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26화
테오는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예쁘긴 예쁘네. 시커먼 생도들 틈에 있으니 눈도 즐겁고.”
“기사가 되는데 예쁜 게 무슨 쓸모가 있다고. 아, 쟤는 쓸모가 있으려나? 소문대로라면.”
미하일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예쁘장하긴 해도, 그가 보기에는 저 여자보다 누님인 테레사가 훨씬 아름다웠다.
에키네시아 로아즈의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의 주위는 보이지 않는 벽이라도 있는 것처럼 비어 있었다. 속속 도착하는 생도들은 그 근처를 피해 다른 곳에 앉았다. 그 와중에, 막 들어온 생도 한 명이 그녀에게로 똑바로 다가갔다.
“저거 앨리스 윈터벨이잖아?”
각 잡힌 생도복을 입은 앨리스는 에키네시아에게 다가가 무어라 말을 걸었다. 건성으로 대꾸하던 에키네시아는 그녀가 자신의 옆에 앉자 화들짝 놀랐다. 앨리스가 웃으며 말을 하고, 그 말을 들은 에키네시아는 당황한 듯 시선을 피하다가 턱을 괴고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아주 살짝 미소를 띠었다. 감추려다 흘러 넘쳐 어쩔 수 없이 새어 나오는 것 같은 웃음을, 난처하고 부끄러워하면서도, 숨길 수 없는 기쁨이 묻어나는 표정이 그녀의 얼굴에 짧게 스쳐 지나갔다.
“……어.”
그녀를 계속 보고 있었던 미하일은 그 웃음도 보았다. 순간 속에서 무언가가 덜컹했다.
“어, 어?”
소년은 멍청이처럼 중얼거렸다. 뭐, 뭐야, 이 느낌은. 방금 본 게 뭐였지? 아니, 그냥 계집애가 조금 웃은 거잖아. 미하일은 손으로 눈을 문지르고, 다시 에키네시아 쪽을 봤다가, 제 뺨을 스스로 때렸다.
“뭐 하냐?”
테오가 황당하다는 어조로 물었다. 미하일은 한쪽 뺨이 벌겋게 달아오른 상태로 정면 경기장에 시선을 고정했다.
“아무것도 아냐.”
속이 기묘하게 들끓었다. 미하일은 그것을 분노로 바꾸었다. 남자를 홀리려고 드레스나 입고 다니는 계집애한테 한눈을 팔다니. 스스로가 한심하고 창피했다. 18세, 사관학교 입학기준상 최연소인 소년은 검집을 쥔 손에 꾹 힘을 주었다. 빨리 자신의 차례가 오길 빌었다.
“7번, 미하일 폰 프랑 알마리! 8번, 에키네시아 로아즈!”
생도 대표 이안이 소리를 높여 그들을 호명했다. 미하일은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나 경기장으로 나갔다. 그의 맞은편에 에키네시아가 사뿐사뿐 다가와 섰다.
하얀 드레스 차림의 여자를 앞에 두자 순위전 경기장이 아니라 무도회장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여기가 무도회장이면 가슴에 손을 대고 우아하게 인사를 하고, 춤을 청하겠지.
미하일은 무심코 그런 생각을 했다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쓸데없이 꾸미고 다녀서 이따위 생각을 하게 만들다니. 다 저 계집애 탓이었다. 레이디고 뭐고 박살을 낸 다음 잊어버려야지. 소년은 화가 난 눈으로 에키네시아를 노려보았다.
“……승자에겐 자비와 관용이, 패자에겐 승복과 인정을, 결투자들의 검에는 명예와 정의가 깃들게 하소서. 아르 세밧티엠.”
진행을 돕는 3학년생이 검을 뽑아 들어 그들 사이에 겨눈 채 관용적인 결투 선언을 하고 물러났다. 겨눠진 검이 사라지는 순간 대결이 시작되었다.
미하일은 검을 세로로 세워 들었다. 그의 가문인 프랑 알마리의 검술은 굳건한 방어와 그를 기반으로 한 반격에 특화되어 있었다. 테레사는 그 검술로 마스터가 되었고 기오사 오너의 자리까지 올랐다. 미하일은 자신의 검술을 의심하지 않았다.
‘와라. 오기만 하면……!’
에키네시아는 바로 달려드는 대신 검을 비스듬히 늘어뜨린 채 미하일을 훑어보았다. 보라색 눈동자가 소년의 모습을 비춰냈다. 미하일은 짜증이 났다. 빨리 공격하기나 하지, 뭔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저 여자는.
그 순간 그녀가 발을 내디뎠다. 하나, 한 걸음 크게 내딛고, 둘, 늘어뜨려져 있던 검이 반원의 궤적을 그리며 솟구친다. 미하일은 그 궤적을 가능하며 검을 받아칠 준비를 했다. 그리고 셋.
챙그랑.
미하일의 검이 허공을 날았다. 공중에 붕 떴던 검이 경기장 바닥에 떨어질 때까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아무도 파악하지 못했다. 바닥에 떨어진 검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굴러갔다.
미하일은 멍하니 비어버린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훅 하고 가벼운 바람이 끼쳐와 앞머리를 날렸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칼끝이 이마 바로 앞에 멈춰 있었다. 그 칼의 너머에서, 보라색 눈동자가 귀여운 어린아이를 보듯 소년을 향해 곱게 휘었다.
“……8번, 에키네시아 로아즈 승리.”
“뭐, 뭐야?”
“지금 어떻게 된 거야?”
“봤어?”
“아니, 이게 무슨…….”
3학년생의 얼떨떨한 선포 이후에 봇물 터지듯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
에키네시아는 태연히 검을 거두고 대기실로 되돌아갔다. 바닥에 구두 굽이 부딪히는 소리가 또각또각 선명했다.
미하일은 넋을 빼앗긴 것처럼 굳어 있었다. 다가온 3학년생이 그를 툭툭 쳐서 정신을 차리게 만들었다. 그러자 미하일은 목덜미부터 이마 끝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라서 대기실이 아니라 밖으로 나가버렸다.
테오는 제 룸메이트가 어이없게 패배한 것이 부끄러워 달아났으리라고 생각하고 뒤따라 나갔다. 그는 한동안 훈련장 주위를 뒤지다가 겨우 화려한 금발을 찾아냈다.
미하일은 실내 훈련장 외곽 모퉁이에 서서 벽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미하일, 너 방심했……?”
반쯤은 놀릴 마음으로 그의 어깨를 쥐었던 테오는 돌아보는 소년의 눈빛을 보고 뒷말을 삼켜버렸다. 얼굴은 여전히 빨갛고 초록색 눈은 몽롱하게 풀려 있었다. 천사 같은 소년이 그런 표정을 하자 묘하게 위험해 보였다. 테오는 당황해서 말을 더듬으며 그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너, 너 괜찮냐? 야, 살다 보면 실수할 수도 있지. 괜찮아, 괜찮아.”
“실수한 거 아니야.”
“뭐?”
“실수 아니라고, 넌 못 봤냐?”
“뭘 봐?”
“모르면 됐어, 새끼야. 평생 모르고 살아. 원래 아는 만큼 보이는 거지.”
“이게 돌았나, 뭐라는 거야?”
미하일은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손으로 꾹꾹 눌렀다. 그는 홀린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누님 같은 여자는 처음 봤어.”
“…….”
테오는 제 룸메이트가 한 칼에 패배한 충격으로 정신을 놨다고 판단했다. 미하일은 몇 차례 얼굴을 문지르고 양손으로 뺨을 짝 치더니 눈빛을 침착하게 가라앉혔다.
“가자.”
“어딜 가?”
“마저 봐야지. 그 사람 경기는 한 경기도 놓치면 안 돼.”
“……누구? 레이디?”
“그래, 빨리 따라와. 그리고 눈알 빠지도록 집중해서 이번엔 놓치지 말고 봐. 그럼 나중에 나한테 감사하게 될걸.”
미하일이 테오를 잡아끌듯 붙잡고 관람석으로 향했다. 테오는 얼이 빠져서 질질 끌려가다가 그의 팔을 떼어냈다.
“야, 넌 떨어졌지만 난 경기 남았거든?”
“아.”
미하일의 눈이 깜박거렸다. 그러더니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나 떨어진 거지?”
“이 자식이 아까부터 헛소리를 자꾸 하네.”
“마물 토벌은 꼭 참여하고 싶은데.”
“포기해, 가서 발 닦고 잠이나 자.”
“됐어, 순위전 끝나고 3위 안에 든 놈한테 가서 결투 신청하면 되니까.”
미하일이 스산하게 웃었다. 테오는 기가 차서 콧방귀를 끼었다.
“1차전에서 레이디의 칼 한 방에 나가떨어진 게 퍽이나. 쪽팔리지도 않냐? 넌 아무래도 수련 좀 더 해야겠다.”
“이번 순위전이 끝나고 나면.”
미하일이 관람석 쪽으로 향하며 테오의 어깨를 꾹 쥐었다. 소년은 금빛 속눈썹을 내리깔며 꿈결처럼 속삭였다.
“그녀에게 진 걸, 누구도 쪽팔리게 여기지 않을 거야.”
“……그게 무슨 뜻이야? 레이디한테 지는 게 당연하다고?”
“보면 알게 될 거야. 그러니까 잘 보라고. 너야말로 수련이 더 필요하겠어.”
미하일은 테오를 밀어내며 관람석 계단 쪽으로 향했다. 테오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이고 대기실로 돌아갔다.
* * *
에키네시아 로아즈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근육통 연고를 바르고 항생제에 생강차까지 달여 먹은 다음 푹 잤지만, 그래도 몸이 약간 무거웠다. 그래서 그녀는 만사가 귀찮았다.
‘피곤하니까 빨리 끝내야지.’
신입생 순위전에서 1위를 하기로 결심하고 나서, 그녀는 어느 정도 쇼를 보여줄 생각이었다. 별건 아니고, 풋내기 생도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한 화려한 기교로 대결을 이끌 생각이었단 소리다.
그런데 몸살기가 남아 있으니 그런 것도 귀찮았다. 어차피 더러운 소문이 나돌지 않을 정도로 압도하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그녀는 1차전 상대인 미하일의 앞에 서면서 최대한 빨리 끝내 버리기로 결심했다.
소년이 자세를 잡는 것을 보자 아련한 기억이 떠올랐다. 디트리히를 도망시키기 위해 그녀를 물고 늘어졌던 기오사 오너 테레사와 같은 준비 자세였다.
‘남동생이니, 당연하겠지.’
에키는 미하일을 죽였던 상황은 잘 기억나지 않았다. 짚단 베듯 쓰러뜨렸던 많은 자들 중 하나였을 뿐이다. 아젠카에 뒤늦게 도착했던 테레사가, 미하일의 시체를 붙들고 오열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녀는 미하일을 기억하게 되었다.
테레사는 방어에 특화된 검술을 구사했었다. 그녀의 검은 견고하고 드높으며 아름다운 성벽 같았다.
그 검술은 그녀의 성향과도, 그녀의 기오사인 디몽기오사와도 무척 잘 어울렸었다. 디몽기오사는 인간의 슬픔과 보호본능을 재료로 만들어진, ‘지키기 위한 검’이니까.
‘누나를 롤모델로 삼았구나. 그런데 방어형 검술이랑 본인 성향이 좀 안 맞는 것 같은데.’
검을 든 자세만으로도 대강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테레사의 검과 싸워본 덕이었다.
‘테레사를 봐서라도, 기회가 닿으면 조언해 줄까…….’
에키는 그런 생각을 하며 검을 들었다. 그리고 훤히 보이는 약점을 이용해 소년의 검을 단번에 후려쳐 날렸다. 이어 미간에 검을 겨누어 대결을 끝내버렸다.
넋이 나간 얼굴이 풋풋했다. 살아 있는 얼굴. 테레사도 살아 있을 것이고, 분명 둘은 사이좋은 남매겠지. 시간을 되돌린 보람이 여기서도 느껴졌다. 그게 기분이 좋아서 에키는 약간 웃었다.
대기실에 돌아오니 앨리스가 다가왔다. 그녀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에키를 바라보며 속삭였다.
“저와 대련할 때와는 또 다른 모습을 보이는군요, 로아즈 양.”
“……그냥 이름으로 불러요, 윈터벨 양.”
“그래도 됩니까?”
“편히 말해도 되고요. 간지러워서 못 견디겠어요.”
거리감이 있을 때는 존대나 정중한 호칭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숭배하는 듯한 시선을 받으며 저런 말을 들으니 민망해 죽겠다. 에키는 벼르던 말을 하고는 드레스가 구겨지지 않게 조심해서 자리에 앉았다. 몰려드는 다른 생도들의 시선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편하게 부르면…… 다음에 또 대련해 줄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