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28화
그로부터 5일 후, 사관학교 본관 게시판에는 마물 토벌 공고가 붙었다. 올해의 토벌 대상 지역은 대륙 북부에 있는 흰 까마귀 협곡이었다.
창천기사단은 의뢰가 들어올 경우에 마물을 토벌하러 움직인다. 의뢰 내용과 마물의 규모에 따라 기오사 오너나 정식 기사, 준기사, 임시 스콰이어를 해줄 생도들을 뽑아 묶어서 파견하는 식이다.
그러나 창천은 매년 봄마다 의뢰와는 별개로 유난히 마물이 창궐하는 지역, 특히 타국에서 처리하기 어려워하는 지역을 선정해 토벌하곤 했다.
기오사를 수호하는 집단이자 신검을 모시던 사도들의 후예로서 행하는 의무였으나, 나름 실익도 꽤 있었다. 창천기사단이 얼마나 강한지 선전이 되기 때문이다.
마물은 자연적으로 발생하여 번식으로 증가한다. 발생 과정에 대한 논의가 분분했지만, 그런 학문적인 논의는 마탑의 머리 흰 현자들이 할 일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꺼림칙하거나 흉한 일이 발생하고 나면 그 근처에서 마물이 늘어난다는 것만 알았다.
일단 마물이 생겨나면 보통 동물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속도로 번식하며 개체수가 급증했다. 마물의 종류에 따라 생태는 달랐지만, 대부분의 경우 군락을 이루며 주위 인간들을 습격했다.
흰 까마귀 협곡은 작년 여름쯤 전쟁터가 된 곳이었다. 북부 소왕국들의 국경선 근처에 있는 그 협곡은 매복 작전에 이용되어 많은 병사들의 무덤이 되었다.
사람이 많이 죽은 전쟁터는 얼마 지나지 않아 대규모 마물의 소굴이 된다. 흰 까마귀 협곡도 예외는 아니었다.
기사단장을 포함한 기오사 오너 셋, 전원이 마스터인 정식 기사 20여 명, 준기사 70여 명, 스콰이어 여덟 명, 임시 스콰이어로 동행하는 사관생도 상위 30명, 신입생 상위 세 명. 절대적인 숫자는 군대에 비해 적어도 무력의 규모를 따지면 작은 나라 하나쯤은 상대할 수준의 인원이 이번 토벌에 동원될 예정이었다.
“평소보다 규모가 큰데?”
“흰 까마귀 협곡 상태가 많이 안 좋나 보지.”
“부단장님이 동원 규모를 늘렸다고 하시더라. 단장님 지시라는 소문이 있던데.”
“규모는 늘렸는데 왜 사관생도 수는 작년이랑 똑같냐?”
“위험하니까 그렇지. 생도들이 많으면 보호할 인원도 늘어나잖아.”
“인원 보니까 올해는 노가다 겁나 하겠네. 생도 한 명당 보조해야 할 준기사가 몇 명이냐, 이거.”
“그래서 가기 싫어? 싫으면 너 대신 내가 간다.”
“미쳤어? 이런 좋은 기회를 빠지게.”
게시판 앞에서 생도들이 모여 웅성거렸다. 공용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나오던 에키도 그것을 보았다. 공고문 하단에 신입생 세 명의 이름이 선명했다.
에키네시아 로아즈, 앨리스 윈터벨, 미하일 폰 프랑 알마리.
신입생 순위전에서 1, 2, 3위를 했던 생도 중에 순위를 유지한 건 에키네시아 혼자였다. 에키는 함께 식사를 한 앨리스를 의문스럽게 올려다보았다.
“……순위 신경 안 쓰고 당분간 검을 다듬는 데 집중할 거라면서요, 앨리스?”
“2위였던 생도와 이틀 전에 결투를 했었습니다. 실전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거든요.”
앨리스가 태연히 대꾸했다. 에키는 헛웃음을 흘렸다. 사실 그녀는 앨리스가 토벌에 참여하지 않기를 바랐다. 이번 마물 토벌은 꽤나 위험할 테니까. 그녀는 공고문에서 아는 이름들을 확인했다.
‘스콰이어 바라하 이슬라프. 역시 참여하네. 아, 파티마 선배님도 있구나. 그리고 별로 안 반가운 이름도 있고.’
이안 펠레트로도 목록에 이름이 올라가 있었다. 브레드 폰 포움은 없었다. 2, 3학년 중에서 상위 30명만 참가하니 실력이 모자란 그는 없는 게 당연했다. 에키는 가라앉은 눈으로 아는 이름들을 들여다보았다.
[주인아, 마물 토벌 중에 슬쩍 이안 죽이자. 정신없을 테니까 들키지도 않을 거고, 피 맛도 보고, 성가신 것도 치우고, 살의도 좀 해소하고, 어때? 좋은 아이디어지?]
마검이 속살거렸다. 에키는 그 말을 무시했다. 아무리 쓰레기라도 당장 죄를 지은 것도 아닌 자를 화풀이로 죽일 생각은 없었다. 한 번 그러기 시작하면 또 마검에 물들어 버릴지도 모른다. 그녀는 웬만하면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았다.
‘그보다……. 지켜봐야지.’
바라하 이슬라프를 포함한 그녀가 아는 사람들을 지켜볼 것이다. 누구도 죽거나 다치지 않도록.
그리고 또, 기오사 오너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지켜봐야 했다.
‘디트리히 사루아는 아직 준기사였지. 3년 안에 기오사 오너가 되겠지만, 지금은 기오사 오너가 아니야.’
붉은 머리의 남자에게는 기오사가 없었다. 그럼 남은 기오사 오너는 세 명.
‘바론 틸리어스, 테레사 폰 프랑 알마리. 그리고…… 유리엔.’
셋 중 지워진 과거를 기억하는 자가 있는지, 이번 마물 토벌 때 알아낼 수 있기를. 그리고 유리엔은…… 제발 기억하고 있지 않기를.
에키는 그렇게 기원하며 공고문 앞을 떠났다.
출발은 5월 10일, 앞으로 9일 후였다.
4막. 이해할 수 없는 것과 확실한 것
신력 1629년 5월 10일, 창천기사단은 북부 흰 까마귀 협곡에 마물토벌단을 파견했다.
협곡 근처까지는 마나 열차로 이동했다. 창천은 열차 하나를 아예 통째로 세를 내었다. 가장 가까운 역에 도착한 다음에는 말과 마차를 이용하여 협곡으로 향했다.
토벌단이 흰 까마귀 협곡 입구에 도착하여 베이스캠프가 될 막사를 치기 시작한 건 출발한 지 이틀이 지난 5월 12일, 늦은 저녁이었다.
스콰이어를 제외한 모든 사관생도에게는 각자 보조해야 할 기사들이 배정되었다. 신입생인 앨리스와 미하일은 준기사 세 명씩을 담당했다. 그리고 에키네시아의 담당은 딱 한 명이었다. 유리엔 드 하르덴 키리에.
“어차피 네 수습기간도 8일밖에 남지 않았으니 말이야. 당연한 일이지.”
바라하가 다가오더니 에키의 손에 들려 있던 가방을 빼앗아 들었다.
“안 들어주셔도 괜찮아요.”
“뭐 어때, 같은 방향이잖아? 신입생 순위전 얘기는 많이 들었어. 못 봐서 아쉽군.”
그가 앞서 걷기 시작했다. 에키는 별 수 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앨리스를 포함한 사관생도들은 준 기사들 막사 근처에 쳐진 생도용 막사를 배정받았다. 그에 비해 스콰이어들은 각자의 로드 바로 옆에 개인용 막사를 배정받는다.
에키 역시 기사단장의 막사 옆에 개인 막사가 주어졌다. 그녀는 아직 정식 스콰이어가 아니었지만 이미 정식 스콰이어로 취급되고 있었다.
토벌단에는 따로 하인이 따라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막사를 설치하는 건 스콰이어의 일이었다. 준기사들은 생도들과 함께 캠프를 만들고, 기사들은 도착하자마자 따로 모여 회의를 했다.
이미 해가 진 터라 횃불의 빛에 의지하여 다들 바쁘게 막사를 세웠다. 에키와 바라하는 그들 사이를 가로질러 갔다.
오늘 에키네시아는 짙은 남색에 프릴만 가미된, 원피스에 가까운 단순한 여행용 드레스 차림이었다. 머리에는 짧은 망사와 보석이 달린 남색 벨벳 모자를 썼다. 장갑도 수가 놓아져 있고 얇긴 해도 실크가 아닌 가죽이었다.
평소에 비하면 수수한 차림이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몹시 눈에 띄었다. 몇몇 준기사는 그녀가 지나가자 휘익 휘파람을 불었다.
“저 아가씨는 누구야? 바라하 애인?”
“사관학교의 ‘레이디’잖아. 소문 못 들었냐?”
“아, 그 단장님의 스콰이어로 지명된 애? 설마 했는데 진짜 아가씨네, 아가씨.”
“실력은 좋다던데, 실전은 다르지. 저래서야 마물 보면 기절하는 거 아니냐?”
그녀의 뒤로 수군거림이 꼬리처럼 달라붙었다. 에키는 그런 말들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녀가 신경 쓰는 건 훨씬 중요하고 위험한 문제였다.
이동할 때는 생도들과 함께여서 기오사 오너들과 마주칠 일이 없었지만, 이제부터는 그들과 계속 마주치게 될 터였다.
긴장이 되었다. 화장에 힘을 주고 망사가 달린 모자를 골라 쓰긴 했지만 여전히 불안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모자 끝을 꾸욱 눌렀다.
준기사들을 지나쳐 기사들의 막사가 세워지고 있는 곳, 그중에서도 중앙에 도착한 바라하가 에키의 가방을 내려놓았다. 그 자리에는 이미 짐들이 쌓여 있었다.
“네 막사는 여기. 단장님의 막사는 이 자리에 설치하면 돼. 내가 도와주지.”
“아뇨, 제가 할 수 있어요. 선배님도 막사를 설치하셔야 하잖아요.”
“난 30분이면 돼.”
“전 정말 괜찮습니다, 선배님.”
“됐어, 금방 끝내줄 테니까.”
바라하가 어깨를 으쓱이더니 막사의 중심 기둥을 들어올렸다. 그는 그녀가 말릴 틈도 없이 기사단장의 막사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근처에서 막사를 설치하고 있는 준기사와 생도들이 그 모습을 보며 수군거리는 게 예민한 에키의 청각에 걸려들었다.
레이디답네. 험한 일은 하기 싫은가 보지. 은근슬쩍 남에게 시키는 걸 봐. 레이디잖아. 레이디, 레이디. 비꼬는 말들.
이런 소리가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그다지 달가운 도움은 아니었지만 바라하 입장에선 순수한 호의라는 걸 알기에 거절하기도 어려웠다.
뭐, 언제는 평판에 신경을 썼던가. 에키는 보이지 않게 한숨을 쉬고는 그를 도와 천막을 꺼냈다.
터를 고르고, 기둥을 세우고, 카펫을 깔고, 천막을 덮고, 간이침대와 가구를 배치했다. 순식간에 그럴듯한 막사가 완성되었다. 바라하가 몹시 능숙한 덕이었다.
그와 함께 이번에는 에키의 막사를 설치하는데, 능청스러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이야, 전장에서 불타는 사랑이야? 훈훈하네.”
“후배를 돕는 것뿐입니다, 디트리히 경.”
바라하가 눈살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타는 듯이 새빨간 머리에 미끈하게 잘생긴 남자가 한량 같은 걸음걸이로 그들 곁으로 다가왔다. 아는 얼굴이었다. 에키는 그를 보자마자 급히 모자챙을 누르다가, 느리게 손을 떼었다.
디트리히 사루아. 테레사에 의해 가로막힌 에키네시아로부터 달아나서, 유리엔에게 아젠카의 소식을 전달하려던 기오사 오너.
밤의 그늘이 잠식한 숲, 그가 남긴 흔적을 짐승처럼 추적해 가던 자기 자신, 가쁘던 숨소리, 일그러진 얼굴, 절규와 신음, 겨누어지는 기오사, 말라붙은 테레사의 피 위로 그의 피를 뒤집어쓰던 기억. 그것들은 끔찍해서 더 생생했다.
그러나 1629년의 디트리히 사루아는 기오사 오너가 아니었다. 그는 아직 마스터가 되지 못한 준기사일 뿐이다. 그가 에키처럼 자신의 기오사를 깨웠다면 회귀할 때 기오사와 함께였을 것이다. 디트리히의 레밍 기오사는 에키의 바르데르기오사와 달리 행방이 명확한 기오사라 몰래 가지고 있는 것도 불가능했다.
‘역시 확실해. 디트리히에게는 지워진 과거의 기억이 없어.’
에키는 모자챙에서 손을 떼고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망사 너머로 눈이 마주쳤다. 디트리히의 붉은 눈이 재미있다는 듯 휘었다.
“꽃 같은 아가씨네. 애인 맞지, 바라하?”
“애인 아닙니다. 몇 번을 말합니까?”
“그래, 그래, 아직은 애인이 아니라는 거지? 힘내라, 짜식.”
디트리히가 능글맞게 말하며 바라하의 등을 두들겼다. 바라하가 그의 팔을 밀어내며 인상을 찌푸렸다.
“장난치지 마십시오, 디트리히 경.”
“애인도 아니고, 꼬시는 중도 아니면, 뭐 하러 막사 설치까지 도와주냐?”
“마음에 드는 후배를 도와주는 게 잘못입니까?”
“어, 별로지. 지금 같은 상황에선.”
“……예?”
디트리히가 흘깃 에키를 돌아보았다. 그러곤 자신보다 큰 바라하의 목에 팔을 걸어 휙 아래로 끌어내렸다.
“네가 도와주는 게 남들 눈에 어떻게 비칠지를 생각해 봐. 정말 네 후배를 아낀다면 말이지.”
바라하의 표정이 멍해졌다. 디트리히는 그런 그의 머리를 엉망이 될 정도로 쓰다듬더니 놓아주었다. 그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건들거리며 에키 쪽으로 다가왔다.
“에키네시아 로아즈 생도, 내가 지금 무슨 얘길 하고 있는지 알아?”
“……제 평판을 걱정하고 계신 거라면, 괜찮습니다. 배려 감사해요, 디트리히 경.”
“역시, 네가 바라하보고 도와달라고 한 건 아니구나. 어쩐지 그럴 거 같더라.”
“선배님의 도움을 거절하지 않았으니 결과적으론 같아요.”
덤덤한 말에 디트리히가 에키네시아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뭐, 그건 그렇다 치고. 너 말이지…….”
“옷차림 문제라면…….”
“아니, 그건 신경 안 써. 왜일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