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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든 꽃-25화 (25/211)

검을 든 꽃 25화

뒤돌아보기가 부담스러웠다. 그녀는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고개를 돌렸다. 역시나 유리엔이 그들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에키네시아를 넘어서 이안에게가 닿았다.

“사과라니, 무슨 소리지?”

“……생도 간의 다툼이 있었습니다.”

이안이 어색하게 웃는 얼굴로 답했다. 유리엔의 시선은 이안의 얼굴에 길게 머물렀다. 표정 없이 서늘한 낯이었다. 그는 곧 에키를 돌아보았다.

“어떤 다툼인가, 에키네시아 생도?”

“개인적인 일입니다, 단장님.”

에키는 딱 잘라 말했다. 그에게 알릴 생각은 없었다. 도움받을 생각도 물론 없다. 그럴 만한 관계도 아니고, 도움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이안 펠레트로가 대진표에 수작을 부리건, 브레드가 사과한답시고 무언가 이상한 짓을 하건 간에.

유리엔이 단호한 표정의 에키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미미하게 갸웃거리는 느낌. 눈매가 가늘어지더니 푸른 눈이 찬찬히 그녀의 얼굴을 살핀다. 곧 그는 에키에게서 시선을 떼서 이안을 바라보았다.

“생도 대표. 에키네시아 생도에게 더 할 말이 남았나?”

“예? 아……. 그게.”

이안은 난처한 얼굴이 되었다. 에키가 그를 향해 말했다.

“사과하고 싶으면 직접 찾아오라고 전해주세요, 선배님.”

“……알았어, 그렇게 전해줄게.”

이안은 일그러지려는 얼굴을 능숙하게 미소로 마무리했다. 기다리고 있던 유리엔이 덤덤한 목소리를 냈다.

“끝났으면, 가보도록. 에키네시아 생도와 할 말이 있다.”

“알겠습니다, 단장님. 그럼.”

그는 유리엔을 향해 경례를 하고 떠나갔다. 에키는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할 말은 또 뭘까.

이안이 완전히 멀어지고 나자 유리엔의 시선이 그녀에게 와 박혔다. 안 그래도 어지러운 머리가 빙글빙글 도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무언가…….”

유리엔은 말을 꺼내놓고 멈추더니 한참을 머뭇거렸다. 그가 얕게 한숨을 쉬는 것이 느껴졌다. 에키는 결국 고개를 들었다. 푸른 눈동자가 모호한 빛을 띠고 그녀를 보고 있었다.

“……내가, 그대를 도울 일이…….”

말끝이 흐리고 몹시 조심스러웠다. 그 탓에 에키는 그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그녀는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제대로 못 들었습니다, 단장님.”

“……아니, 아니다.”

유리엔이 쓴웃음을 띠더니 한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그는 다시 그녀의 얼굴을 구석구석 들여다보고, 이어 돌아서며 말했다.

“따라와라, 에키네시아 생도.”

“……네.”

마음 같아선 그냥 돌아가서 침대에 파묻혀 잠이나 자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에키는 순순히 그의 뒤를 따라갔다. 유리엔은 마구간을 지나 창천기사단 본부 건물 앞에서 멈추더니, 잠깐 기다리라고 말하고는 안에 들어갔다.

잠시 후에 그는 무언가를 들고 밖으로 나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에키는 아무 생각 없이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유리엔은 똑바로 등을 펴고, 자로 잰 듯이 반듯하게 걷는다. 걸을 때 소리가 거의 나지 않았다. 오랜 훈련과 타고난 우아함이 걸음걸이에서도 묻어났다.

느슨하게 묶어둔 은발이 일정한 박자로 흔들렸다. 그늘진 부분은 회백색, 햇빛을 받는 부분은 하얗게 반짝거리는 게 순은을 가늘게 뽑아 모아둔 것 같다.

머리가 멍하니 내내 그런 것만 눈에 담고 있었다. 그러느라 에키는 여자 기숙사 앞에 도착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다음날이 신입생 순위전이라서 다들 훈련 중인지 기숙사 근처는 조용했다.

기숙사 입구에서 유리엔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는 작은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에키가 얼떨떨하게 그것을 받아들자,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무리는 하지 말도록.”

나직한 목소리, 다가온 손이 살짝 어깨 위에 얹혔다가 떨어졌다. 새털이 스치는 것처럼 가벼운 접촉이었다.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떠났다.

에키는 그가 사라지고 나서야 손에 들린 종이봉투를 내려다보았다. 봉투를 열었다. 그 안에는 작은 유리병과 납작한 금속통이 각각 두 개씩 들어 있었다.

그녀는 방에 돌아가서 책상에 앉아 그것들을 하나하나 꺼내보았다.

창천의 매 문양이 새겨진 푸른색 금속통과 붉은색 금속통. 그것들은 꽤 유명한 물건이라 보자마자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창천기사단원들이 사용하는 특수제작 연고였다.

아젠카 대신전 신관들의 축복이 섞인 것으로, 외상 치료에 효과를 보이는 붉은 통과 늘어난 인대나 근육통 등에 효과가 좋은 푸른 통이 있다고 들었다. 그 뛰어난 효과와 함께 돈이 있어도 구하기 어려운 걸로 유명한 물건이었다. 신관들이 수제로 소량만 만드는 탓에 창천의 기사들만 쓸 수 있었다.

그 귀한 연고가 두 종류 다 들어 있었다. 다음으로 유리병들을 확인해 보았다.

두 개의 유리병 중 갈색 유리병에는 라벨이 붙어 있었다. 항생제 시럽. 다른 하나의 투명한 유리병 안에는 노르스름한 조각들이 꿀에 절여져 있었다. 뚜껑을 열어보니 생강 향이 달콤한 꿀 냄새 사이로 강하게 풍겼다. 생강차였다.

에키는 그것들을 책상 위에 늘어놓고 멀거니 바라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내용물은 변하지 않았다. 몸살에 걸린 환자에게 줄 법한 물건들.

“……어떻게 안 거지?”

[뭘? 이게 뭔데 그래? 독이야?]

마검이 해맑게 물었다. 에키는 대꾸하지 않고 벌떡 일어나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화장까지 해둔 얼굴은 어딜 봐도 아픈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오전 내내 곁에 붙어 가르치던 바라하도 전혀 몰랐지 않나.

그녀는 책상으로 돌아와 생강차 병을 만지작거렸다. 매끄러운 유리의 감촉을 따라 손을 내리다가, 책상에 엎드려 고개를 파묻었다.

[응? 왜 그래? 너 얼굴이 빨개졌다? 열 올라?]

“몰라, 닥쳐.”

기분이 몹시 이상했다. 톡 쏘는 냄새와 달콤한 냄새가 뒤섞인 생강차 향처럼.

그가, 기억하지 못했으면 좋겠다. 작년 탄신 연회 때 처음 서로를 보고, 그때 서로를 기억하게 되어서, 아젠카에서 재회한 거였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 * *

4월 26일, 신입생 순위전이 있는 날이 밝았다. 아침부터 부슬부슬 봄비가 내렸다.

신입생 순위전은 본관 바로 옆에 있는 별관 안에서 열렸다. 비가 오지 않았다면 본관 앞 대연무장에서 했을 텐데, 비가 오는 바람에 실내 훈련장에서 열리게 되었다.

훈련장 입구에 대진표가 붙어 있었다. 곱슬거리는 금발의 소년이 그 앞에 서서 대진표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황금을 가져다 쏟아부은 것처럼 반짝이는 머리카락과 연두색에 가까운 초록색 눈동자, 도자기처럼 흰 피부와 반듯한 코, 발그레한 입술까지. 소년은 명화에서 튀어나온 천사처럼 보였다.

“미하일, 뭐 하냐?”

밤색 머리의 생도가 어슬렁거리며 다가와 그의 어깨에 팔을 올렸다. 미하일은 눈살을 찌푸린 채 자신의 룸메이트이자 동기인 그를 돌아보았다.

“테오. 내 1차전 상대 말이야.”

“왜? 누군데?”

“그 여자 맞지?”

미하일이 대진표를 가리켰다. 테오가 그가 가리킨 곳에 적힌 이름을 읽었다. 에키네시아 로아즈. 그는 참지 않고 푸흡, 하고 웃음을 흘렸다.

“야, 야, 네 1차전 진짜 기대된다.”

“뭐가.”

“레이디와 천사의 대결이라니, 그림 되잖아. 안 그래? 눈호강 제대로 하겠네.”

테오가 낄낄거리며 미하일의 어깨를 두드렸다. 미하일은 인상을 쓰고 그를 노려보았다.

“천사라고 부르지 말랬지.”

“네 얼굴 보면 누구든 간에 천사라는 별명에 동의할 텐데.”

“지랄하네.”

미하일이 욕설을 내뱉으며 테오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테오는 얻어맞으면서도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미하일은 짜증스럽게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그는 창천기사단에 세 명뿐인 기오사 오너이자, 유일한 여성 기오사 오너인 테레사 폰 프랑 알마리의 늦둥이 동생이었다.

열한 살 차이가 나는 누님은 미하일의 기사단 입단을 반기지 않았다. 누가 봐도 곱고 여린 소년은 외모 그대로 어린 시절에 몸이 약했다. 테레사가 아젠카로 떠날 때까지도 쭉 그랬다.

사춘기 이후 건강해지며 검술에 재능이 있는 것도 깨달았지만, 테레사에게 미하일은 언제나 연약한 막내 동생일 뿐이었다.

“상대가 누구든 뭔 상관이야. 이기고, 내가 1위를 할 거야. 마물 토벌에 참가해서 활약하면 누님도 날 좀 달리 보시겠지. 난 이제 누님이 걱정할 어린애가 아니라고.”

미하일이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옆에서 그의 말을 들은 테오는 피식 웃으며 한마디 했다.

“시스콤 자식.”

“닥치지 않으면 그 주둥이가 두 번 다시 나불대지 못하게 만들어주지.”

“그러다 ‘레이디’한테 지면 어쩌려고?”

“져? 내가?”

미하일은 붉은 입술을 끌어올리며 웃었다.

“그런 계집애한테 내가 질 것 같아?”

“제일 계집애같이 생긴 게 뭐래. 야, 그래도 에키네시아 로아즈 쟤가 입학 수석이었잖아. 넌 3등이고.”

“넌 소문 못 들었어?”

“무슨 소문? 아, 레이디가 부정입학이었을 거라는 거?”

에키네시아 로아즈의 입학 성적과 스콰이어 지명을 둘러싼 뒷소문은 거침없이 부풀어 오른 상태였다. 누가 봐도 이해하기 어려운 스콰이어 지명에, 입학 첫날 결투 때도 별로 탁월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소문의 시작은 브레드를 위시한 몇몇 질 나쁜 이들이었지만, 요즈음에는 생도들 중 대부분이 그 소문을 알고 있었다.

대다수가 아는 소문은 때로 모두가 알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진실로 치부된다. 근거가 없으면 이 정도로 소문이 나돌겠냐는 의심이 드는 것이다.

“수상하긴 해. 아무리 그래도 첫날에 스콰이어 지명은 좀 심하잖아. 뭐 세기의 천재 같은 것도 아닌데.”

“오늘 적나라하게 까발려지겠지, 그 계집애의 진짜 실력이.”

“하여간 곱상하게 생긴 게 입은 험해가지고, 네 누님은 너 이러는 거 아냐?”

“누님께서 아시는 날엔 네놈부터 족칠 거야.”

녹색 눈동자가 험악하게 번뜩이자 테오가 쯧쯧 혀를 찼다.

“그래도 내가 너보다 형인데, 이 자식아.”

“고작 한 살 차이 나는 동기 주제에 형은 개뿔이.”

미하일이 비웃으며 검을 챙겨 들었다. 신입생 순위전이 시작될 시간이었다.

실내 훈련장의 관람석에는 생도들이 이미 빽빽하게 앉아 있었다. 신입생들의 실력을 알아놔야 다음 전체 순위전에 대비하기 쉬우니, 대부분의 생도가 참석할 수밖에 없었다.

순위전을 진행하는 생도 대표가 도와주는 몇몇 3학년과 함께 중앙에 서 있었다.

미하일은 관람석 아래에 있는 대기실로 향했다. 전면이 뚫려 있는 대기실에서는 중앙의 경기장이 잘 보였다. 이미 대부분의 신입생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야, 걔 저기 있네.”

테오가 미하일의 옆구리를 꾹 찌르며 속삭였다. 에키네시아 로아즈는 모여 있는 생도들 중에서도 한눈에 띄었다.

길게 늘어뜨린 분홍색 머리카락에 하얀 드레스. 짧은 장식용 베일이 달린 금색 리본으로 머리칼을 반쯤 묶어 올렸다. 손에는 흰 장갑, 하얀 스타킹에 흰 리본 구두까지, 포인트로 달린 금장식과 드레스의 가장자리에 금실로 놓은 수 외에는 온통 흰색이었다. 그녀의 귓가에서 진주 귀고리가 달랑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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