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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든 꽃-23화 (23/211)

검을 든 꽃 23화

저도 모르게 앨리스의 눈이 에키의 동작을 좇았다. 이상적으로 여기던 검이 펼쳐진다. 그녀는 에키의 검을 지켜보느라 들어오는 공격을 반사적으로 막기만 했다. 결투 때 에키네시아가 앨리스의 검을 막기만 하던 것처럼.

그러자 에키의 검이 약간 바뀌었다. 넋을 놓고 그것을 지켜보던 앨리스는 금세 알아차렸다. 에키네시아는 지금, 그 결투 때 앨리스가 했던 공격을 똑같이 따라하고 있었다.

목을 스쳐가는 속임수, 물러남, 다시 앞으로 다가오며 상단 베기, 가로막히는 순간 빗겨 흘러내리고, 종아리를 노리며 찌른다.

오싹 소름이 돋았다. 손아귀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검을 나누는 중에 손에서 힘을 뺀다는 건 치명적인 일이었다. 에키의 검과 부딪힌 앨리스의 검은 그녀의 손에서 벗어나 날아갔다. 떨어진 검이 잔디밭을 굴렀다.

앨리스는 혼이 빠져나간 듯한 얼굴로 에키를 바라보았다. 에키는 검을 거두었다. 날아간 앨리스의 검 쪽으로 다가가, 그것을 주워 앨리스에게로 내밀었다.

“더 할래요?”

“방금, 방금 그건, 대체……? 대체 뭐였습니까? 어떻게?”

“네? 더 안 할 건가요?”

에키는 뻔뻔한 얼굴로, 그러나 내심은 조심스럽게 앨리스의 기색을 살폈다.

앨리스가 만약 브레드 같은 인간이었다면 미친 듯이 화를 냈을 것이다. 혹은 그녀에게 검을 보는 눈이 부족했다면 에키네시아가 뭘 한 건지 알지도 못했을 것이다. 또한 그녀가 검을 진지하게 파고드는 성격이 아니었다면 이 순간 느껴지는 불쾌감을 더 중시했을 것이다.

보고 따라잡을 자신이 없었다면 절망에 휩쓸렸을 것이다. 속이 좀 더 좁았다면 열등감에 빠져 질투했을 것이다.

그러나 앨리스는 어느 쪽도 아니었다. 그녀는 커다랗게 뜬 눈으로, 더듬더듬 에키가 내민 제 검을 받아들었다.

“다, 다시, 다시 부탁드립니다.”

에키는 대답하지 않고 검을 들었다. 그녀는 똑같은 방식으로 공격했다. 앨리스가 했던 것처럼, 그러나 점점 더 완벽한 형태로.

에키네시아의 공격은 같은 순서로 들어왔지만 반복될 때마다 조금씩 더 깔끔해졌고, 받아치는 앨리스는 계속해서 다르게 그것을 막아보았다.

그녀는 그 뒤로 몇 차례 더 검을 놓쳤다. 그때마다 에키는 기다렸고, 앨리스는 급하게 다시 검을 주워서 자세를 잡았다. 한마디 말도 없이 대련이 이어졌다.

해가 기울기 시작할 때쯤, 에키는 검을 거두었다.

“수고했어요, 윈터벨 양.”

앨리스는 온몸이 흠뻑 젖어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숨을 몰아쉬었다. 에키 역시 앨리스 정도는 아니어도 땀투성이였다. 일부러 마나를 사용하지 않고 순수하게 검을 휘두른 탓이다.

에키가 아까 내던졌던 검집을 주워 검을 집어넣는 동안, 앨리스는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 듯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녀는 에키가 연무장 밖으로 걸음을 옮기자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로아즈 양!”

“네, 윈터벨 양.”

“지금……. 그러니까, 당신이, 저한테…….”

앨리스는 횡설수설했다. 에키는 잠깐 기다리다가 말했다.

“대련을 했죠.”

“예?”

“생도끼리 그저 대련한 것뿐이에요. 흔한 일이잖아요, 사관학교에서는?”

에키가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말에 앨리스의 표정이 변했다. 그녀는 침착해진 눈으로 에키를 바라보았다.

“전 바보가 아닙니다.”

앨리스의 목소리 끝이 가늘게 떨렸다. 에키네시아 로아즈만 아니었다면 이번 년도 수석이었을 그녀는, 뛰어나기에 더 명확하게 알아차렸다.

에키네시아는 앨리스에게 기연을 베풀었다. 그녀와 같지만 더 발전되고 완벽한 검술을 반복적으로 보여 주었다. 앨리스가 앞으로 걸어야 하는 길을 직접 손을 잡고 이끌어준 거나 다름없었다.

잡다한 잔상 따위는 하나도 남지 않았다. 목표로 하던 형태를 눈앞에서 보았기 때문에.

대련하는 내내 에키네시아는 말이 없었다. 그러나 앨리스는 그녀가 하는 말을 쉼 없이 들은 기분이었다. 귀가 아니라 몸과 눈으로.

이렇게 움직이면 조금 더 나아질 거야. 여기서는 이런 식으로 하는 편이 네게 어울리면서도 더 유용할 거야. 이 경우에는 팔꿈치를 올리는 게 검에 실리는 힘이 달라져서 위력적이야. 이럴 때는 조금만 각도를 달리하면 더 예리해지지.

네 검은 더 강해질 수 있어. 봐, 이렇게. 헤맬 필요 없어. 이렇게 하면 돼.

이것이 얼마나 엄청난 행운인지 알기 때문에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앨리스는 오늘 이후 자신의 검이 완전히 달라지리란 것을 예감했다. 그녀는 보다 날카롭고 보다 예리해질 것이다. 속에서 무언가가 벅차올라 말이 더듬거렸다.

“로아즈 양, 당신이, 제게…….”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에키가 앨리스의 말을 끊었다. 그녀는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리는 땀을 손등으로 훔치며 못을 박듯이 다시 말했다.

“아무것도, 안 했어요. 그냥 당신이랑 대련을 했을 뿐이니까.”

“……아무것도 안 했다고요?”

“네, 수련을 방해해서 미안해요. 전 좀 씻어야겠어요. 욕실 먼저 쓸게요, 윈터벨 양.”

에키는 장갑에 묻어난 땀을 찝찝한 것 보듯 노려보고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앨리스는 멍하니 멀어지는 그녀를 보다가 급하게 뒤따라왔다. 나뭇가지에 걸어둔 재킷을 챙길 정신도 없었다.

“로, 로아즈 양. 당신은 대체……. 그러니까……. 진심입니까? 방금 그 대련이, 그냥 대련이라고요?”

“대련이 대련이지, 뭐 다른 게 있나요?”

“……이 대련 이후 제 검이 완전히 달라진대도 말입니까?”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이 있겠어요? 윈터벨 양이 노력한 결과겠죠.”

“아뇨, 당신 덕분입니다.”

앨리스가 정직하게 말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곧았다. 에키를 보는 시선이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묘하게 반짝거리는 느낌.

에키가 노렸던 것은 자신이 결투 때 앨리스에게 남긴 검의 잔상을 더 강렬한 이미지로 지우는 것이었다. 그것을 위해 앨리스를 자극했고, 그녀에게 가장 인상적일 잔상, 즉 앨리스의 검술을 보여주었을 뿐이다.

누군가 자신을 흉내 내는데, 더 잘하면 얼마나 기분이 나쁘겠는가. 그게 얼마나 도움이 되건 간에 화를 내거나 불쾌해할 거라고 예상했다.

“감사합니다, 로아즈 양.”

그러니 이렇게 반짝이는 눈으로 쳐다볼 줄은 몰랐다. 대놓고 감사 인사를 할 줄은 더더욱 몰랐고, 에키는 몹시 당황했다. 그녀는 그 시선을 피해 눈을 돌리며 딱 잘라 말했다.

“감사인사를 들을 일을 제가 했던가요? 대련을 한 번 했을 뿐인데.”

앨리스가 뚫어져라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빙그레 웃었다.

“알겠습니다. 그렇다고 치지요.”

그 웃음을 보자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에게 바짝 붙어 걸으며 쏟아지는 시선을 받으니 부담스럽기까지 했다. 얼굴이 달아오를 것 같아서 그녀는 톡 쏘듯이 말했다.

“……좀 떨어져서 걸어요, 윈터벨 양.”

“네?”

“땀 냄새 나요.”

“…….”

앨리스는 멍하니 에키를 보더니 두어 걸음 떨어졌다. 거리를 두고 걸으며 그녀가 항변하듯 말했다.

“……로아즈 양도 땀 냄새가 납니다만.”

“알아요, 그래서 씻으러 가고 있잖아요. 다시 말해 두지만 제가 먼저 씻을 거예요. 먼저 말했으니까.”

“네, 알겠습니다. 먼저 욕실 쓰세요.”

일부러 톡 쏘며 말하는데도 앨리스는 묘하게 웃고 있었다. 기분이 몹시 좋아 보였다. 정확히는 기분이 좋다 못해서 반짝이는 시선이 에키에게서 떨어지지가 않았다.

전나무 숲의 오솔길을 걸으며 앨리스가 중얼거렸다.

“제가 로아즈 양에 대해 많이 오해를 하고 있었군요.”

“……아뇨, 뭔지 몰라도 오해 아닐 거예요.”

“겉보기에 휘둘리다니, 기사가 될 자격이 없는 건 저였습니다.”

“저기요, 윈터벨 양?”

“저는 당신이 검에 관심도 없고, 기사의 길을 진지하게 생각하지도 않는 사람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제가 편견에 찌들어 있었군요. 조금 전의 대련을 통해 깨달았습니다. 당신은 사실은 누구보다 검을 진지하게 대하는 사람입니다. 로아즈 양, 사소한 외양에 매몰되어 당신을 멋대로 판단해서 미안합니다.”

진지하고 정중한 사과였다. 에키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마구 저었다.

“아뇨, 윈터벨 양. 그거 편견 아니에요. 저 검 별로 안 좋아해요.”

“네, 알겠습니다. 그것도 그렇다고 치지요.”

앨리스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녀를 바라보는 회색 눈동자가 너무 맑고 곧아서, 에키는 할 말을 잃고 시선을 돌려버렸다. 이런 식의 호의는 받아본 적이 없어서 적응이 되질 않았다.

스무 살 이전까지는 가족과 니콜을 제외하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귀족영애들과의 친분만이 있었다. 지워버린 과거에는 마검 시절의 저주와 원한, 또는 그 이후 기오사를 모으던 시절의 메마른 관계들뿐이었다.

이렇게 깨끗한 호감이라니. 그것도 그녀를 뭔가 대단한 사람처럼 착각하고 있는 상태의. 차라리 불쾌해했으면 쉽게 대응했을 텐데. 더 큰 문제는 민망하면서도 따뜻한, 묘한 기분이 든다는 점이었다.

에키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앨리스 쪽을 돌아보지 않고 빠르게 걸었다. 방에 도착하자마자 냉큼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앨리스는 앞서서 방문을 열었던 에키가 뒤따라 들어오는 자신을 위해서 잠깐 문을 잡고 있던 것을 보았다. 그녀는 에키가 욕실로 들어갈 때까지 웃음을 참느라 애썼다.

* * *

다음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에키는 몸이 무거운 것을 느꼈다.

[그러게 왜 마나를 안 썼어?]

앨리스는 새벽부터 어제 얻은 것들을 몸에 완전히 체득하기 위해 나가서 없었다. 에키는 침대에 푹 파묻힌 채 손을 들어보았다. 흰 장갑을 벗기고 맨손을 보자 보드라운 손에 물집이 잡힌 게 보였다.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아니, 앨리스 윈터벨이 너무 진지해서.”

[야, 너 자꾸 옛날 몸이 아니라는 거 까먹는 거 같다?]

“시끄러. 마나 쓰면 똑같아.”

[어젠 안 썼잖아.]

“분위기에 휩쓸렸다고.”

확실히 몸 상태가 나빴다. 워낙 요령과 기술이 좋아서 실제 체력보다 훨씬 잘 버티긴 하지만, 그녀의 몸은 검을 잡은 지 두 달도 되지 않은 귀족영애 그 자체였다.

마나로 받쳐주지 않으면 아무리 효율적으로 몸을 움직여도 한계가 있었다. 한창 움직일 때야 열이 올라 있으니 잘 티가 나지 않지만, 다음 날엔 이런 식으로 후유증이 오게 되는 것이다.

온몸이 근육통으로 비명을 질렀다. 이마를 짚어보니 열도 약간 있었다.

에키는 장갑을 도로 끼고 비척비척 일어나며 신음을 흘렸다.

“아야야.”

[어휴, 등신.]

“망할 마검, 닥치지 못해?”

투덜거리며 침대에서 벗어나던 그녀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쟁반을 발견했다.

기숙사의 방은 양쪽에 각자의 침대, 책상, 옷장, 서랍장이 있었고 중앙에 테이블과 의자, 책장, 소파와 러그가 있는 형태였다. 사이에 커튼을 칠 수 있어서 제법 개인 공간이 보장되었다.

그 커튼을 젖히고 욕실로 가려고 나오니 테이블 위가 눈에 띈 것이다. 쟁반에는 뚜껑이 덮인 수프 그릇과 빵, 샐러드, 음료 컵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공용식당에서 가져다 놓은 아침식사가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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