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22화
파티마가 눈을 휘며 웃었다. 눈동자가 커서 눈매가 가늘어지면 흰자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런 점도 강아지 같이 예쁘다. 그리고 에키는 예쁜 것을 좋아했다.
클럽에 들라며 계속 귀찮게 구는 파티마가 싫지 않은 이유 중에는 그 외모도 있었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그녀가 소문 따위에 휘둘리지 않고 에키를 바라보기 때문이지만.
“난 위즈덤의 초대 클럽장이라고. 내 감이 말하는데, 넌 진짜, 진짜 대박 날 인재야. 그러니까 다른 클럽들이 눈치채기 전에 빨리 침 발라놔야 해.”
“저한테서 뭘 보고 그러시는지 모르겠어요, 선배님.”
“내가 신입생들을 얼마나 열심히 보고 다니는데. 결투나 훈련도 거의 다 봤어! 영입대상 리스트도 있단 말이야. 물론 에키네시아 로아즈, 네가 영입대상 1번이야!”
“그 리스트에는 또 누가 있는데요?”
에키는 피식 웃으며 물었다. 그녀가 관심을 보이자 파티마가 확 밝아진 얼굴로 손을 꼽았다.
“일단, 내가 제일 주시하는 건 널 포함해서 세 명이야. 장담하는데, 이 셋이 신입생 순위전에서 1위, 2위, 3위가 될 걸. 그럼 너도 내 안목을 인정하겠지? 우선 기오사 오너인 테레사 폰 프랑 알마리 경의 남동생 되는 미하일 생도랑…….”
에키는 아슬아슬하게 동요를 숨길 수 있었다. 테레사의 남동생이라면 그녀가 아는 사람이었다. 회귀 이전에 아젠카에서 죽였던 기억이 있으니까.
금발의 여기사가 자신과 꼭 닮은 소년의 시체를 끌어안고 울부짖던 모습이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그녀가 흠칫한 것을 알아채지 못한 파티마는 생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너랑 룸메이트인 앨리스 윈터벨 생도! 그 애도 정말 훌륭하지. 진짜배기 인재야. 지금은 좀 슬럼프인 것 같지만.”
“……슬럼프요? 윈터벨 양이?”
“너흰 룸메이트인데 서로를 되게 어색하게 부른다? 사이 안 좋아? 하긴 첫날부터 결투했었지.”
파티마가 갸웃거렸다. 그녀와 대화하며 걸었더니 벌써 여자 기숙사가 보였다. 파티마는 기숙사 뒤에 조성된 전나무 숲을 가리켰다.
“숲 안에 제9연무장 있는 거 알지? 앨리스 생도는 주로 거기에서 훈련해. 한 번 가서 보면 너도 알걸. 가봐. 네가 꼭 봐야 할 거 같아.”
“제가 봐야 할 거라고요?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내가 보기엔, 앨리스 생도가 슬럼프에 빠진 게 아무래도 너 때문인 것 같거든.”
예상치 못한 말에 에키는 당황해서 눈만 깜박였다. 파티마가 묘한 미소를 짓더니 에키의 등을 툭 밀었다.
“룸메이트끼리는 친하게 지내야지! 너흰 잘 맞을 거야!”
잘 맞는다니, 그럴 리가. 에키가 무어라 하기도 전에 파티마는 손을 흔들고는 빠르게 달려갔다.
“조언해 줬으니까, 친해지면 둘이 같이 위즈덤에 들어오는 거다? 설마 배신하진 않겠지? 기다릴 거야!”
“…….”
에키는 황당한 눈으로 멀어지는 땋은 머리를 바라보았다. 이어 기숙사 뒤 전나무 숲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앨리스 윈터벨에게는 내내 미안한 감정이 남아 있었다. 자신이 편하자고 일부러 그녀를 긁어놓고, 결투까지 대강 해버린 데다, 여러모로 안 좋은 모습을 많이 보여줬다. 자신 때문에 슬럼프라는 파티마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지만…….
[가보려고?]
“일단은.”
그녀는 숲 안쪽으로 향하는 오솔길에 발을 들여놓았다. 어차피 할 일도 없었다. 바라하가 자리를 비웠으니 스콰이어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유리엔 문제는 생각해 봤자 마물 토벌 때까지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마검의 출처에 대해서는, 자세한 조사 상황을 알려달라는 전보를 니콜에게 보내놓았다. 답장이 올 때까지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딱히 없었다.
순위전을 대비해서 훈련한다는 건 그녀의 실력을 생각해 보면 무의미한 짓이고.
하늘을 향해 울창하게 뻗은 전나무들 사이로 햇빛이 내리꽂혔다. 숲 안쪽은 조용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숲의 냄새가 깊게 몸을 휘감았다. 제9연무장은 숲을 가로지르는 오솔길에서 약간 벗어난 곳에 그저 숲 속의 빈터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자리 잡고 있었다.
사관학교의 연무장은 무척 많았다. 그러니 이런 외진 곳에 있는, 별다른 시설조차 없는 연무장은 생도들이 잘 찾지 않는다. 주위에 느껴지는 인기척은 딱 한 명이었다.
제9연무장의 바닥은 다른 연무장과 달리 잡초와 잔디가 뒤섞인 풀밭이었다. 그 한가운데에서 땀에 젖은 흰 셔츠 차림의 여자가 검을 움직이고 있었다. 검푸른 생도복 자켓이 근처의 나뭇가지에 아무렇게나 걸려 바람에 간간이 흔들렸다.
다른 사람의 훈련을 훔쳐보는 건 무례한 일이었다. 에키는 일부러 발걸음 소리나 기척을 죽이지 않고 연무장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검에 정신이 팔린 앨리스 윈터벨은 그녀가 다가오고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에키는 연무장의 가장자리에 선 채 앨리스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가상의 적을 상대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전나무 가지 사이로 떨어진 햇빛이 그녀의 짧은 금발 위로 부서졌다. 땀방울이 검의 궤적을 따라 후두둑 흩뿌려진다.
에키네시아는 불공평하게 느껴질 정도의 천재였다. 그녀에게 주어진 불행이 그 거대한 재능을 타고난 대가가 아닌가 의심될 정도로. 제대로 검을 익힌 적이 없음에도 마스터 이상의 경지에 이른 바탕에는 그 재능이 있었다.
물론 무지막지한 실전 경험과 몸으로 체득한 마검이 움직이는 방식 덕도 크긴 했다. 마검은 살육을 위해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움직이며, 검술이란 곧 효율적으로 상대를 죽이는 방식이니까.
그래서 그녀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앨리스의 무엇이 문제인지, 원인이 어떤 것인지,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까지도.
앨리스의 회색 눈동자는 그녀가 원래 가지고 있던 품위를 잃고 방황하고 있었다. 그녀의 검은 제 길을 잃었다. 그리고 그건 파티마의 말대로, 에키네시아의 탓이었다.
‘나와 했던 결투 때문이었구나.’
앨리스의 검은 원래 빠르고 정확하며 정제된 형태였다. 딱 한 번 결투해 보았을 뿐이지만, 그녀의 검술은 우아하게 느껴질 정도로 깔끔했었다.
그런데 지금의 그녀는 그 정확성을 잃고 마구잡이로 검을 휘둘렀다. 자세가 투박하게 무너졌다. 어울리지 않는 거친 궤적이 그녀의 검술에 섞여 들어갔는데, 본인과 맞지 않아서 기존의 장점마저 흐트러지고 있었다.
결투했을 때 에키의 검이 그녀에게 영향을 준 모양이었다. 그 투박하고 자기 색조차 없는 조건반사에 가까웠던 검의 잔상이 지금의 앨리스에게서 보였다. 아무래도 에키네시아 같은 괴상한 생도에게, 그것도 입학 첫날에 겪은 패배니 충격적이었겠지.
해결 방법은 간단했다. 그 잔상을 지워버리고 원래의 앨리스다운 검으로 돌아가면 된다. 그러나 잊어버리려 한다고 쉽게 잊힐 만한 일이었다면 애초에 잔상으로 남지도 않았을 것이다. 앨리스 스스로 벗어나려면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할 터다.
에키는 한동안 고민했다. 타인의 검에 참견하는 건 무례한 일이었다. 그녀가 상급자나 선배도 아니고, 그렇다고 앨리스와 절친하지도 않다. 오히려 사이가 나빴다.
정식으로 검을 배워본 적이 없는 에키는 누군가를 가르쳐 본 적도 당연히 없었다. 앨리스가 그녀에게 도와달라고 한 것도 아니다. 도와주려 하면 오히려 모욕으로 느끼거나 화를 낼지도 모른다.
어떻게 생각해도 못 본 척 이대로 돌아서는 게 정답이었다. 그러나 에키는 얕게 한숨을 쉰 다음, 들고 다니던 싸구려 롱소드를 뽑았다.
검집을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던지고 앨리스가 휘두르는 검의 반경 안으로 발을 들였다. 눈먼 칼날이 옆구리 쪽으로 베어오는 것을 가볍게 막았다.
챙, 하고 칼날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
그제야 에키네시아의 존재를 눈치 챈 앨리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지간히 집중하고 있었던 듯했다. 맞닿은 검을 떨어뜨리며 그녀가 뒤로 물러났다. 앨리스가 흐트러진 호흡을 가라앉히는 동안 에키는 검을 늘어뜨린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로아즈 양?”
앨리스가 싸늘하게 물었다. 에키는 생긋 웃었다.
“저랑 대련 한 번 해요, 윈터벨 양.”
“제가 받아본 것 중에서 가장 무례한 대련 요청이군요. 당신은 정말이지…….”
앨리스의 낯이 일그러졌다. 지금부터 훨씬 더 무례할 일을 할 예정인 에키는 그녀의 지적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제부터 그녀가 할 일은 기사들의 입장에서 보면 기적에 가까운 행운이었지만, 그녀는 그에 대한 감사나 보답을 바랄 생각은 없었다.
‘욕이나 먹지 않으면 다행이지. 그래도 이게 가장 확실하고 빠르게, 내 잔상을 지워버릴 방법이니까.’
에키가 검을 똑바로 겨누었다. 그녀는 비웃듯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저한테 지는 것이 두려운가요?”
앨리스의 눈동자에 불이 붙었다. 그녀의 눈썹 끝이 파르르 떨린다. 검을 쥔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가는 게 보였다. 앨리스는 이를 악문 채 대꾸했다.
“기사가 될 자가 패배를 두려워할 거라고 생각합니까? 그런 문제가 아니잖습니까.”
“그럼 그냥 대련하면 되잖아요. 저 하고 대련해요, 윈터벨 양.”
“방식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혼자 수련 중인 사람의 검에 제멋대로 끼어들어 막아놓고서 대련이라니요?”
“아, 그건 미안해요. 워낙 집중하고 있어서 부르기가 미안했어요.”
“부르는 것보다 끼어드는 것이 훨씬 무례합니다!”
“그건 미처 몰랐네요.”
에키가 눈을 깜박이며 대꾸했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화를 돋우려고 일부러 끼어들었다. 정중하게 대련을 청하면 별로 자극이 되지 않을 테니까. 예상대로 앨리스는 왈칵 화를 내었다.
“당신은 정말로, 기사가 될 생각이 있긴 합니까? 검을 쥔 자가 예절도 법도도 지키지 않으면 뒷골목의 무뢰배들과 뭐가 다릅니까?”
“앞으론 주의하죠. 어쨌든 그래서 대련할 거예요, 말 거예요?”
그녀는 땅에 짚은 롱소드를 장난치듯 빙글빙글 돌리며 물었다. 검에 대한 존중이라고는 정말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앨리스는 분노로 붉어진 얼굴로 제 검을 고쳐 쥐었다.
“검을 드십시오.”
“고마워요. 귀찮은 인사는 생략해요, 우리. 그럼.”
에키는 제멋대로 결정하고는 검을 들어올렸다. 앨리스가 자세를 바로 잡을 틈도 주지 않고 곧바로 찔러 들어갔다. 당황한 그녀는 어정쩡한 자세로 검을 받았다.
그것을 시작으로, 에키네시아는 결투 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쉼 없이 공격이 몰아쳤다. 빠르고, 정확하고, 군더더기가 없는 방식으로.
종아리까지 오는 드레스 자락이 그녀의 다리에 휘감겼다가 풀리길 반복했다. 가느다란 여성용 구두가 남기는 발자국이 일정한 박자를 이루었다.
앨리스는 정신없이 그녀의 공격을 막아내다가 어느 순간 그 리듬을 알아차렸다. 찔러 들어오는 검의 궤적, 팔의 움직임, 시선의 처리, 방어하는 형태, 스텝, 무게중심을 옮기는 법.
‘말도 안 돼.’
결투 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깔끔하고 우아한 검술. 잘 정련된 동작. 너무나 익숙한 방식이었다. 에키네시아는 앨리스와 완전히 똑같은 검술을 펼치고 있었다.
‘아냐, 이건 오히려 더……!’
같지 않다. 이런 기분을 느껴본 적이 있었다. 사관학교에 오기 전, 앨리스에게 검술을 가르쳤던 기사와 대련할 때. 자신과 같지만 보다 완성된 검술을 보는 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