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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든 꽃-18화 (18/211)

검을 든 꽃 18화

“뭐가, 다 맞는 말이잖아? 아, 레이디가 듣기에는 너무 솔직했나?”

그가 비웃음을 띠었다. 그 얼굴을 보던 에키가 치맛자락을 쥐어 약간 들어 올렸다. 스타킹으로 감싼 뽀얀 발목이 드러나자 저절로 브레드의 시선이 그리로 향했다.

그녀는 그 시선을 느끼고 살짝 웃었다. 그리고 웃는 얼굴 그대로 발을 들어 브레드의 정강이뼈를 구두 굽으로 찍어버렸다.

“억!”

방심하고 있던 브레드가 신음을 흘리며 정강이를 움켜쥐었다. 물론 그가 방심하지 않고 있었다 해도 에키가 그를 걷어차는 데엔 아무 문제도 없었을 것이다. 에키는 몸을 웅크린 그의 등허리를 요령 좋게 걷어차서 벤치 아래로 떨어뜨렸다.

“야,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브레드가 고함을 질렀다. 에키는 태연히 대답했다.

“기분이 나빠서요.”

“뭐?”

“선배님 말씀에 기분이 더러워졌거든요. 제가 좀 인내심이 부족해서 기분이 나쁘면 참질 못해요. 이해해 주세요.”

“이런 미친…….”

브레드가 이를 갈며 일어나다가 비틀거렸다. 바지에 가려져서 보이진 않지만 하이힐에 찍힌 정강이의 상태는 몹시 나쁠 게 틀림없었다. 에키는 흐트러진 드레스 자락을 다듬으며 말했다.

“참, 제가 스콰이어 지명이 된 이유는 저도 모르겠는데, 2차 시험 성적으로 수석이 된 이유는 알거든요. 뭘 어떻게 녹여냈냐고 하셨죠? 말로 설명하긴 어려워서…… 몸으로 체험 시켜 드릴게요.”

“무슨……. 컥!”

그녀가 검집째로 롱소드를 휘둘러 브레드의 명치를 가격했다. 대비하고 있었음에도 브레드는 그것을 막지 못했다. 지나치게 빨랐다.

정통으로 들어가니 타격감이 시원했다. 에키는 그가 원하던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명치를 맞고 숙여진 그의 어깨를 검집으로 밀었다. 비틀거리는 순간 발목 안쪽을 걷어찼다.

“빈틈이 너무.”

균형을 잃은 브레드는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다. 그녀는 엎어진 그의 등을 지그시 밟았다.

“훤하게 보이더라고요, 준기사님도.”

“크, 으……. 예쁘다고 좀 봐줬더니, 미친년이, 선배에게 이런 짓을 하고도 괜찮을 줄 알아? 내가 네년을, 헉……!”

꽉 소리를 내며 롱소드가 검집째로 그의 귀를 스치며 바닥에 박혔다. 질겁한 브레드가 입을 다물었다. 에키는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네, 괜찮을 거 같아요. 제가 입학하기 전에 안내 책자를 열심히 읽어 봤거든요. 사관생도가 퇴학 처리되는 경우는 다섯 가지, 어머, 다섯 가지 맞던가? 하여간 그중에 이런 경우는 없었어요. 제가 검을 뽑은 것도 아니고, 생도끼리의 소소한 다툼 정도니까요. 안타깝네요, 선배 님.”

브레드가 몸을 들썩였다. 그러나 그는 가느다란 구두 굽의 아래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에키가 그의 움직임에 맞춰서 미묘하게 위치를 바꿔가며 밟아댔기 때문이었다. 근육이 움직이려는 방향을 정확하게 힐로 짓눌러 버리니 꼼짝할 수가 없었다.

브레드도 사관생도였다. 그 역시 아젠카 밖에서는 천재 소리를 들을 만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무기력하게 당하는 건 에키와 그의 격차 탓이었다.

물론 새파랗게 어린 신입생의, 그것도 보석으로 장식된 여성용 구두에 짓눌린 브레드는 이성이 나가서 그런 사실을 깨달을 수가 없었다. 그는 고통과 수치로 얼굴을 일그러 뜨리고 악을 썼다.

“당, 당장 비키지 못해? 너, 너, 이런 식으로 굴면 스콰이어 지명이 취소될 수도 있어! 단장님께 다 보고할 테니까!”

“보고하세요. 전 스콰이어 안 되어도 괜찮아요. 그런데 그럼, 제가 왜 기분이 나빠졌는지도 보고해야겠네요? 방금 저한테 하신 말씀들도 다 단장님께 알려 드리려고요? 밤시중이라든가?”

“이, 이……! 증거 있어? 증인도 없지! 하지만 네년이 선배를 먼저 공격한 건 증거가 명백하잖아! 내가 네년을 가만 둘 줄 알아?”

브레드가 발악을 했다. 에키가 후배한테 얻어터진 게 자랑이냐고 그를 비웃으려는 찰나,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증인은 내가 해주지.”

흑발의 남자가 제4연무장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구릿빛 피부에 근육으로 꽉 찬 큰 덩치 탓에 어슬렁거리는 걸음이 사자나 표범이 걸어오는 것처럼 묵직했다. 맹수 같은 노란 눈은 나른한 듯 반쯤 감겨 있었다.

에키는 처음부터 연무장 근처에 있던 저 남자의 기척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래서 더 거침없이 지른 것이기도 했다.

멀쩡한 사람이라면 브레드가 떠든 말을 듣고도 그녀에게 뭐라 하기는 어려울 거고, 브레드 같은 놈이면 보고 겁이나 먹으라고. 물론 기겁해서 막나가는 여자니 건들지 말자 하는 소문을 퍼뜨리면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브레드의 등을 밟은 채로 다가오는 남자를 돌아보았다.

“누구시죠?”

“바라하 이슬라프, 3학년. 넌 에키네시아 로아즈지?”

“네, 바라하 선배님.”

남자는 벤치에 앉더니 베이컨이 듬뿍 들어간 샌드위치를 꺼냈다. 그가 태연히 그걸 우물거리며 손짓했다.

“아, 하던 거 계속해. 저놈 떠드는 건 다 들었으니까.”

“……감사합니다.”

“제기랄…….”

브레드는 바라하라는 남자를 본 순간부터 조용해졌다. 그가 욕설을 뇌까리며 고개를 파묻었다. 에키는 가만히 그것을 내려다보다가 꽂았던 검집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브레드 선배님, 혹시나 해서 여쭙는데요. 갑자기 깨달음이 와서 아, 내가 정말 잘못했구나, 못 할 말을 했어, 하는 생각이 드시나요?”

“뭔 헛소리야?”

“그럴 줄 알았어요. 그럼 그냥 꺼지세요. 앞으론 입조심 좀 하시고요.”

에키는 발을 치우고 물러났다. 브레드가 벌떡 일어나다가 고통으로 몸을 뒤틀며 신음을 흘렸다. 그는 바라하를 잠깐 돌아보더니, 목 끝까까지 올라온 욕설들을 억지로 눌러 담는 듯한 낯이 되었다.

“너, 너…… 후회하게 될 거다.”

잇새로 씹어뱉듯 그런 말을 남기고 브레드가 연무장 밖으로 나가버렸다. 절뚝거리면서도 꽤 빨랐다.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바라하가 툭 던지듯 말했다.

“더 때려도 되는데.”

“가망 없는 인간한테 시간 낭비 하고 싶지 않아서요. 경고는 이 정도면 충분할 테고요.”

“별로 경고를 알아들은 기색이 아니던데?”

“또 저러면 반복 학습을 해줘야겠죠. 떠들 때마다 정강이를 구두 굽으로 찍히다 보면 아파서라도 입을 다물지 않겠어요?”

그녀의 말에 그가 픽 웃었다. 그러 곤 남은 샌드위치를 한입에 먹어치우더니 빈 봉지를 대강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대충 들어보니, 스콰이어 예비 교육을 하는 중이었던 모양이지?”

“네.”

“왜 저 병신이 그걸 하고 있어?”

“저 사람 유명한가요?”

“나름. 끼리끼리 모인 클럽이 있거든. 사관학교가 자기네 저택인 줄 아는 멍청이들이.”

에키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저런 게 하나도 아니고 모여 있는 클럽이 있다니. 기사 지망생은 앨리스 같은 애들만 있을 줄 알았는데.

‘아, 하긴. 이안 펠레트로 같은 놈도 있지. 사관학교라 해서 뭐 특별할 건 없구나.’

바라하가 이가 드러나는 비웃음을 지은 채 말했다.

“저놈은 임시 지명도 받아본 적이 없는 놈이야. 네가 부탁했을 것 같진 않고, 누가 저거한테 스콰이어 예비 교육을 맡겼지?”

“……생도 대표님이요. 원래 대표님이 해주시기로 했는데, 오늘은 시간이 없으시다고.”

“흠.”

그는 무언가 고민하는 듯 턱을 괴더니 노란 눈으로 에키를 훑었다. 담백한 눈빛이었다. 그의 시선이 그녀가 들고 있는 싸구려 롱소드와 드레스의 풍성한 러플을 오갔다.

“에키네시아 로아즈.”

“네, 선배님.”

“드레스는 왜 입고 다니는 거지?”

“사관생도의 복장은 자율 아니었나요?”

“아, 지적하는 게 아니라, 궁금해서.”

줄곧 듣게 될 질문이었다. 에키는 선선히 대답했다.

“취향이라서요. 치장하는 게 즐겁거든요.”

그 대답이 흥미로운지 바라하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는 턱짓으로 구두를 가리켰다.

“구두는 불편하지 않나? 아까 보니 나름 유용해 보이긴 했지만.”

“익숙해서 불편하지 않아요. 그리고 드레스 아래에 가죽 신발은 어울리지 않는 걸요.”

“……장갑은 왜? 가죽 장갑도 아니고 실크라, 검을 쥐기엔 미끄러워 보이는데.”

“손이 상하는 게 싫어서요. 그리고 실크 장갑이 가죽 장갑보다 예쁘잖아요?”

바라하의 입술이 실룩거리고 있었다. 웃음을 참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예쁜 게 좋다면서, 검은 왜 그런 못생긴 싸구려를 들고 다니지?”

“손질하기 귀찮으니까요. 날이 상하면 버리고 새로 살 거예요.”

“푸핫.”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비웃음이 아니라 유쾌한 웃음이었다. 에키는 낄낄거리는 그를 이상한 것을 보듯 쳐다보았다. 취향이 특이한 남자였다. 앨리스 같은 반응이 정상이지.

웃음을 어느 정도 수습한 바라하가 싱글거리며 말했다.

“아까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볼수록 재미있네. 마음에 들어.”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아, 네 스콰이어 예비 교육은 내가 해주지. 생도 대표한테는 알아서 말할 테니까 걱정 말고.”

해주겠다는데 마다할 필요는 없었다. 스콰이어로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배우긴 해야 하니까. 좀 특이한 취향 같긴 해도 브레드처럼 헛소리를 할 인간은 아닐 테니 잘된 셈이었다. 에키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오늘 하루 잘 부탁드릴게요.”

“하루 아닌데?”

“네?”

“앞으로 쭉 내가 해주겠다고. 네가 정식으로 스콰이어가 될 때까지.”

바라하가 벤치에서 일어났다. 그의 허벅지는 에키의 허리보다 굵었다. 그 앞에 서니 가느다란 그녀는 한 줌밖에 되지 않았다. 잘생긴 얼굴이었지만 키도 크고 덩치도 커서 똑바로 서서 내려다보니 위압감이 대단했다.

물론 에키는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은커녕 긴장조차 없었다. 바라하는 그녀의 그런 점도 꽤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가 씩 웃으며 그녀를 향해 아젠카식 경례를 했다.

“아르 세밧티엠.”

팔꿈치를 어깨 높이로 들고, 가슴 앞에서 양손을 기도하듯 맞잡았다가 떼며, 고어를 읊었다. 사도들의 기도 자세에서 유래된 창천의 인사방식이었다.

“다시 소개하지. 바라하 이슬라프, 3학년, 기오사 오너이자 부기사단장인 바론 틸리어스 경의 스콰이어다. 잘 부탁한다, 스콰이어 후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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