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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든 꽃-27화 (27/211)

검을 든 꽃 27화

앨리스가 물었다. 에키는 경기장 쪽에 시선을 둔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앨리스.”

“감사합니다, 에키네시아.”

“에키.”

“……네, 에키.”

“말 놓으라니까요?”

“그건 좀…….”

앨리스가 머뭇대더니 볼을 옅게 붉혔다. 에키가 그녀를 돌아보자 앨리스가 조그맣게 말했다.

“아, 아직 각오가 덜 되었습니다.”

“……각오가 필요한 일이에요?”

“네. 에키는 말을 놔도 됩니다.”

“앨리스가 안 놓는데 저만 말을 놓으면 이상하잖아요. 됐어요, 그럼.”

1차전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앨리스는 손쉽게 2차전에 올라왔다. 이제 2차전이다. 에키는 여전히 제 옆에 딱 붙어 앉아 있는 앨리스를 돌아보았다.

“2차전, 앨리스랑 저인 거 알고 있죠?”

“물론입니다. 기대하고 있습니다.”

“…….”

빨리 끝내려고 했는데, 기대감으로 반짝이는 회색 눈을 보자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에키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이후 이어진 에키네시아 로아즈와 앨리스 윈터벨의 대결은 그야말로 명경기였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은 비슷한 실력자 간의 대련이라기보다는 지도 대련에 가까웠다.

월등히 실력이 위인 자가 아직 부족한 자를 상대로 가르치듯 진행되는 대련. 이 자리의 모든 사관생도가 자신들에게 검을 가르친 스승을 상대로 경험해 본 바로 그것이었다.

이기는 것이 적당히 유도하며 가르치는 것보다 훨씬 쉽다. 당연한 일이다. 남을 가르친다는 건 그저 실력이 위인 것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니까. 까마득한 곳에서 해답지를 보듯 내려다보며 이끌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30분이 넘도록 이어진 수준 높은 검투는 마지막에 에키네시아의 검이 앨리스의 목덜미 앞에서 멈추는 것으로 끝이 났다.

관람석에는 쥐죽은 듯한 침묵이 깔렸다.

사관생도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앨리스가 얼마나 뛰어난지 그들도 알았다. 지금 이 자리에서 앨리스의 검 앞에 자신을 세워봤을 때 승리를 자신할 수 있는 생도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럼, 그 앨리스를 상대로, 그것도 신입생 순위전이라는 자리에서, 지도 대련을 한 저 ‘레이디’는 대체 어느 정도란 건가. 가늠조차 잘 되지 않았다.

마나를 쓰지 못하는 것을 빼면 검술만으로는 창천의 정식 기사들과도 해볼 만하지 않을까. 불편한 드레스에 굽 높은 구두를 신은, 스무 살짜리 여자가 말이다.

“세기의 천재…… 맞네.”

넋 놓고 지켜보던 테오는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사관생도는 모두 천재 소리를 들으며 아젠카까지 왔다. 테오도 숱하게 들어본 말이었다. 천재. 뛰어난 재능.

사관생도가 되고 나서는 다들 뛰어나서 천재가 정말 많구나, 생각했었다. 천재 위의 천재, 예를 들면 룸 메이트로 지켜본 미하일, 알음알음 실력이 알려진 앨리스 같은 녀석도 있었고.

하지만 ‘레이디’는 미하일을 한 번의 공격으로 패배시켰고, 앨리스를 상대로 지도 대련을 했다.

저런 존재는 대체 뭐라고 불러야 할까. 세기의 천재라는 표현도 부족해보였다.

앨리스와의 2차전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에키네시아는 단 한 번의 공격으로 모든 상대의 검을 날려버렸다. 누구도 그녀의 검을 받아내지 못했다. 앨리스만 예외로 상대해 준 거라는 걸, 그녀의 실력이 아득한 윗줄에 있다는 걸 누구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이제 다른 생도들의 경기는 뒷전이었다. 사관생도들은 대부분 에키네시아의 동작 하나라도 더 보려 애썼다. 뛰어난 기사의 검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배움을 얻기도 하므로.

“단장님은 알고 계셨나 봐. 그러니 스콰이어로…….”

“맙소사. 방금 봤어? 저걸 어떻게 이겨.”

“소문은 어느 새끼가 낸 거야? 부정 입학? 놀고 있네.”

“야, 이건 반칙 수준 아니냐? 저런 애가 우리랑 같은 사관생도라고?”

“준기사들한테도 안 밀리겠는데? 아니, 기사랑 상대해도 되겠다.”

“그래도 마스터는 아니잖아. 마나를 못 쓰면 소용없지.”

“하긴, 검술만 뛰어나고 마나 친화력은 부족해서 준기사에 계속 머무는 분도 있으니까…….”

“아직 스무 살 아냐? 그럼 모르는 일이지. 몇 년 안에 마스터가 되지 않을까?”

“대체 어디서 저런 괴물이 튀어나왔어? 누구 로아즈 가문 아는 사람?”

대기실과 관람석에 웅성거림이 퍼져나갔다.

신입생 순위전은 예상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끝나버렸다. 에키네시아의 경기가 전부 빨리 끝난 탓이다.

그녀는 결승전조차 한 번의 공격으로 끝냈다.

“에키네시아 생도, 축하해. 다음 순위전 또는 결투가 있을 때까지 넌 1학년 중에서 1위야.”

순위전이 끝난 다음, 이안이 그녀에게로 다가오며 말했다. 그가 다정한 미소를 띠었다.

“난 네가 잘할 거라 생각했지만……. 예상한 것보다 더 잘하더라. 전체 순위전 때엔 다들 긴장하겠어. 상위권이 난리가 나겠는데? 정말 대단해.”

“과찬이셔요.”

에키는 이안의 말을 귓등으로 들으며 속으로 내일의 근육통을 걱정했다. 몸살기가 남은 상태로 순위전을 치렀으니 내일은 온몸의 근육이 파업을 선언할지도 모르겠다. 특히 앨리스와의 2차전에서 좀 무리를 했다. 은근슬쩍 마나를 사용해서 근육의 피로를 지탱하긴 했지만.

‘연고를 바르고, 생강차를 마신 다음, 일찍 자야지.’

유리엔이 준 생강차 생각을 하니 가슴께가 간질간질했다. 몰려드는 생도들의 관심이나 풋내기들을 상대로 한 순위전 결과 같은 것은 그녀에게는 머릿속의 생강차만도 못했다.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 그녀를 향해 이안이 계속해서 말했다.

“단장님이 왜 너를 스콰이어로 지명하셨는지 확실히 알겠어. 그분은 네 재능을 알아보신 거로구나. 비결이 뭐니? 로아즈 가문이 검으로 유명한 곳은 아닌데.”

이안의 눈이 가느스름했다. 다른 생도들은 생도 대표가 얘기하고 있는 탓에 그녀에게 다가오지 못하고 주위에서 기웃거리고 있었다. 에키는 검을 챙겨 들며 대답했다.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누구에게 배웠어? 혹시 단장님께 예전부터 배우고 있었니?”

“아뇨, 독학이에요.”

“……혼자서 검을 익혔다고?”

“예. 선배님, 이만 돌아가 봐도 될까요? 조금 지쳐서요.”

“아, 그래, 피곤하겠구나. 자꾸 붙잡아서 미안해.”

이안이 상냥하게 말하며 물러났다. 그러나 에키에게 달라붙은 그의 시선은 진득했다. 브레드 같은 음탕한 진득함이 아니라, 무언가 다르게 느껴지는, 비틀린 시선. 회귀 전에 그의 본색을 보지 못했다면 알아채지 못했을 아주 잘 감춰진 눈빛이었다.

‘차라리 대놓고 사고를 쳐줬으면 좋겠네.’

에키는 그가 두렵지는 않았다. 대진표에 부리는 수작 정도는 같잖고, 무슨 짓을 하는 이안이 그녀에게 큰 위협이 되진 못할 것이다. 다만 근처에 맴돌게 두는 게 찝찝하고 성가셨다.

생도 대표가 물러나자 사관생도들이 슬금슬금 접근했다. 그들은 에키에게 쉽게 말을 걸지 못하고 서로 눈치만 보았다. 내내 무시하고 소문에만 휘둘리다가 순위전 결과를 보자마자 들이대기는 아무리 그래도 민망한 모양이었다.

물론 눈치를 볼 필요가 없는 생도도 있었다. 파티마가 땋은 머리를 달랑거리며 달려오더니 활짝 웃었다.

“에키네시아 생도!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 1위 축하해!”

“감사합니다, 파티마 선배님.”

“앨리스 생도랑 미하일 생도가 2, 3위가 될 줄 알았는데. 대진표가 영 꼬였네. 그래도 결과적으로는 내 말대로 될 걸. 어때, 내 혜안이? 위즈덤에 대한 신뢰가 막 생기지 않아?”

까만 눈이 데구르르 구르더니 의기양양한 빛을 띠었다. 파티마는 에키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발돋움을 하여 그녀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이참에 우리 클럽의 대단함을 더 얘기하고 싶지만, 순위전 하느라 피곤했을 테니까 나중에! 고생했어, 푹 쉬어! 다음에 보자!”

혼자 재잘재잘 말한 파티마가 손을 흔들고 떠나갔다. 그녀는 물러나며 주위의 생도들에게 은근한 견제의 눈빛을 던졌다. 이제 와서 클럽 영업을 하기엔 민망하지 않냐, 너희는? 이런 느낌의 시선이었다.

안면몰수하고 들이대기가 어려워진 생도들은 머쓱하게 멀어졌다. 그들은 삼삼오오 흩어지며 오늘의 순위전에 대해 떠들기 시작했다.

파티마의 그런 행동이 에키는 내심 고마웠다. 괜히 몰려들면 귀찮기만 하니까.

그러고 보니 생도들 중에 바라하가 보이지 않았다. 부단장의 스콰이어라 바쁜 사람이다 보니 갑자기 일이 생긴 모양이었다.

그녀는 방으로 돌아가려다 아직 대기실에서 검을 손질하고 있는 앨리스를 발견했다.

“앨리스, 같이 가요.”

“아, 네!”

앨리스가 벌떡 일어나더니 황급히 짐을 챙겼다. 에키는 그녀가 떨군 헝겊조각을 주워주며 말했다.

“……순위, 괜찮아요? 앨리스의 실력에 비해 많이 낮은 순위가 되었는데.”

“상관없습니다. 순위보다 더 중요한 걸 얻었으니까요. 당분간 제 검을 다듬는 데에 집중할 생각입니다.”

앨리스가 빙그레 웃었다. 에키는 정말로 ‘기사다운’ 그녀의 대답에 속으로 감탄했다. 진짜 반듯하다. 이런 애가 기사가 되어야지. 그녀는 불쑥 솟구치는 말을 참지 않았다.

“난 앨리스가 꼭 창천의 기사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당신은 정말 기사에 어울리니까.”

충동적으로 한 말이었지만 후회되지는 않았다. 살아난 니콜과 이야기하면서 과거에 솔직하지 못했던 것을 후회했었으므로. 에키의 말에 앨리스가 멍하니 그녀를 돌아보았다. 에키는 진심으로 미소 지었다.

“필요하면 언제든 제게 대련을 청해주세요, 앨리스, 당신이라면 검을 나누어도 즐거울 것 같아요.”

에키는 검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검이란 악몽과 떨어뜨릴 수 없는 살육의 도구였다. 검을 쥘 때면 끈적거리는 피가 손끝에 휘감기는 기분이 들곤 했다. 검술은 효율적으로 사람을 죽이기 위한 기술일 뿐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앨리스와 검을 나눴을 때는 달랐다. 바르데르기오사에게 분위기에 휩쓸렸다고 한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때는 정말로, 진지하고 올곧게 검을 대하는 앨리스에게 물드는 기분이었다.

앨리스에게 검은 자신이 걷는 길이자 스스로를 갈고닦는 방법이었다. 그녀는 동화 속 기사들처럼 순수한 ‘기사’를 꿈꾸고 있었다. 그리고 에키는 그런 그녀의 고지식함이나 순수함이 싫지 않았다.

그녀가 동경한다는 테레사의 디몽기오사가 떠올랐다. 바르데르기오사가 마검이라 불리듯 디몽기오사는 수호검이라고 불린다. 소중한 것을 잃은 인간들의 슬픔과, 그것을 지키고 싶어 하는 마음들을 재료로 대장장이가 만들어낸 검. 그 검은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지키고 싶은 것이 있는 자에게만 제 몸을 허락한다.

회귀 이전 에키가 기오사를 모을 때, 오너의 조건을 만족하지 못한 탓에 들고는 있어도 사용하는 건 불가능했던 기오사들도 있었다. 하지만 디몽기오사는 에키도 쓸 수 있었던 기오사 중 하나였다. 소중한 사람들을 모조리 잃어 생겨난 깊은 슬픔 덕분이었다.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키기 위해 검을 쥐는 자도 있는 법이다. 타인과 관계없이 스스로를 단련하고 싶어 검을 쥐는 자가 있듯이. 곧고 반짝이는 사람들. 그런 상대와 검을 나누는 건 말보다 더 깊은 대화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앨리스와 했던 대련은 즐거웠다. 무리해서 몸을 움직일 만큼.

앨리스는 눈을 크게 떴다가, 눈매를 접으며 웃었다. 볼이 옅게 상기되었다. 그녀가 에키의 손을 잡았다. 오른손, 마검의 문양을 가린 장갑 위로 따듯한 체온이 느껴졌다.

“감사합니다, 에키. 당신을 알게 되어 너무나 기쁩니다.”

“가, 갑자기 왜 손을 잡아요?”

“그냥요. 안 됩니까?”

“……아뇨, 뭐.”

에키는 당황해서 투덜거리면서도 손을 빼지는 않았다. 순위전을 치른 앨리스에게서는 땀 냄새가 풀풀 났지만 그것을 지적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또래의 어린아이들처럼 손을 잡고 기숙사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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