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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든 꽃-19화 (19/211)

검을 든 꽃 19화

에키의 표정이 흐트러졌다. 부기사단장 바론의 스콰이어라고? 그 말을 들은 순간 그녀가 떠올린 것은 ‘망했다’라는 한마디였다. 어쩐지 바라하를 보자마자 브레드가 꼬리 내린 개처럼 굴더라니.

“……스콰이어셨어요?”

“어. 2년 전부터. 내가 널 교육하겠다고 하면 생도 대표도 별말 없을 거야. 저런 놈이랑 얽힐 일도 없고, 저놈 클럽도 헛소리를 하진 못하겠지.”

병신과 병신의 클럽이 몰려와 헛소리를 하는 것이 그녀가 목을 베었던 기오사 오너의 스콰이어에게 교육을 받는 것보다 마음이 편했다. 에키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

“전 괜찮아요, 선배님. 그렇게까지 해주시지 않아도 돼요.”

“내가 필요해서 하는 거다. 네가 정식 스콰이어가 되면 나하고 같이 일할 때가 많아질 테니까. 내 로드가 부기사단장님이고, 넌 단장님의 스콰이어잖아?”

“……아.”

그녀는 유리엔에게 정신이 팔려서 완전히 잊고 있었다. 유리엔의 스콰이어가 된다는 건 다른 기오사 오너들과도 자주 마주치게 된다는 소리였다. 그중 누가 지워진 과거를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갑자기 미래가 아득하게 어두워지는 기분이었다.

바라하가 어깨를 으쓱였다.

“생도 대표란 놈이 자기 대신으로 저런 머저리를 데려다 놓은 걸 보니, 이대로 뒀다간 너하고 같이 일할 때 내가 고생할 거 같단 말이지. 그러니 미리미리 가르쳐 놔야겠어.”

“가, 감사합니다 .”

바론의 스콰이어인 그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거절할 수는 없었다. 거절할 명분도 없고. 그를 피한다고 해도, 어차피 스콰이어가 되고 나면 다른 기오사 오너들과 계속 마주치게 될 테니까.

‘……모자하고 장갑을 더 맞춰야겠어. 화장품도 좀 더 사고.’

더 화려하게 꾸미고 다녀야겠다. 절대 못 알아볼 정도로. 그녀는 우울하게 그런 생각을 했다. 그사이 바라하는 무언가 생각하듯 손가락을 꼽아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돌아서며 말했다.

“일단 따라와. 줄 게 있거든.”

“아, 네.”

그는 연무장을 벗어나 걷기 시작했다. 에키는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뒤에서 보니 등이 무척 넓었다. 생도복 차림인데 자켓을 입지 않고 있어서, 팽팽한 셔츠 아래로 잘 단련된 근육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눈에 띄는 덩치에, 바론의 스콰이어이기까지 한데 왜 죽였던 기억이 없지? 그녀가 기억하는 아젠카의 피해자 중에는 저 남자가 없었다.

그를 따라 걸음을 옮기며 그녀는 계속해서 기억을 뒤졌다. 그러다 퍼뜩 무언가가 떠올랐다.

〈부기사단장님은 오늘도 묘지에 가셨나?〉

〈그렇지, 뭐. 스콰이어를 그렇게 잃으셨으니……. 이렇게 비바람에 번개가 칠 때면 생각이 나시는 모양이야.〉

〈3년쯤 되었지, 그 마물 토벌.〉

〈그때 피해가 워낙 컸으니까.〉

이중문 너머의 간수들이 나누던 대화. 정확하진 않겠지만 대강 저런 내용이었다. 한 번이 아니라 번개가 치고 비가 쏟아붓는 날이면 매번 비슷한 대화가 오간 덕에 기억에 남아 있었다.

에키는 창백해진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아젠카를 몰살시킬 때 저 남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 전에 이미 사고로 사망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녀가 감옥에 있던 시기의 3년 전이면 바로 올해였다.

올해의 마물 토벌 때, 바라하 이슬라프는 죽는다. 그리고 아젠카의 시민들을 살리기 위해 끝까지 그녀를 막아섰던 부기사단장은, 번개가 치는 날이면 죽은 스콰이어의 묘지를 찾아가게 될 것이다.

에키는 멍하니 걷다가 갑자기 멈춘 바라하의 등에 부딪힐 뻔했다. 그가 멈춘 곳은 남자 기숙사 앞이었다.

“여기서 잠깐 기다려.”

바라하가 그녀를 돌아보고 말하더니 기숙사 안으로 사라졌다. 에키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시선은 기숙사의 붉은 벽돌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넝쿨에 닿았지만 그녀는 그것을 보고 있지 않았다. 기숙사를 드나드는 학생들이 드레스를 입은 그녀를 흘깃거리며 속닥였지만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에키네시아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시간을 되돌린 건 행복해지기 위해서였다. 자신의 손에 죽은 사람들이 모두 살아나는 것을 원했다. 그 외의 다른 것들은, 솔직히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 시간을 되돌린다는 의미를 깊게 고민해 본 적이 없다는 소리다.

‘미래를 아는 거나 마찬가지야. 그리고 알고 있으면 바꿀 수도 있지.’

그녀는 과거를 바꾸기 위해 돌아왔다. 돌아온 것으로 그녀가 바랐던 목적은 이미 반쯤 달성되었다. 그래서 미래에 대한 정보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보지 못했다.

에키는 앞으로 있을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알고 있었다. 마검에 휘둘리고, 극복한 후에는 기오사를 모으느라 바빴던 터라 자세한 건 몰라도, 그런 그녀의 귀에까지 들려오는 큰 사건들은 분명히 있었다. 그리고 그녀에겐 그것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있었다.

‘할 수 있는 만큼은…… 바꿔볼까.’

그 모든 일들에 손을 뻗겠다는 소리는 아니다. 어디까지나 그녀의 손에 닿는 범위까지만. 주위가 불행한 것을 보고 싶지는 않으니까. 티 나지 않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예를 들면, 곧 죽게 될 바라하 이슬라프를 살려내는 것처럼.

‘기오사 오너들에게 기억이 있는지도, 이걸로 시험해 볼 수 있어.’

만약 지워진 시간들을 기억한다면, 그녀보다 기오사 오너였던 자들이 훨씬 더 잘 알 터였다. 곧 있을 마물 토벌에서 스콰이어 바라하가 사망한다는 걸. 그럼 그들도 당연히 그를 살리려 움직이겠지.

그걸 지켜보면 누가 기억이 있는지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아무도 그의 죽음을 막지 못한다면, 그녀가 막으면 된다.

‘막을 수 있는데 내버려둘 이유는 없어. 그래, 살려내자.’

에키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떴다. 보라색 눈동자가 선명한 빛을 품었다.

“기다렸지?”

그사이 기숙사에서 나온 바라하가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그는 책을 한 권 손에 쥐고 있었다. 커다란 그의 손에 잡혀 있으니 평범한 크기의 책이 소책자처럼 보였다. 그가 그녀에게 그 책을 내밀었다.

“일단 오늘은 이걸 읽어봐라. 숙제다.”

에키는 책을 받아들었다. 받고 보니 책이라기보다는 메모와 노트를 엮은 묶음에 가까웠다. 손때가 묻은 가죽 표지에는 ‘스콰이어 교본’이라고 쓰여 있었다.

“선배들의 경험이 담겨 있는 책이다. 돌려줄 필요는 없어. 네가 가지고 있다가, 네 후배 스콰이어가 생기면 그놈한테 물려줘.”

“감사합니다.”

“그럼, 난 로드께 가봐야 해서. 그거 보고, 내일 아침 같은 시각에 아까 그 연무장으로 나와.”

“저, 선배님.”

“응?”

“……창천기사단의 마물 토벌이 매년 봄에 있잖아요. 저도 그때 스콰이어로서 따라갈 수 있을까요?”

“이번에는 힘들 텐데. 5월 10일이니까, 네 수습 기간이 끝나기 전이야. 정식 스콰이어면 몰라도 수습 상태인 신입생을 데려갈 리가 없지.”

“그럼 참가할 방법이 없나요?”

에키가 약간 초조하게 물었다. 바라하가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더니 빙긋 웃었다.

“실전을 경험하고 싶어서?”

“아, 네.”

“생각보다 적극적이군.”

“을 다루는 사람으로서 당연한 일이죠.”

“넌 검에 집착하지 않잖아?”

바라하는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 에키가 멈칫했다. 그렇게 티가 나나. 그녀는 그다지 검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가 겪은 일들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잘하는 일이고, 유용하기 때문에 검을 손에 놓지 않을 뿐.

“……그렇게 보이나요?”

“뭐, 아니면 말고, 참가하고 싶으면 곧 있을 신입생 순위전에서 3위 안에 들어라. 신입생이라도 상위 세 명은 임시 스콰이어로 데려가니까.”

원래 순위전은 학년을 따지지 않고 통합으로 치러졌다. 하지만 갓 입학한 신입생들은 특별히 입학 직후에 신입생끼리 순위를 한 차례 매겼다. 다음 순위전의 대진표를 짤 때 신입생의 실력을 참고해서 배정하기 위해서였다. 입학 성적은 여러 요소가 합쳐진 성적이라 활용하기 애매했다.

“상위 세 명만 데려가는 건가요?”

“창천의 마물 토벌은 다른 나라에서 하는 것처럼 전시용이 아니거든. 실전이지. 그 정도 실력은 있어야 방해가 안 된다는 소리야.”

“……그렇군요.”

“자신 없나, 수석 입학생?”

바라하가 도발하듯 물었다. 그의 노란 눈이 장난기를 담은 채 그녀를 관찰했다. 에키는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아뇨.”

그녀는 드레스 자락을 쥐고 무릎을 살짝 굽혔다 펴며 인사를 했다. 그리고 그를 올려다보며 답했다.

“마물 토벌 때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바라하 선배님.”

담담한 선언이었다. 바라하의 눈이 만족스럽게 반짝였다.

“좋아, 입학 첫날에 스콰이어로 지명된 생도라면 그 정도는 되어야지. 신입생 순위전을 기대하겠어, 에키네시아 로아즈.”

“감사합니다.”

“숙제 잘해 와, 내일 검사할 테니까.”

바라하가 웃으며 자리를 떴다. 에키는 책을 쥔 채 돌아섰다. 기숙사로 돌아가는 그녀의 뇌리에서 마검이 떠들었다.

[주인아, 너무 높은 순위는 안 할 거랬잖아? 근데 3위 하려고?]

“아니, 1위.”

[엥?]

“어차피 스콰이어가 되어 버렸으니, 기오사 오너를 피해 다닐 의미가 없어졌잖아.”

이제 기오사 오너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 최상위권을 피할 필요가 사라졌다. 오히려 이례적인 스콰이어로 지명된 만큼, 압도적인 실력으로 다른 생도들의 의심과 불만을 닥치게 만드는 편이 더 나을 터였다. 물론 상식적으로 납득 가능한 수준은 유지해야겠지만.

“밤시중이니 뭐니 하는 뒷말이 다시는 나돌지 못하게 해야겠어.”

에키가 서늘하게 웃었다. 마검이 의아한 듯 물었다.

[진짜 많이 화났구나. 근데 왜 걜 안 죽였어?]

“화난다고 다 죽이면 살인마지.”

[너 예전엔 그랬잖아? 그럼 살인마 맞네.]

에키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애초에 사람이 없었기에 마검에게 대꾸해 준 것이기도 하고. 그녀는 온기가 완전히 사라져 자수정처럼 보이는 눈으로 오른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넌 그렇게 말할 자격이 없어, 발.”

[야, 내가 조종한 것도 아니잖아! 네가 살의를 받아들인 거지!]

“…….”

에키는 이를 악물었다. 회귀 이전, 바르데르기오사의 자아를 깨운 후 기오사를 모으던 시절. 그 초기에 그녀는 살인마나 다름없는 짓을 몇 번 했었다. 그녀를 조종했던 껍데기와 달라도 저것이 살육에 특화된 마검임을 확실히 깨닫게 해주는 일들이었다.

누군가를 죽이고 싶어지면, 마검에 깃들어 있는 대량의 마나가 그녀의 살의를 따라 대상을 죽인다. 몸이 저절로 죽이기 위한 최적의 경로를 찾아낸다. 그건 마검이 가진 능력이기도 했다. 모든 기오사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처음에는 마검에 이런 기능이 있는 줄 몰랐다. 그녀가 처음 바르데르기오사의 힘을 알게 된 건 뒷골목의 정보상인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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