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16화
이제 팔을 뻗으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가 되었다. 혈관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그가 굳어 있는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훗.”
거칠거나 난폭한 움직임은 아니었다. 오히려 느리고 정중했다. 그러나 너무 놀라서, 비명을 간신히 참느라 그녀에게서 괴상한 소리가 났다. 하마터면 쳐내고 반격할 뻔했다.
유리엔이 그녀의 손을 감싸 쥐고 들여다보았다. 하필 오른손이었다. 그녀가 끼고 있는 실크 장갑 아래에는 마검의 문양이 있었다. 에키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다행히 그는 장갑을 벗기려 들진 않았다. 그런 무례를 범할 성격이 아니었다. 갑자기 그녀의 손을 움켜쥔 것만 해도 그에게는 엄청나게 이례적인 일이었다.
유리엔이 눈으로 그녀의 손을 더듬다가, 엄지로 그녀의 손바닥을 가볍게 쓸었다. 굳은살이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감촉이었다. 그녀의 손은 작고 부드러웠다.
반면 섬세한 외모와 달리 유리엔의 손은 크고 거칠었다. 기사의 손이다. 에키는 움찔 어깨를 떨었다. 장갑 위에서 이루어지는 별것 아닌 접촉임에도 소름이 돋았다. 그 아래에 마검의 문양이 숨겨져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한동안 그녀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리깐 은빛 속눈썹이 길었다. 그가 속삭였다.
“그대의 손은 검을 즐기는 손이 아니다.”
에키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손목을 비틀어 그에게서 벗어났다. 유리엔은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파란 눈이 그녀를 응시했다.
“다시 묻지. 그대는 왜 기사가 되려 하나?”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왜, 기사가 되려 하냐고? 뭐라고 해야 하지? 아젠카까지 오는 동안 제법 많은 상황에 대해 미리 준비했었지만, 이런 상황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들킨다면 증오하겠지. 들키지 않는다면 관심이 없겠지. 기억이 없다면 더더욱, 엮일 일이 없겠지.
그렇게만 생각했었다. 유리엔이 탄신 연회 때의 그녀를 기억한다며 왜 기사가 되려 하냐고 물을 줄은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다.
에키는 완전히 혼란에 빠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유리엔은 대답을 기다리며 그녀를 보고 있었다.
고요하게 응시하는 그 눈동자가 익숙했다. 어지럽던 마음이 그 눈처럼 가라앉는다. 지워진 과거에, 철문 너머로 그녀의 승리를 기다리던 그의 눈이 떠올랐다. 그를 상대로 거짓말을 쌓아올리고 싶진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행복해지고 싶어서요.”
“…….”
“이상하게 들리시겠지만…… 진심이에요.”
기사가 되는 게 어째서 행복과 연결되는지, 무슨 사연인지, 분명히 물으리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유리엔은 묻지 않았다. 그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대답할 뿐이었다.
“그래, 그렇군.”
정말 납득했느냐고 묻기가 두려웠다. 이 화제 자체가 그녀에게는 부담스러웠다. 에키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 다른 말을 꺼냈다.
“여기에는 무슨 일로 오셨나요?”
“그대야말로, 입학 첫날에 무슨 일로 여기까지 왔지?”
멀쩡한 분수대를 확인하러. 그녀가 그를 죽였던 사실이 완전히 지워졌는지 제 눈으로 보러 왔다. 그렇게 답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녀는 대강 핑계를 댔다.
“……그냥 산책하다 보니 여기였어요.”
그녀의 말에 유리엔이 살짝 웃었다. 잘 웃는 사람이었구나. 전혀 몰랐다. 그녀가 보았던 그의 표정들은 무표정이거나, 연민이거나, 고요거나…… 마지막의 그때처럼, 형언할 수 없는 그런 표정들뿐이었으니까.
에키는 멍하니 그 웃음을 보았다. 웃는 얼굴은 더 예뻤다. 그가 딱딱한 말투와 달리 부드러운 어조로 대 답했다.
“나도 그대와 같은 이유다.”
“산책을 나오셨다고요?”
“……그래.”
아무래도 너무 공교로웠다. 하필 여기로 산책이라. 회귀 이전 자신이 죽었던 자리로, 자신을 죽인 여자를 스콰이어로 지명한 날 밤에. 정말 그냥 산책일까? 기억이 없는 게 맞을까?
의심이 돋아나도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어설프게 떠보는 건 너무 위험했다. 에키는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다가 말했다.
“저를, 스콰이어로 지명하셨다고 들었어요.”
스콰이어. 기사를 따르는 자. 기사의 동행자. 기사의 곁에서 기사를 보조하며, 전투의 최전선에서도 그 곁을 지키는 자. 기사로부터 경험과 기술을 전수받는 직속 제자.
수습 기간 후에 정식으로 스콰이어가 되면 그녀는 그의 모든 임무에 동행하게 된다. 그의 휴식과 그의 등 뒤를 맡는다. 아무에게나 맡길 만한 일이 아니었다. 적어도 자신을 죽였던 자에게 등을 맡기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역시 기억이 없는 거겠지. 다른 목적이 있어서 그녀를 지명한 게 아니라면. 혹시 무언가 목적이 있는 걸까.
“왜 저를 스콰이어로 지명하셨죠?”
“그대를…….”
유리엔이 하려던 말을 멈췄다. 아니, 삼켰다. 미소가 사라지고 깊게 가라앉은 시선이 그녀에게 와 닿았다. 긴 침묵 끝에, 그가 물었다.
“에키네시아 생도. 대련을 청해도 되겠나.”
“대련, 이요?”
“그대와 검을 나눠보고 싶어서.”
난데없이 대련이라니. 게다가 조심스럽고 부탁하는 듯한 어조였다. 명령을 해도 충분할 텐데, 아니, 지고한 기사단장과 신입 사관생도라는 현실을 따져보면 에키가 그에게 대련 한 번만 해달라고 매달리는 게 정상이었다.
“저, 저는…….”
에키는 저도 모르게 주춤 물러났다. 그녀는 절대로 그와 검을 나누고 싶지 않았다. 유리엔은 그녀가 아는 한 가장 강한 기사이자 가장 뛰어난 기오사 오너였다. 그를 상대하면서 그녀의 본래 실력을 드러내지 않을 자신은 없었다. 그렇다고 기뻐 날뛰어도 부족할 상황에 대놓고 거절하기도 어려웠다.
“지금이 아니라도, 언제든, 그대가 괜찮을 때에.”
그녀가 당황해하자 그가 담담히 덧붙였다. 그러면서 그는 후드를 풀어내렸다. 느슨하게 묶어둔 은발이 흘러내리며 가로등 빛 아래로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은은한 빛을 받은 그는 후광을 입은 것처럼 보였다.
“왜 그대를 스콰이어로 삼았는지는…… 검을 나눈 후에 답하지.”
그가 다가와 에키에게 자신의 망토를 걸쳐주었다. 그녀의 드레스는 봄 나들이용이라 얇았고 어깨를 드러낸 디자인이었다. 그 어깨 위에 검푸른 후드 망토가 내려앉았다. 그는 망토 자락을 가볍게 여며주었다.
“밤이 서늘하니 산책은 짧게 끝내도록, 에키네시아 생도.”
망토의 끈을 여민 손이 느리게 물러났다. 유리엔이 돌아섰다.
눈에 띄는 은발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걷자 기사단장을 알아본 사람들이 분분히 물러나며 허리를 굽혔다. 그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받아주며 멀어졌다.
에키는 그가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저놈 저거, 뭔 생각하고 있는 거야? 랑기오사 자식, 되게 이상한 주인을 골랐네.]
마검의 중얼거림에 겨우 정신이 들었다. 그녀는 어깨를 덮은 유리엔의 망토를 움켜쥐었다. 손끝이 떨렸다.
그가 지워진 과거를 알고 있는 건지. 왜 탄신 연회 때의 그녀를 기억하고 있는지, 스콰이어로 그녀를 지명한 이유는 무엇인지, 어째서 그녀에게 대련을 청하는지, 대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녀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이 순간 그녀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어깨를 감싼 망토의 온기.
예상하지도 기대하지도 않았던 그 온기는 어깨로부터 흘러내려 가슴 속으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온기의 의미는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알 수 없었다.
* * *
그날 밤, 에키네시아는 악몽을 꾸지 않았다. 대신 이상한 꿈을 꾸었다.
꿈에서 그녀는 아젠카 성의 지하감옥에 있었다. 익숙한 풍경. 그녀가 갇혀 있던 바로 그 감옥이었다. 사지에 족쇄가 달려 있었지만 그녀는 날뛰지 않았다. 그녀의 몸은 마검이 아니라 그녀 자신의 것이었다.
이중으로 닫힌 철문의 틈으로 눈부신 빛이 스며들었다. 멍하니 그 빛을 보고 있는데 문 너머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가 오고 있다. 어째서인지 그게 유리엔이라고, 곧바로 알아차렸다.
에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을 일으키는 순간 손목과 발목을 얽어 매고 있던 족쇄가 부스러져 내렸다. 손발이 가벼웠다. 비틀거리던 걸음은 철문에 가까워지면서 점점 빨라졌다.
그녀는 문을 열었다. 은발의 남자가 빛을 등지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역광이라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그를 올려다보며 활짝 웃었다. 환한 미소를 얼굴 가득 머금고 그를 향해 말했다.
“나를 기다려줘서 고마워요.”
거기서 꿈은 끝났다. 에키네시아는 소리 없이 눈을 떴다. 눈을 뜨고도 한참을 천장만 올려다보았다. 악몽은 아니지만 씁쓸한 꿈이었다. 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고 일어났다.
수업이 없는 사관학교는 임시 스콰이어직 수행 외에는 모든 게 자율이었다. 굳이 이른 아침에 일어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룸메이트인 앨리스는 이미 일어나 있었다.
앨리스는 샤워를 했는지 물기가 남은 몸에 얇은 셔츠와 바지 차림이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에키네시아를 발견한 그녀의 표정이 굳었다.
어젯밤 에키가 돌아왔을 때 앨리스는 방 안에 있었다. 그녀는 에키가 남성용이 틀림없는 큰 망토를 뒤집어쓰고 있는 것을 보았다.
입학 첫날 늦은 밤에 학교를 나가더니 남자 망토를 쓰고 돌아오는 룸메이트라니. 앨리스는 결투를 떠올리며 튀어나오려는 한마디를 참았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앨리스의 시선이 레이스가 하늘거리는 잠옷을 거쳐 에키의 손에 가 닿았다. 그 손에는 하얀 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기사용이나 훈련용도 아니고, 얇은 여성용 장갑이었다. 잘 때도 장갑이라니.
“…….”
앨리스는 뭐라 할 말이 많은 얼굴이었지만 꾹 눌러 참고 몸을 돌렸다. 그러다 발치에 뭔가 걸렸는지 움찔 멈추더니, 허리를 숙여 그것을 주웠다. 그녀의 미간이 구겨졌다.
“제가 참견하지 않기로 했지만, 이건…….”
앨리스가 에키의 침대 위에 그것을 내팽개쳤다. 발령장이었다. 어제 보고 펼친 채로 던져두고 잊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턱 아래로 흘러내리는 물기를 손등으로 닦으며 사납게 쏘았다.
“자랑하려는 목적으로 이렇게 펼쳐 뒀습니까? 그러지 않아도 당신이 단장님의 스콰이어가 된 건 잘 알고 있습니다.”
앨리스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생도복 자켓과 검을 집어 들더니 방을 나가버렸다. 신경질이 났을 테니 문을 쾅 소리 나게 닫지 않을까 했는데 의외로 그런 짓은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