쓰였다. 회귀 이후 그가 그녀의 검을 본 적이 있던가? 볼 기회가 없었을 텐데? 그래서 대련을 청했던 것이 아니었나? 어떻게 믿는다고 말할 수 있지?

에키는 결국 뒤로 돌아 그를 응시했다. 유리엔은 짧은 침묵 후에 선선히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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