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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든 꽃-21화 (21/211)

검을 든 꽃 21화

“바라하.”

“아르 세밧티엠. 예, 단장님.”

“바론 경이 그대를 찾고 있다. 가 보도록.”

“알겠습니다. 에키, 솔질을 마저 해 주고 돌아가. 나머진 다음에, 아, 혹시 단장님, 실피드를 쓰려고 오신 겁니까?”

바라하는 에키를 가르치기 시작한 이후, 그녀의 청에 따라 그녀를 애칭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에키를 향해 말을 하던 그는 유리엔에게 말을 쓸 거냐고 물으려 고개를 들었다. 그가 고작 스콰이어를 부르는 것을 전달하러 마구간까지 왔을 리는 없으니까.

“그래. 스콰이어 예비 교육 중이었나?”

담담히 답하는 유리엔의 시선이 가까이 붙어 있는 그들 사이에 머물렀다. 바라하는 본능적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고는 스스로의 행동에 의아함을 느꼈다. 내가 왜 물러났지?

“예, 그렇습니다. 그저 솔질 중이었을 뿐이니, 중단해도 괜찮습니다. 에키, 마무리하고 돌아가도록 해.”

“……네, 선배님.”

에키는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전혀 대비하지 않은 상황에서 유리엔이 등장한 순간부터 그녀의 정신은 반쯤 나가 있었다. 그녀가 이상해 보여서 바라하가 무언가 말을 더 하려는 찰나, 유리엔이 말했다.

“바라하. 바론 경에게 가보라고 했을 텐데.”

“아……. 네, 감사합니다.”

바라하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고는 마구간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에키는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얼른 솔과 발굽파개를 통 안에 정리했다. 마음이 급하니 손놀림이 어설펐다. 통의 테두리에 부딪힌 솔이 밖으로 굴러 떨어졌다.

유리엔이 그것을 주워 들었다. 에키는 멍하니 그가 내미는 솔을 보았다. 푸른 눈이 가만히 그녀를 들여다본다. 그가 나직이 물었다.

“내가 불편한가?”

“네?”

“대련을 청한 것이 부담스러웠다면…… 잊어도 된다.”

바보가 된 것 같았다. 그의 행동과 그가 무슨 생각일지에 대해 그렇게 열심히 생각해 놓고서는, 정작 예상치 못한 순간 그의 앞에 서니 하나도 생각나지가 않았다.

대련이란 단어를 듣고서야 겨우, 그녀는 자신이 그에 대해 추리했던 것들을 떠올렸다. 에키는 간신히 손을 움직여 솔을 받아 들었다.

“아닙니다, 단장님.”

“아니라니, 무엇이?”

“대련이 부담스럽다기보다는, 과분했을 뿐이에요. 마음의 준비가 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그리고 전에 망토는 감사했습니다. 곧 돌려 드릴게요.”

에키는 빠르게 말을 쏟아놓으며 솔을 통 안에 던져 넣었다. 도망치듯 돌아서려는 그녀를 유리엔의 말이 붙잡았다.

“불편한 건 사실이란 뜻이군.”

“…….”

그에게는 되도록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입을 다물었다.

에키는 당연히 유리엔이 불편했다. 그의 앞에 있으면 온 정신이 그에게 쏠리며, 온갖 추측이 뇌리를 점령한다.

나를 증오하고 있을까, 기억이 있는 걸까, 지금 나를 관찰하고 있는 걸까, 내가 마검의 악마인지 시험하는 걸까.

거기에 이젠 마검의 출처가 그의 가문인 황가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까지 끼어들었다.

의문투성이. 긴장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는 그를 볼 때마다 드는 반가움. 기쁨, 죄책감과, 그리고 아직 남아 있는 부서진 감정의 파편들.

돌아선 등 뒤로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따가운 시선은 아니었다. 곧 안장을 채우는 소리와 고삐를 잡아당기는 소리가 들렸다. 유리엔이 실피드를 꺼내고 있었다.

“그대는 곧 내 스콰이어가 될 테니, 나를 불편하게 여기지 않았으면 한다.”

부담을 주고 싶지 않은지, 다른 행동을 하며 가볍게 홀리듯 하는 말이었다. 에키는 심호흡을 하고 돌아섰다. 실피드의 고삐를 쥔 그가 다가오고 있었다. 금빛이 도는 하얀 말은 은발의 그와 무척 잘 어울렸다.

“하나만…… 여쭤봐도 될까요, 단장님.”

유리엔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파란 눈동자가 그녀를 향했다.

에키는 꿀꺽 침을 삼키고 입 안에서 말을 몇 번 굴렸다. 다음에 그와 마주치면, 이걸 꼭 묻자고 생각했었는데. 그녀의 기억 속에서는 도저히 찾아낼 수 없는 대답이어서. 그녀는 간신히 질문을 꺼냈다.

“작년 탄신 연회 때, 저를 보셨다고 하셨죠. 저는 단장님과 말을 나눈 적도 없는데, 어떻게 저를 아셨나요? 제가…… 무언가 실례를 했던가요?”

그녀의 옆까지 다가온 유리엔이 걸음을 멈췄다. 실피드가 투레질을 하며 따각거렸다. 그의 시선은 언제나 그녀의 영혼까지 뚫어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에키는 오른손바닥을 움켜쥐고 싶은 것을 참았다. 그는 조용히 대답했다.

“그런 일은 없었다. 그저, 그대가 눈에 띄었을 뿐.”

“눈에 띄었다고요? 제 머리카락 때문인가요?”

분홍색 머리칼은 은발보다 더 드물었다. 외가 쪽에서 물려받은 머리색인데, 외가에서도 드문 터라 그녀를 분홍 머리 영애로 기억하는 사람이 꽤 되었다. 그녀의 가문인 로아즈 백작가는 지나치게 무난해서 그녀의 머리색보다도 인상적이지 못했다. 그런 거라면 납득이 갔다.

그러나 유리엔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개인적인 관심이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답이었다. 에키는 얼떨떨하게 되물었다.

“개인적인 관심이라니, 무슨 뜻이신지…….”

유리엔이 웃었다. 웃을 때 살짝 접히는 눈매가 예뻐서 저절로 시선이 갔다. 에키가 그 웃음에 정신이 팔린 사이 그가 한 걸음 다가왔다. 다가오는 손에 그녀가 흠칫 몸을 굳혔다.

그는 어깨 아래로 흘러내린 그녀의 머리카락에 손을 대었다. 길게 굽이치는 분홍색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이 한 마디 정도 파고들었다. 머리를 빗어 넘기듯 움직인 손은 곧 지푸라기를 쥐고 떨어져 나갔다.

유리엔은 그녀의 머리에서 떼어낸 지푸라기를 바닥에 털어버리며 말했다.

“그 질문도, 대련 이후에 답하도록 하지.”

“……대련 요청, 부담스러우면 잊어도 된다고 하셨잖아요.”

에키는 저도 모르게 볼멘소리를 냈다. 유리엔이 이번에는 소리 내어 웃었다. 입가를 손으로 가리고 짧게 웃음소리를 흘렸다. 에키는 또 그 웃음에 넋을 잃었다.

아니, 무슨 남자가 웃는 게 저렇게 예쁘지. 고고하게 생겼으면서 웃기는 또 왜 저렇게 잘 웃고.

“그대가 싫다면 강요할 수는 없겠지만……. 내가, 그만큼 절실히 그대와의 대련을 바란다는 뜻이다.”

유리엔은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더 이상의 물음을 거부하듯 걸음을 옮겼다. 그가 실피드와 함께 마구간 밖으로 나갔다.

에키는 그를 붙잡지 못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긴장했다가 홀렸다가 짧은 사이에 폭풍을 겪은 기분이었다.

[저놈, 기억 있는 것 같아? 왜 저렇게 대련에 집착해? 네 말대로 저놈이 네 정체를 확신하려고 저러는 거야?]

그녀만 남자 마검이 말을 걸어왔다. 에키는 어쩐지 열이 오른 뺨을 손등으로 꾹꾹 문지르며 대꾸했다.

“유리엔을 놈이라고 부르지 마, 발.”

[내 맘이야. 아오, 답답해! 주인아, 랑기오사하고 나하고 한 번만 부딪히게 해주면 안 돼? 그럼 걔한테 말 걸어서 깨어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데.]

“미쳤어? 내가 널 꺼내게?”

[야, 주인아, 그럼 그냥 쟤한테 대놓고 물어보자. 나한테 죽은 거 기억하냐고 물어봐, 응? 뭔 소리냐고 못 알아들으면 농담이라고 하고, 기억한다고 하면 한판 뜨면 되지!]

“넌 되도록 말하지 마라. 속 터지니까.”

에키는 짜증스럽게 오른손바닥을 노려보았다. 마구간 밖으로 걸음을 옮기는 그녀에게 마검이 투덜거렸다.

[그럼 이 애매한 상태로 계속 눈치만 볼 거야?]

“마물 토벌이 곧이야. 그때 바라하 선배를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면 확신할 수 있겠지. 지금은……. 정말 모르겠어. 연회 얘기만 아니었으면 좀 알기 쉬웠을 텐데. 대체 연회 때 나한테서 뭘 본 거야?”

[개인적인 관심이라며, 그게 무슨 뜻인데? 인간들은 보통 어떨 때 저런 말을 해?]

“그…….”

에키는 대답하려다 말고 말을 중단했다. 어떨 때 그런 표현을 쓰냐고? 순간 떠오른 것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유리엔이 자신을 향해 그런 부드러운 감정을 보이는 것을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정확히는, 상상해서는 안 된다.

그녀는 그의 마지막 순간을 되새겼다. 피에 물들어 눈을 감지도 못했던 그를 떠올리자, 삽시간에 몽글거리던 무언가가 바스러졌다. 에키는 쓴웃음을 띠었다.

[왜 말을 하다 말아?]

“사람이 오잖아.”

둘러대는 말은 아니었다. 기숙사 쪽으로 향하는 그녀에게 다가오는 사람이 확실히 있었다.

“오늘도 드레스가 예쁘네, 에키네시아 생도! 연두색도 잘 어울려!”

헤벌쭉 웃는 짙은 피부의 여자는 에키보다 키가 한 뼘쯤 작았다. 한 가닥으로 길게 땋은 검은 머리에, 서부 유목민 출신 특유의 자그만 몸집 탓에 소녀 같은 인상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스물두 살로 에키의 연상인 데다 2학년 선배였고, 위즈덤이라는 클럽의 클럽장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에키네시아에 관한 소문에 아랑곳하지 않는 생도들 중 하나였다. 심지어 드레스 차림까지 예쁘다며 좋아했다. 어떻게 보면 바라하보다도 특이한 생도였다.

“안녕하세요, 파티마 선배님.”

에키는 대강 인사를 하고 그녀를 지나쳐 걸었다. 파티마가 종종거리며 그녀를 따라왔다. 폴짝거리는 걸음을 따라 길게 땋은 머리가 달랑거리는 게 강아지 꼬리 같았다. 그녀가 머루알처럼 까만 눈을 초롱거리며 에키를 올려다보았다.

“에키네시아 생도, 칭찬해 줬으니까 우리 클럽 와라.”

“선배님, 전 아무데도 가입 안 할 거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우리 클럽은 아무 데가 아닌데. 좋은 곳인데. 이름도 멋지잖아, 위즈덤! 듣자마자 아젠카를 이끌 지식인의 풍취가 느껴지지 않아?”

에키는 한숨을 쉬었다.

“……사관학교 클럽인데 지식인이 의미가 있나요?”

“기사라고 몸만 쓰면 된다는 촌스러운 사고방식은 버려! 지혜로운 기사가 되자! 그러니까 위즈덤에 와라!”

“전 정말 클럽 안 들어가요, 선배님. 이제 그만 포기하시는 게 어떨까요?”

“싫어, 난 포기 안 해! 네가 위즈덤에 들어올 때까지!”

“대체 왜 그렇게 절 영입하려 하세요? 다른 클럽들은 아무데도 안 그러는걸요.”

“걔네가 바보인 거지. 아주 좋아, 걔들이 바보인 덕에 지혜로운 난 훌륭한 인재를 혼자 꼬실 수 있으니까!”

“제가 훌륭한 인재라고요?”

“그럼, 인재가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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