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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든 꽃-17화 (17/211)

검을 든 꽃 17화

‘내가 되게 짜증 날 텐데, 이 정도면 잘 참네.’

에키는 자느라 부스스해진 머리를 긁적이며 일어나 발령장을 집었다. 문구가 눈에 들어오자 복잡한 심정이 들었다. 어젯밤에 만난 유리엔과 밤새 꾼 꿈까지 합쳐지니 더더욱. 그녀는 발령장을 대충 접어 서랍에 처박았다.

어젯밤에 무슨 정신으로 기숙사에 돌아와 잠들었는지 잘 모르겠다. 제정신이 아니었던 건 확실했다.

유리엔에게 기억이 있다면 그녀를 증오하지 않을 리가 없다. 그녀는 그의 믿음을 배신하고 그의 터전을 몰살시켰으며, 그를 죽였으니까.

마검 때문이라고? 그건 어디까지나 그녀의 입장이었다.

사람을 죽여놓고 마검 때문이었다, 미안하다, 라고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의 가족이나 연인이 그녀를 용서하는 게 가능할까? 사랑하는 사람의 피를 뒤집어쓰고 있는 그녀를 향해 마검 때문이니 어쩔 수 없지, 너는 죄가 없어, 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소중한 사람을 죽인 그녀와 마주보며 웃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그게 가능하다면 인간이 아니라 성자일 것이다.

그럼 유리엔은 왜 알 수 없는 태도를 보이는 걸까. 그가 자신을 죽였던 그녀를 알아보고도 웃을 수 있는 성자라고 믿는 것보다는 다른 이유가 있는 거라고 생각하는 쪽이 합리적이겠지.

기억이 없거나. 기억이 있어도, 그녀가 마검의 악마임을 확신하지 못하고 있거나.

‘탄신 연회…….’

기억이 없을 경우라면, 작년 황제 탄신 연회 때 그녀가 그의 관심을 끌 만한 짓을 했을 확률이 높았다. 유리엔이 그때 그녀를 봤다고 했으니까.

문제는 에키에게 그 일은 15년이 훌쩍 넘은 과거의 일이라는 점이다. 유리엔을 봤었고, 그와 마주치거나 대화를 한 적이 없는 건 확실했다. 그렇다면 그녀가 모르는 사이 그의 관심을 끌 만한 일을 했었나? 무언가 특별한 짓을 했는지 되새겨 보아도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모르겠어. 젠장.’

에키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장을 열었다. 오늘 입을 드레스를 꺼내며 그녀는 다른 경우를 생각해 보았다. 기억이 있지만, 그녀가 마검의 악마라는 것을 모를 경우.

‘의심은 할 수 있겠지. 지워진 과거에는 없었던 사관생도가 나타난 거니까. 그럼에도 확신할 수는 없겠지. 내 신분은 명확하고, 증거는 없잖아.’

실크 장갑으로 감싼 오른손을 노려보았다. 그 아래에는 돌이킬 수 없는 증거가 있었다. 에키는 손바닥을 말아 쥐고 코르셋과 패티코트를 꺼내 침대 위에 던져놓았다.

‘만약 그에게 기억은 있지만, 증거가 없어서 지켜보기만 하는 상태라면. 나를 언제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마검의 악마로 의심하고 있다면.’

에키는 쓴웃음을 지었다. 보석함을 꺼내며 중얼거렸다.

“최대한 가까이에 두고…… 감시하겠지. 확신할 수 있는 증거를 찾을 때까지.”

[갑자기 무슨 소리야?]

“유리엔이 왜 나를 스콰이어로 지명했는지 알 것 같아서.”

[뭐야, 걔가 널 감시하려고 스콰이어로 삼았단 소리야?]

“어디까지나 하나의 가능성이지만.”

대련을 하자고 한 것도, 확신하기 위해서일까. 그녀가 마검의 악마임을 확신하게 되면 그는 어떻게 할까. 적어도, 어제처럼 웃는 일은 없겠지. 가슴께가 아릿했다.

서랍 위에 접힌 채 놓여 있는 망토가 보였다. 유리엔이 그녀에게 덮어주었던 망토였다. 에키는 몹시 심란하게 그것을 보다가 눈에 띄지 않도록 서랍 안쪽에 집어넣어 버렸다. 어느 쪽이든,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었다. 마검의 악마를 연상할 수 없도록 ‘에키네시아 로아즈’로만 보이는 것.

그녀는 전투적으로 치장하기 시작했다.

노라 없이 혼자 치장을 하는 건 쉬운 일은 아니었다. 특히 코르셋을 입는 게 힘들었다. 원래 혼자 입으라고 만들어진 게 아니니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마나를 이용해 등 뒤의 끈을 당겨 맸다. 마스터들이 보면 기겁할 정교한 작업이었다.

코르셋을 입고 나서는, 스타킹을 신고 고정을 위해 가터벨트를 착용했다. 패티코트를 입고 그 위에 연한 노란색에 러플이 풍성한 드레스를 걸쳤다.

머리를 빗어 반묶음으로 올린 다음 조화 주위에 프릴과 보석이 둘러진 장신구로 고정했다. 화장을 하고, 귀걸이와 목걸이를 착용하고, 굽이 높은 구두를 신었다.

번거로운 일들이지만 하다 보면 나름 즐거웠다. 거울 속의 자신이 점점 예뻐지는 걸 지켜보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니까.

마지막으로 실크 장갑을 벗고 드레스와 어울리는 수가 놓인 장갑을 꼈다. 볼 때마다 경각심이 드는 손바닥의 문양이 금실로 놓인 수 아래로 가려졌다.

혼자 치장하는 귀족영애치고는 굉장히 빠르게 끝냈지만, 그래도 시간이 오래 걸린 건 사실이었다. 어느 새 9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에키는 어제의 결투 이후로 손질조차 해주지 않고 방치해 놨던 롱소드를 들고 방을 나섰다. 그녀에게 검을 소중히 다룬다는 개념은 없었다. 검을 좋아하지도 않는 데다, 망가지면 새로 사면 그만이었다.

본관 동쪽 제4연무장은 작은 공터 정도의 크기였다. 담벼락이 높고 한 쪽에 간이 건물에 가까운 정자가 있는 걸 보니 훈련과 토론이 동시에 가능한 공간으로 만들어진 모양이었다.

이안 펠레트로는 그 정자 안의 벤치에 앉아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적갈색 머리의 남자가 그와 마주 앉아 있었다.

에키가 들어서자 이안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어서와, 에키네시아 생도.”

그가 어떤 인간이었는지 깨닫고 나니 그 웃음이 찝찝하기 그지없었다. 생각해 보면 아무리 곧 공고가 붙을 거라지만 생도들이 가득한 공용식당에서 스콰이어 이야기를 하고, 거기서 굳이 결투 시간과 장소까지 이야기한 것부터가 수상했다.

‘그렇다고 지금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앞으로 대할 때 주의하는 수밖에.’

그녀는 속으로만 혀를 차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그래, 잘 잤어? 참, 이쪽은 3학년인 브레드 폰 포움 생도. 인사해.”

“에키네시아 로아즈입니다, 브레드 선배님.”

이안이 제 앞에 있던 남자를 소개했다. 남자는 에키를 아래위로 훑더니 진득하게 웃었다.

“제법 예쁘네. 걱정 마, 잘 가르쳐 줄 테니.”

거북한 미소에 거북한 말이었다. 에키가 미간을 찌푸리자 이안이 미안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원래 내가 예비 교육을 해야 하는데, 오늘은 도저히 시간을 내기 어려울 것 같아서 브레드를 불렀어. 브레드 생도는 임시 스콰이어 경험이 많으니까 널 잘 이끌어줄 거야.”

“……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안은 예의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는 에키의 어깨를 친근하게 두드렸다.

“그럼 나중에 보자. 난 가봐야 해서.”

그가 떠나고 나자 연무장에는 그녀와 브레드만이 남았다. 브레드는 비딱하게 앉아서 팔짱을 낀 채 그녀를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한 달 후에 정식 스콰이어랬지. 시간이 빡빡하네.”

“잘 부탁드립니다.”

“우선 오늘 하루 넌 내 스콰이어다. 내 시중을 들도록.”

“……예, 선배님.”

“로드(Lord)라고 불러야지. 기본이다.”

스콰이어는 자신이 따르는 기사를 로드라고 불렀다. 아직 기사도 아닌 사관생도를 향해 부르기에는 과한 호칭이었다.

쳐다보는 시선이 굉장히 끈적끈적했다. 에키는 저도 모르게 구겨지려는 미간을 간신히 사수하고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예, 로드.”

“좋아. 그럼 우선 다리를 주물러라.”

브레드가 벤치에 기대며 다리를 앞으로 뻗었다. 에키는 순간적으로 어이가 없어졌다. 스콰이어가 기사의 시중을 드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그 시중에 다리 주무르기 같은 게 포함되던가? 스콰이어는 엄연히 예비 기사지 뭐든 하는 노예가 아니었다.

“다리를, 주무르라고요?”

“로드의 명에 반문을 해? 하라면 해라.”

“제가 오늘부터 받기로 한 건 스콰이어 예비 교육이 아니었나요?”

“하고 있잖아, 스콰이어 예비 교육. 너, 어디서 감히 말대꾸야?”

브레드가 불쾌한 듯 인상을 썼다. 아까 느낀 불길한 예감이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안 펠레트로는 일부러 자신 대신 이런 놈을 데려다 놓은 게 틀림없었다. 에키는 이를 사려 물고 대꾸했다.

“다리 주무르는 연습이 스콰이어에게 필요한가요?”

“하라면 하지 말이 많아! 스콰이어 안 할 거야?”

브레드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에키는 가만히 서서 그를 내려다보다가, 싸늘하게 물었다.

“어떤 식으로 주무르란 겁니까?”

“이런 것까지 일일이 알려줘야 하나? 거기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부츠를 벗기고 주물러. 아, 장갑은 벗고 맨손으로.”

벤치 아래의 바닥을 턱짓하며 말하던 브레드가 비릿하게 웃었다.

“특별히 너에게 맞춤 교육을 해줄 테니까, 나긋하게 해봐.”

“……맞춤 교육이라뇨?”

“네가 들려는 시중에 딱 맞는 교육이지. 어차피 넌 그런 목적으로 생도가 된 거 아니었나?”

“무슨 목적을 말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치맛자락 살랑거리고 다니면서 모른 척하기는. 다른 사람들이 바보로 보이냐? 기사 하나 잘 물어서 결혼하려고 그러고 다니는 거, 다들 이미 알아. 남자들 보라는 거 아니면 그렇게 꾸미고 다닐 이유가 없잖아?”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모를 논리였다. 기사를 물어서 결혼? 남자들 보라고 꾸민다고? 너무 참신해서 생각도 못 해본 개소리다.

에키는 어디까지 가나 보자는 심정으로 입을 다물고 그를 지켜보았다. 브레드가 그녀의 가슴께를 눈으로 훑었다.

“넌 몸매도 좋고, 얼굴도 반반하니 현명한 선택이지. 입학 성적도 그렇잖아? 어제 결투 보고 다들 알아챘다고. 검도 변변찮은 게 어떻게 수석이 됐나 했더니, 다른 성적은 별로였는데 준기사와 대련한 2차 시험 성적이 압도적이라 수석이 된 거라며?”

“…….”

“하긴, 그 수도사 같은 기사단장도 홀렸는데 준기사쯤이야 쉬웠겠지. 뭘 어떻게 녹여냈길래 입학 첫날에 스콰이어 지명이냐?”

“그런 소문이 돌고 있다고요? 고작 하루 만에?”

“빤히 보이잖아? 뭐, 탁월한 전략이었어. 단장까지 꼬여 냈으니까. 그 고고하신 단장도 남자는 남자네. 입학 전부터 밤시중을 든 모양이지? 스콰이어가 되면 이제 공식적으로 시중을 들 수 있으니 편하겠어. 매일 밤이 아주 뜨겁겠네.”

에키는 기가 차서 웃었다.

마검 시절에 평생 먹을 욕설과 저주를 다 들었다. 기오사를 모으던 시절에는 용병들 사이에서, 귀족 아가씨였던 그녀로서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음담패설도 일상처럼 들었다. 그러니 그녀를 향한 개소리쯤은 어지간하면 듣고 넘겨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건 아니지. 너무 저질이잖아. 거기다 유리엔까지 끌어들여서.

[주인아, 너 지금 짜증 나는 거지? 화났지? 죽여버려. 간단하잖아? 나를 써줘, 응?]

그녀의 분노를 감지한 바르데르기오사가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그 독촉이 오히려 그녀를 진정시켰다.

처음부터 눈에 안 띄고 평화로운 생활 따윈 바라지 않았다. 눈에 안 띄는 게 무리니까. 애초에 잡았던 컨셉이 드레스를 고집하는 성격 이상한 천재 기사 아니었나.

그러니까 성질 더럽고 위아래 없는 년이란 소리쯤이야 얼마든지 추가되어도 된다. 그게 단장의 밤시중을 들어서 스콰이어를 따냈다는 지저분한 소문보다는 훨씬 낫기도 하고.

진정한 것과 별개로 참아줄 생각은 없다는 뜻이다. 그녀는 부드럽게 말했다.

“말씀이 좀 심하시네요, 선배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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