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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든 꽃-20화 (20/211)

검을 든 꽃 20화

아젠카가 몰살당한 후 거기에 있던 기오사들이 어떻게 되었냐는 물음에, 정보상인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정보를 늘어놓은 다음 쓸데없는 말을 덧붙였다.

〈유리엔? 역대 최악의 단장이지, 그따위 악마를 동정하는 바람에 기사단 자체가 사라졌잖아. 최연소 마스터니, 최연소 단장이니 떠받들어 주니까 콧대만 올라가서는 제멋대로 굴고, 그 탓에 다 죽어버렸지. 개새끼야, 개새끼. 그런 놈은 진작 찢어 죽였어야 해.〉

맞는 말이긴 했다. 그녀 때문에 유리엔은 최악의 기사단장, 창천기사단을 멸망시킨 단장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으니까.

그래도 그녀는 그 말을 듣고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유리엔을 개새끼라고 부르는 눈앞의 늙은이를 죽여 버리고 싶었다. 그 분노로 뇌리가 하얗게 불탈 정도로.

눈을 한 번 깜박였을 때, 이미 그녀의 손에서 튀어나온 마검은 늙은 정보상의 머리를 날려버린 후였다. 마검에서 뱀처럼 기어 나온 검은 마나가 그 몸뚱이를 난도질했다. 그녀는 아연해져서 그 피바다를 보다가, 소리를 듣고 쫓아온 상인의 호위들을 피해 달아났다.

그 이후에 바르데르기오사로부터 마검의 힘에 대해 들었다. 알고 나서도 몇 번이나 그녀는 실수를 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그녀는 강제로 자제심을 키웠다. 아무리 분노해도 머리 한구석은 차갑게 유지되도록.

그녀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이제 다시는 물들고 싶지 않으니까.”

노력은 헛되지 않아서 기오사를 다 모아갈 무렵에는 실수를 한 적이 없었다. 지금은 거의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었다. 그래도 그녀는 이 빌어먹을 마검을 버리고 싶었다.

[글쎄, 평생 동안 그럴 수 있다면 신이지. 인간이 어떻게 늘 이성을 유지하냐?]

“그런 일이 생기기 전에 널 버려야지.”

[그러지 말고, 내 전 주인처럼 써 먹으라니까? 간간이 피 맛을 좀 보면 화풀이도 되고, 나도 좋고. 아무나 죽이기에 찝찝하면 나쁜 놈만 골라 죽이면 되지. 죽어 마땅한 놈들은 많잖아. 아, 이안 펠레트로 그놈은 어때? 나쁜 놈이니까!]

“입 다물어.”

[쳇.]

에키는 멈췄던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영혼으로 조그맣게, 마검이 속살거렸다.

[네가 사람을 안 죽인 지 얼마나 됐는지 알아?]

“…….”

[계속 누적되고 있어, 해소되지 못한 살의가. 난 진지하게 충고하는 거다? 죽어 마땅한 놈을 하나 찾아서 죽여. 이안이나 브레드나, 적당한 놈 많잖아?]

“닥치라고 했어. 결정은 내가 해.”

그녀가 이를 갈며 말하자 마검이 비로소 조용해졌다. 에키는 심란한 기분을 마른세수 한 번으로 털어내고는 방으로 향했다.

방 안에는 앨리스가 책상에 앉은 채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에키가 들어서자 그녀가 고개를 까닥였다. 그녀는 에키를 싫어하면서도 인사는 꼬박꼬박 하곤 했다.

“로아즈 양, 전보가 왔습니다.”

앨리스는 별로 내키지 않는 어조로 말하며 두 통의 봉투를 건넸다.

“고마워요, 윈터벨 양.”

“…….”

앨리스가 휙 고개를 돌려버렸다. 에키는 신경 쓰지 않고 봉투를 들고 그녀의 의자에 앉았다. 한 손으로 페이퍼 나이프를 찾으며 봉투의 겉면을 확인했다.

‘하나는 예상대로 집에서 온 거고.’

두툼한 첫 번째 봉투를 내려놓았다. 마나 전보로 메세지를 보내는 건 내용이 길어질수록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는데, 이렇게 두툼하게 보낸 걸 보니 부모님이 어지간히 걱정하시는 모양이었다. 물론 화도 나셨을 테고, 황당하시겠지. 에키는 옅은 한숨을 쉬었다.

두 번째 봉투는 얇았다. 니콜에게서 온 것이었다. 에키는 그것을 먼저 뜯어보았다.

-추적 중, 확신할 수는 없으나 하얀 사자의 꼬리가 보임.

짧은 한 줄이었다. 그것을 읽은 에키의 낯에서 핏기가 가셨다.

백사자는 키리에 제국의 황실에서 사용하는 문장이었다. 로아즈 백작가가 속해 있는 제국의 황족들이자, 유리엔이 속해 있는.

‘황가가, 로아즈에 있던 마검과 관계가 있다고?’

에키는 멀거니 그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안 그래도 복잡하던 머리가 더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종이를 구겨버렸다.

3막.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날짜가 순식간에 흘러 신입생 순위전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브레드를 쫓아낸 다음날에, 이안이 바라하에게 말을 전해 듣고 찾아와 에키에게 브레드의 일에 대해 사과를 했다.

“미안, 그녀석이 그런 놈인 줄 난 전혀 몰랐어. 마침 브레드 생도가 시간이 비어 있어서 맡긴 거였는데. 그놈과 관련된 일로 네게 어떤 불이익도 생기진 않을 거야. 그 점은 걱정하지 마. 정말 미안하다.”

그는 진심으로 미안하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그 뒤로 지금까지 브레드나 브레드의 클럽은 눈에 띄지 않았다. 분명히 떼로 몰려들어 시비를 걸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안이 무언가 말을 하긴 한 모양이었다.

에키에게 과거의 기억이 없었다면 브레드가 이상한 놈일 뿐 이안 펠레트로는 괜찮다고 여겼을지도 몰랐다.

겉과 속이 다른 인간은 많이 봤지만 그는 그중에서도 특히 비뚤어진 자였다. 무슨 꿍꿍이인지 영 의심스러웠다.

이안이 경고했던 것과 달리 클럽 영입 경쟁도 그다지 치열하지 않았다. 에키가 스콰이어로 선정된 과정에 의문을 품은 생도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에키네시아에게는 여전히 떨떠름한 시선이 따라붙었다. 좋지 않은 소문이 계속 도는 듯했다. 신입생 순위전에서 입 닥칠 만한 실력을 보여주기 전까지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 유쾌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힘들지는 않았다. 그녀에게는 고작 사관학교의 소문 따위보다 훨씬 골치 아픈 고민거리가 많았으니까.

물론 그런 소문을 믿지 않는 생도들도 꽤 있었다. 바라하가 대표적이었다. 그는 소문을 듣고 미친 듯이 웃었다.

“단장님을 안다면 예쁜 애가 꾸미고 다닌다고 넘어갈 사람이란 생각은 절대 못 할 텐데 말이지. 자, 그대로 쭉 손을 내리면서 잘 살펴. 혹시 부은 곳이 있거나 다른 부위보다 뜨거운 곳이 있는지 봐야 해.”

“네, 선배님.”

에키는 그에게 말을 돌보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전장에까지 하인이 따라오지는 않으므로, 막사에서 기사의 말을 돌보는 건 스콰이어의 일이었다. 그녀는 검은 장갑을 낀 손으로 말의 다리를 조심스럽게 훑어 내려갔다.

“다음은 한 손으로 발굽을 들고……. 그렇지. 이제 발굽파개로 발굽에 끼어 있는 돌멩이 같은 걸 파 내줘. 발꿈치에서 발끝 방향으로 살살.”

“네.”

에키가 발굽을 손질하는 동안 말은 푸르륵거리며 머리를 한 번 털었을 뿐, 얌전히 서 있었다. 바라하는 기특하다는 듯 말의 콧잔등을 어루만졌다.

대리석 조각상처럼 매끄럽고 커다란 말은 전체적으로 흰색이었는데, 털에 묘하게 황금빛이 돌았다. 유리엔의 애마로, 이름은 실피드였다.

“어차피 스콰이어는 로드의 말을 주로 돌보니까, 처음부터 그 말로 연습하는 게 나아. 말들도 성격이 꽤 달라서. 실피드는 얌전해서 돌보기 편하지.”

“선배님도 실피드를 돌보셨었나요?”

“바론 경의 스콰이어가 되기 전엔 나도 단장님의 임시 스콰이어를 해 본 적이 있거든. 아, 솔은 빳빳한 걸로 해라. 얘는 세게 빗어주는 걸 좋아하니까. 목에서부터 빗어 내려가면 된다.”

에키는 조심스럽게 실피드의 털을 빗겼다. 그녀를 살피던 바라하의 시선이 드레스 끝단에 닿았다. 창천의 마구간은 굉장히 깨끗한 편이었지만, 그래도 동물이 사는 곳에는 한계가 있었다. 에키가 일부러 종아리쯤 오는 외출용 드레스를 입고 왔어도 지푸라기와 먼지로 끝자락이 더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너, 옷이 더러워졌는데.”

에키는 그 말에 아래를 힐긋 보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솔질을 계속했다.

“괜찮아요, 이 정도는.”

바라하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턱을 문질렀다.

“넌 어쩐지 볼수록 겉보기랑 성격이 좀 다른 거 같단 말이지.”

“제가요?”

“보기에는 마구간 같은 곳에 발도 안 들일 모양새를 하고서, 의외로 신경을 안 쓴단 말이야. 그렇다고 드레스가 취향이라는 게 거짓말 같지는 않은데. 참 재미있어.”

그야 양쪽 다 그녀니까. 필요하면 오물에 뒹구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는 것도 그녀고, 예쁜 것이나 치장을 좋아하는 것도 그녀였다. 성격이 겉보기와 약간 다른 건 사실이지만.

바라하는 덩치는 곰처럼 크면서 의외로 눈치가 빨랐다. 할 말은 대놓고 하는 성격에 시원시원한 편이라 그와 있는 건 꽤 편했다. 가끔 예리한 질문을 던져서 곤란하긴 해도.

에키는 웃으며 말을 돌렸다.

“바라하 선배님, 갈기도 그냥 빗으면 되나요?”

“아니, 손가락으로 먼저 엉킨 걸 풀어줘야 해. 안 그러면 끊어지거든. 보여주지.”

바라하가 그녀의 뒤로 다가왔다. 그는 제 덩치가 주는 위압감을 잘 알아서 저보다 약한 여성이나 어린아이 앞에서는 움직임을 조심하는 편이었다. 남자들도 그가 갑자기 움직이면 움찔 놀라곤 했다. 놀라지 않는 건 기척을 잘 감지하는 기사들 뿐이었다.

그러나 에키는 처음부터 단 한 번도 놀라는 기색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바라하는 그녀 앞에서 계속 편히 움직였다. 그녀는 지금처럼, 등 뒤에 커다란 그가 바짝 다가와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가까이 붙자 그녀에게서 좋은 향이 났다. 귀족영애들에게서 맡을 수 있는 향수와 화장품이 뒤섞인 꽃내음 같은 것. 연한 분홍색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목이 그의 한 줌에 잡힐 것처럼 가늘다.

아무리 봐도 화초인데 맹수 같은 그를 뒤에 두고도 긴장이라곤 없었다. 사관학교에서 가장 레이디다운 모습을 하고 있지만 코앞에 피바다가 펼쳐져도 눈 하나 깜짝 안 할 것 같다.

‘재미있단 말이지, 정말.’

바라하는 웃으며 그녀의 어깨 너머로 손을 뻗어 실피드의 갈기를 손끝에 감았다. 그녀가 잘 볼 수 있도록 손가락을 움직여 보였다.

“이런 식으로 대충 엉킨 것들을 풀고 나서 빗질을 해.”

“그렇군요. 제가 해봐도 될까요?”

“그래, 쥐어봐. 응, 그렇게. 참, 그리고 원래는 몸을 빗기 전에 갈기를 먼저…….”

입구 쪽에서 덜컹거리는 소리가 났다. 실피드의 갈기를 나란히 손에 감고 있던 에키와 바라하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어디서 보아도 한눈에 띄는 남자가 거기에 있었다. 간편한 복장의 유리엔이 마구간 안으로 들어섰다.

에키를 거의 감싸듯이 서 있던 바라하는 그녀의 감각이 날카롭게 일어서며 긴장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무서울 게 없듯이 굴더니 단장님은 무서운가? 무서워할 이유가 없는 분인데. 그는 의외라고 생각했다.

그사이 유리엔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으로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그의 시선은 바라하에게가 닿았다. 바라하가 창천식 경례를 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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