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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든 꽃-15화 (15/211)

검을 든 꽃 15화

“……전 그분을 선배님보다도 모르는 걸요.”

“하하, 하긴 그렇겠지.”

그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기숙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에키는 아무도 남지 않은 연무장에 한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지루해진 마검이 칭얼거렸다.

[야, 가만 서서 뭐 해?]

“어쩐지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다 싶었어. 저 웃는 얼굴 보니까 생각나네.”

[뭐? 누구?]

“이안 펠레트로.”

[엘, 난 모르겠는데? 조종당하던 시절이야? 내가 깨어나기 전?]

“그래, 그 시절에.”

에키는 입술을 비틀었다. 그녀가 아젠카를 몰살시킬 때 저 남자도 있었다.

그녀의 손에 죽은 사람이 너무 많아서, 에키는 그 모두를 기억할 순 없었다. 그녀가 기억하는 건 가족이나 니콜 언니처럼 그녀에게 소중했던 사람과, 유리엔처럼 잊지 못할 기억을 남긴 사람들뿐이었다.

이안 펠레트로는 후자였다. 나쁜 의미로.

“내가 봤을 때는 생도가 아니라 기사였어. 내가 아젠카를…… 그렇게 만들었을 때가 지금으로부터 3년 후였으니까, 3년 안에 마스터가 되나 보네.”

[뭐 인상 깊은 일이라도 있었냐?]

“도망치는 사람들한테 방향을 반대로 알려줬었지.”

[무슨 방향?]

“내가 있는 방향.”

[……잠깐만, 그러니까 네가 있는 쪽으로 도망치는 사람들을 보냈단 말이야? 일부러?]

“그래. 그리고 내가 어린애부터 노인까지, 그 힘없는 사람들을 죽이는 사이에 달아나려 했지.”

[이야, 실리적인 놈이네. 맘에 드는데?]

인간의 악의를 좋아하는 마검은 킬킬 웃어댔다. 에키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이안 펠레트로는 기사인 자신에게 살려달라고 매달리는 어린아이에게, 이쪽으로 도망치라고 잘못된 방향을 알려주면서 무척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그 미소는 조금 전 에키를 향한 것과 똑같았다.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은 학살의 와중에도 그 장면은 뚜렷하게 기억했다. 민간인들이 자꾸만 그녀 쪽으로 몰려와서 이상했는데, 그 장면을 보는 순간 그의 짓인 걸 알아차렸었다.

이안 펠레트로의 다정한 웃음은 그의 예상보다 더 빨리 다가온 에키네시아를 발견한 순간 추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제 앞에 있던 아이를 그녀 쪽으로 밀치고 달아났다.

사람은 죽음을 앞두면 본성을 드러낸다. 이안 펠레트로는 그런 자였다.

에키네시아는 그를 죽였다. 물론 그를 죽이기 전에, 그녀 쪽으로 밀쳐진 무고한 어린아이도 죽였다.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기억.

“망할.”

에키는 욕설을 씹어뱉고는 마른세수를 했다. 이대로 잠들면 악몽을 꾸게 되겠지. 그녀는 기숙사가 아니라 다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관학교 밖으로 향했다.

[어디 가?]

“확인하러.”

[뭘?]

아무도 죽지 않은 아젠카를. 에키는 속으로만 그 대답을 중얼거렸다.

해가 진 아젠카는 조용하지 않았다. 일을 마치고 퇴근하는 사람들, 산책하는 사람들,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 어스름과 가로등 불빛 아래로 사람들이 오갔다.

아젠카는 어느 국가에도 속하지 않으므로 영주나 왕이 아니라 창천기사단에 세금을 낸다. 그리고 아젠카의 지배자인 현 기사단장은 합리적인 군주였다.

세율은 높지 않았고, 시민을 징발하거나 핍박하지도 않는다. 대륙 최강의 기사단이 터를 잡았으니 마물이 침범하는 일도 거의 없고, 범죄도 별로 일어나지 않는다.

살기 좋은 도시.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 대부분이 웃고 있다.

에키는 그들 사이를 조용히 걸었다. 웃고 떠들고 걷고 달리는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모두 살아 있다. 어디에도 피는 흐르지 않는다. 아젠카는 폐허가 아니었다. 그녀가 저지른 짓들은 이제 일어나지 않은 일이 되었으므로.

조금씩 마음이 편해졌다. 에키는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골목을 지나, 시장을 지나고, 운하 위의 다리를 건넜다.

‘마지막으로 그곳을 보고, 돌아가야지.’

중앙광장의 가운데에는 꽤 큰 분수대가 있다. 분수대의 중심부에는 신검 카이로스기오사를 든 천사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었다.

지워진 과거에, 에키네시아는 시체로 뒤덮여 붉은 피가 흐르는 이 분수대의 앞에서 유리엔을 맞이했었다.

에키는 광장의 인파를 헤치며 분수대로 다가갔다. 맑은 물이 흐르는 깨끗한 분수대를 보았다.

망가지지 않은 현재를 보는 건 가슴이 아릴 정도로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녀는 한동안 멍하니 그 분수대를 응시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시선을 느꼈다. 그녀의 감각이라면 진작 느꼈어야 할 시선인데 분수대에 정신이 팔려 뒤늦게 알아차렸다.

에키는 뒤를 돌아보았다.

후드를 쓴 남자가 서 있었다. 눌러 쓴 후드의 그늘 탓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남자와 그녀 사이로 사람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가 천천히 걸음을 옮겨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가로등 빛이 언뜻 후드 안쪽을 비추었다.

빛을 머금은 은발, 청명한 하늘색 눈동자. 마지막으로 그 얼굴을 본 지가 무척 오래되었으나,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새겨진 탓에 한눈에 알아보았다.

유리엔 드 하르덴 키리에가 그곳에 서 있었다.

에키는 못 박힌 듯이 움직이지 못했다. 숨을 쉬는 것을 잊었다. 머릿속에서 생각이 사라지며 시야가 하얗게 물들었다. 후드를 쓰고 있는 유리엔의 모습만이 선명했다.

1632년 가을, 바로 이 장소에서 그녀는 그를 마지막으로 보았었다. 이 분수대 앞에서 그를 죽였다. 그 후 마검을 극복하기 위해 2년 이상, 기오사를 모으기 위해 9년 더. 거의 12년 만이었다, 에키네시아의 기준에서는.

마스터가 되면 극도로 노화가 느려지는 탓에 그는 과거에도 지금도 별 차이가 없었다.

유리엔은 그녀로부터 약간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팔을 뻗어도 닿지 않지만, 그들 사이로 누가 지나가기엔 애매한 거리.

그는 후드를 벗지 않았다. 기사단장의 은발은 워낙 유명해서 사람이 많은 이런 광장에서 후드를 벗었다간 다들 알아볼 터였다.

그가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에키는 그의 턱에 간신히 닿는 키였다. 그녀가 작다기보다는 그가 워낙 컸다. 그래서 그녀의 시선에서는 후드 아래 그의 얼굴이 고스란히 보였다. 여전히 기사라기엔 지나치게 섬세한, 시인 같은 얼굴이었다.

그의 눈은 고요하지 않았다. 파란 파도처럼 격랑이 일었다. 그러나 몇 번 눈을 깜박임과 동시에 그 격랑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에키는 그것을 보고도 인지하지 못했다. 인지할 여유가 없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사실만이 선명했다.

‘살아 있어…….’

그거면 충분했다. 그에게 하고 싶었던 말들, 그에게 묻고 싶었던 것들, 그런 건 다 사치로 느껴졌다. 그가 알아보면 어떻게 하나, 하는 근심도 이 순간에는 떠올릴 수 없었다. 에키는 그저 홀린 듯이 생기가 있는 그의 눈을 응시했다. 살아 있는 사람의 눈은 몹시 아름다웠다.

긴 정적을 먼저 깬 건 유리엔이었다.

“……에키네시아 로아즈.”

낮은 목소리가 그녀의 이름을 발음했다. 부른다기보다는 확인하는 것 같은 느낌으로. 자신 앞에 서 있는 여자가 누구인지 스스로에게 들려주듯이.

“생도.”

그는 뒤늦게 호칭을 붙였다. 에키는 요란하게 눈을 깜박였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유리엔이 말을 고르듯 입을 열었다 다물었다. 그러다 느릿하게 물었다.

“나를 아는가?”

추궁은 아니었다. 떠보는 투도 아니었다. 그저 사실을 확인하듯 건조한 물음이었다.

에키는 그 물음에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가장 먼저 한 행동은 눈을 내리깔고 입가를 손으로 가리는 것이었다. 그가 기억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빤히 올려다보다니,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무리 그 시절과는 완연히 다르고 화장에다 망사가 드리운 모자까지 쓰고 있어도 마주보는 건 두려웠다. 그가 자신을 죽인 여자를 알아보는 일만은 피하고 싶었다. 에키는 시선을 피한 채 대꾸했다.

“죄송하지만 누구신지 잘 모르겠어요. 저를 아시나요?”

그에게 기억이 있든 없든, 그를 아는 티를 낼 순 없었다. 창천기사단과 보통의 백작 영애 사이에는 접점이 없으니까.

그녀의 대답에 유리엔은 잠시 침묵하더니, 희미하게 웃었다. 살짝 휘어지는 입술, 미미하게 올라간 입 꼬리, 곱게 흐무러지는 눈매.

‘웃었어?’

웃는 건 처음 봤다. 볼 일이 없었으니. 아주 옅은 미소인데도 주위가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얼굴에 열이 오르는 느낌이라 에키는 몹시 당황했다. 그런 그녀에게 더 당황할 만한 말이 떨어졌다.

“내가 누구인지, 그대는 알 텐데. 본 적이 있지 않나.”

“네?”

되묻는 목소리가 갈라졌다. 들떠 있던 심장이 툭 떨어져 발치에서 나뒹구는 기분이었다.

기억하고 있나? 기억이 있어? 내가 그를 배신하고, 죽여버린, 바로 이 분수대 앞에서, 그렇게 했던 기억이?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그에게 뭐라고 말해야 하지?

그녀가 미치기 일보 직전에, 그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작년 여름, 탄신 연회 때 말이다.”

“……아.”

그 뒤가 워낙 강렬해서 반쯤 잊고 있었지만 에키네시아가 유리엔을 처음 본 건 황제 탄신 연회 때가 맞았다. 먼발치에서 구경만 했을 뿐, 춤 한 번 같이 춰본 적 없긴 해도.

작년 일이니 시간을 되돌린 지금도 당연히 있었던 일이다. 그때에도 지금처럼 한껏 꾸민 상태였으므로 알아보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는 건, 대화는커녕 눈도 마주친 적 없는 한갓 백작 영애를 그가 기억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에키는 입술을 우물거렸다. 바짝 마른 입 안에서 말을 꺼내어 놓기가 쉽지 않았다. 그녀는 간신히 물음을 꺼냈다.

“탄신 연회에서, 저를…… 보셨었어요?”

“그대가 누구인지는 몰랐지만, 그대를 본 기억은 있지. 그대는 나를 보지 못했었나?”

그 연회에 참석했던 사람치고 유리엔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황태자보다도 3황자인 그가 훨씬 더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으니까.

창천기사단장이라는 이유가 가장 크지만 그 이유를 제해도 그는 아름다움만으로도 시선을 끄는 남자였다.

에키는 이제야 떠올린 것처럼 과장되게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다, 단장님이셨군요! 늦게 알아차려서 죄송합니다.”

“단장님이라…….”

유리엔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는 무언가 생각하더니 작게 고개를 저었다.

“이름으로 부르도록. 내 이름은 유리엔이다.”

그는 성을 말하지 않았다. 예전부터 속으로는 계속 그를 이름으로 불렀던 에키는 지레 놀라 급하게 거절했다.

“전 사관생도입니다, 단장님. 어떻게 감히.”

“사관생도, 그렇군.”

그녀의 거부에 유리엔은 모호한 눈으로 에키를 바라보았다.

에키는 그의 눈을 피했다. 사관생도라기엔 옷차림이 영 아니긴 하지. 그녀는 그가 제 옷차림 때문에 이상하게 여긴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유리엔은 그녀의 드레스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하얀 얼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가 나직이 물었다.

“그대는 왜 사관학교에 지원했나?”

“기사가 되고 싶어서요.”

“왜 기사가 되고 싶지?”

“……검을 좋아하니까요.”

면접 자리에서나 나올 법한 식상한 질문과 식상한 대답. 사관생도와 기사단장이라는 관계를 보면 무난한 대화였다.

에키가 약간 긴장을 풀려는 찰나, 유리엔이 갑자기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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