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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든 꽃-24화 (24/211)

검을 든 꽃 24화

메모지 한 장 없었지만 누가 가져다 둔 것인지는 명백했다. 앨리스 윈터벨. 에키는 멍하니 그 쟁반을 내려다보았다. 가슴께가 묘하게 일렁거렸다. 머릿속에서는 마검이 미친 듯이 웃어댔다.

“그만 웃어, 머리 울리니까.”

[야, 걔 되게 귀엽네. 귀찮게 굴 줄 알았는데……. 그때 죽였으면 아까울 뻔했어.]

그녀는 마검의 말을 무시하고 아침식사를 했다. 오늘도 바라하와 마구간에서 만나기로 했다. 원래 바라하는 다음날이 신입생 순위전이니 이 날은 스콰이어 교육 대신 개인 훈련을 하지 않겠냐고 물었었는데, 에키가 필요 없다고 거절했었다.

‘개인 훈련 하겠다고 할 걸 그랬네.’

씻고 나와서 오늘 입을 옷을 챙기며 에키는 뒤늦게 후회했다. 움직일 때마다 온몸이 아팠다. 약간 있던 열이 전신에 퍼지는 게 아무래도 몸살이 올 모양이었다.

아프다고 쉴 생각은 없었다. 에키네시아는 마스터 위의 경지에 이른 초인이었다. 마나를 사용하면 몸살이고 뭐고 무시하고 움직일 수 있었다. 굳이 마나를 쓰지 않아도 티 내지 않게 움직이는 것도 가능했다.

겨우 몸살에 쉬어야 할 정신력이었다면 9년이나 기오사를 모으지도 못했을 것이다. 물론 그 정신력이나 마나로 몸살을 낫게 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오늘도 마구간이니 종아리쯤 오는 짧은 드레스를 골랐다. 짙은 갈색에 베이지색 레이스가 달린 것이었다. 봄 드레스라 얇긴 해도 제법 따뜻한 재질인 데다, 긴 팔에 목 부분도 올라와 있어 좋지 못한 몸 상태에 도움이 될 듯했다.

에키는 느릿느릿 옷을 걸치다가 귀찮아져서 의자에 걸터앉았다. 마나를 이용해서 스타킹을 신고 장신구를 달았다. 물집이 잡힌 손에는 짙은 색의 장갑을 꼈다. 팔이 무거워서 마나를 불어넣어 화장품들을 움직여서 화장을 했다.

의자에 앉아서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하고 치장을 하는 꼴을 본 바르데르기오사가 기가 차다는 듯 중얼거렸다.

[마나로 화장을 하다니 낭비도 정도가 있지…….]

“지금은 팔 움직이는 게 더 귀찮아.”

평소보다 오래 걸렸다. 에키는 얼굴에 열이 오른 게 티가 나지 않는지 마지막으로 확인한 다음 방을 나왔다. 창천의 마구간에는 바라하가 이미 와 있었다.

“어서 와. 근데 정말 내일이 신입생 순위전인데, 말이나 돌보고 있어도 되겠어?”

“네, 배울 게 많잖아요. 수습기간이 한 달밖에 안되는 데다 중간에 마물 토벌까지 다녀올 걸 생각하면 시간이 부족하죠.”

“……네가 3위 안에 못 들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데, 그래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는 거 아니냐, 에키? 사관생도들을 얕보지 말라고.”

바라하가 헛웃음을 흘렸다. 에키는 그의 뒤를 따라 마구간으로 들어가며 아무렇지도 않게 답했다.

“얕보는 게 아니에요.”

“그럼?”

“제 실력을 잘 파악하고 있을 뿐이죠.”

바라하가 입술을 실룩이더니 요란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웃느라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하고 손짓으로 실피드 쪽을 가리켰다.

“푸흡, 홈, 오늘은, 크흠, 어제 못 했던 갈기랑 꼬리 손질을 마저 하자. 그 다음에 안장을 얹고 장비를 챙기는 법을 가르쳐줄게.”

“네, 감사합니다.”

실피드는 오늘도 얌전했다. 에키는 바라하가 시키는 대로 빗질을 하고, 안장을 채우고 안장가방 등의 마구(馬具)를 하나하나 챙겼다. 혹시나 또 유리엔이 나타날까 봐 내심 긴장했지만 다행히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느지막한 오후가 되자 바라하가 말했다.

“여기까지. 아무리 그래도 내일이 순위전이니.”

“전 정말 괜찮은데요.”

“어차피 나도 오후에는 로드께 가 봐야 해. 그러고 보니 어제는…….”

바라하가 말하다 말고 이맛살을 찌푸렸다. 어제 단장의 말을 듣고 바론을 찾아갔던 게 생각났다.

〈퇴근하기 전에 한 번만 들리라는 거였는데. 벌써 왔나?〉

왜 부르셨냐고 묻자 바론이 당황하며 한 말이 저것이었다. 유리엔 단장이 바론의 말을 잘못 들었던 걸까.

“바라하 선배님?”

“어, 아무것도 아냐. 어쨌든 나도 가봐야 하니까, 여기까지만. 내일 순위전 잘해라. 구경하러 갈 테니.”

“네, 알겠습니다. 오늘도 수고하셨어요.”

에키가 드레스 자락을 쥐고 가볍게 인사를 했다. 그녀가 워낙 태연한 터라, 바라하는 끝까지 그녀의 몸상태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와 헤어져 마구간을 나온 다음 에키는 곧바로 근처의 수돗가로 향했다. 지푸라기와 먼지를 털어내고 손을 씻은 다음, 찬물에 손수건을 적셔서 뺨에 꾹 눌렀다. 열이 오르자 어질했다.

“가서 잠이나 자야겠다.”

[너 아픈 건 처음 보는 것 같다. 다치는 건 많이 봤는데.]

“몸이 단련이 안 되어 있으니 별 수 없잖아. 제대로 몸 만들려면 1년은 잡아야…….”

퉁명스럽게 대꾸하던 에키는 뚝 말을 멈췄다.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다지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의 기척이었다.

‘이안 펠레트로.’

되도록 피하고 싶었지만, 수돗가의 입구는 하나였다. 이안은 수돗가 쪽으로 오고 있었다.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에키는 한숨을 쉬고 손수건을 챙긴 다음 입구 쪽으로 향했다. 역시나 입구로 나가자마자 다가오는 이안이 보였다. 이안은 밝게 웃었다.

“아, 에키네시아 생도, 찾고 있었어. 바라하 생도가 조금 전에 마구간에서 헤어졌다고 해서, 혹시 수돗가에 있지 않을까 했는데.”

“안녕하세요, 선배님. 무슨 일이신가요?”

“신입생 순위전 대진표를 정해야 하거든.”

이안이 품에서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그가 입구를 묶은 줄을 풀고 약간 벌린 주머니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전적이 없으니까, 추첨으로 대진표를 정해. 뽑아보렴.”

“네.”

에키는 순순히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접힌 쪽지들이 안에 있었다. 그 중에 아무것이나 쥐는데, 이안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네가 3위 안에 들어서, 마물 토벌 때 꼭 참가할 거라고 결심했다며?”

“아……. 네. 바라하 선배님께 들으셨나요?”

“응. 하긴, 단장님의 스콰이어가 될 생도가 3위 안에도 들지 못하면 말도 안 되지. 안 그래? 아, 부담을 주려는 의도는 아니야.”

“네, 알아요.”

별로 길게 대화하고 싶지 않았다. 에키는 대강 대답하며 쪽지를 뽑았다. 접혀 있는 종이를 펴보니 8번이라고 쓰인 숫자가 보였다.

“운이 나쁜 편이네, 에키네시아 생도.”

이안이 혀를 차더니 대진표를 꺼내 8번 칸에 에키의 이름을 적었다. 그리고 그것을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순위전은 토너먼트 방식이었다. 이긴 사람이 올라가고 진 사람은 떨어지는 구조. 당연히 대진운에 따라 실력이 좋아도 낮은 순위를 기록하게 되는 경우가 있었다.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 결투로 순위를 바꿀 수 있긴 하지만.

“첫 상대가 미하일 생도야. 미하일 생도는 알고 있지?”

에키의 이름 옆에는 미하일 폰 프랑 알마리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기오사 오너 테레사의 남동생. 파티마가 이야기했던, 가장 주시하는 세 명의 1학년 중 하나.

“이기고 올라가면 다음은 앨리스 생도네. 뭐, 앨리스 생도는 네가 결투로 이겼었으니까. 물론 미하일 생도부터 이겨야겠지만. 난 네가 잘하리라 믿어. 기대할게.”

이안이 웃는 얼굴로 에키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 대진표가 우연일까. 우연이 아니라는 직감이 강하게 들었지만 에키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어차피 대진표가 어떻게 되건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이안이 아무렇지도 않은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무어라 말을 하려는 찰나, 에키가 움찔 몸을 굳혔다. 예민한 그녀의 감각에 다른 사람이 느껴졌다. 정갈한 걸음걸이. 유리엔이 근처를 지나가고 있었다.

“에키네시아 생도?”

이안이 의아하게 그녀를 불렀다. 에키는 얼른 긴장한 기색을 지웠다.

“네, 선배님.”

물론 겉으로만 지웠을 뿐, 온 감각은 유리엔 쪽으로 가 있었다. 유리엔은 마구간 입구 쪽으로 향하다가 갑자기 멈췄다.

그녀만큼은 못되어도 유리엔 역시 감각이 넓을 것이다. 수돗가 앞에 있는 에키와 이안의 존재를 알아채기엔 충분할 만큼. 그가 마구간으로 들어가는 대신 수돗가 쪽으로 오기 시작했다.

‘실피드 가지러 온 거면 실피드한테 가지, 왜 이쪽으로 오는 거야…….’

안 그래도 어지럽고 피곤한데. 속으로 투덜거리던 에키는 문득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처음부터 날 확인하러 온 건가?’

그녀가 마검의 악마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고 있다면, 그녀를 계속 관찰하려 하는 게 당연했다.

다른 사람과 단둘이 있으면 불안하게 여길지도 모른다. 그의 입장에선 언제 돌변할지 모를 살인마가 자신의 터전에서 돌아다니는 거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자주 마주치는 게 자연스러웠다. 계속 감시하고, 그녀가 모르는 곳에서 매일 보고를 듣고 있을 수도 있다. 하루빨리 스콰이어로 만들어 시야에 닿는 곳에 두고 싶어 할 것이다. 그녀가 시한폭탄으로 보일 테니.

만약, 기억이 없으며, 작년의 탄신 연회 때 그녀에게서 뭔가를 본 탓에 그녀를 주시하고 있는 경우라면, 자꾸 마주치는 이유는…….

〈아니, 개인적인 관심이었다.〉

유리엔이 했던 말이 뇌리에 맴돌았다. 에키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열이 올라 머리가 이상해졌나. 난데없이 낭만소설 같은 상상이 떠오르고 난리다.

“에키네시아 생도, 내 말 듣고 있어?”

“아, 네? 죄송합니다. 뭐라고 하셨었죠?”

“브레드 생도가 너한테 사과하고 싶다는데.”

“……네?”

이건 또 무슨 개소리지. 하도 어이가 없어서 유리엔에 대한 생각마저 날아가 버렸다. 이안은 부드럽게 웃는 얼굴로 말했다.

“뒤늦게 생각해 보니 여러모로 자신이 실수한 것 같다고, 사과하고 싶다고 해서. 브레드 생도가 너하고 만날 자리를 만들어 달라고 나한테 부탁을 했거든. 넌 어떻게 생각하니?”

“만나서 사과하고 싶다고 했다고요? 저한테, 브레드 선배님이?”

“응. 네가 용서해 줄 마음이 없으면 거절해도 돼. 그 녀석이 사과하고 싶다고 해서 네가 사과를 받아줄 의무가 있는 건 아니니까.”

대체 무슨 수작일까. 에키는 미간을 모았다. 브레드 폰 포움을 그녀가 잘 아는 건 아니지만, 그 짧은 만남만으로도 그가 반성할 거란 생각은 도저히 들지 않았다.

하다못해 에키가 순위전에서 뒷말이 나올 수 없는 실력을 보인 이후라면 몰라도, 아직 순위전도 하지 않은 상태다. 게다가 이 말을 전해 주는 게 이안 펠레트로란 말이지. 수상한 냄새가 풀풀 났다.

“……언제 만나자고 하시는데요?”

“가능하면 오늘 저녁이라도 만…….”

이안의 말끝이 흐려졌다. 에키는 그가 말을 멈춘 이유를 잘 알았다. 이안이 급히 인사를 했다.

“아르 세밧티엠. 단장님을 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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