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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든 꽃-14화 (14/211)

검을 든 꽃 14화

짧게 자른 금발과 큰 키 때문에 앨리스는 여자라기보다는 우아한 소년처럼 보였다. 아무런 장식이 없는 검푸른 생도복까지 합쳐지자 모범적인 사관생도 그 자체였다.

격식 있는 결투에서 인사를 받았으면 되돌려 주어야 한다.

에키네시아는 검을 뽑으며 검집을 바닥에 아무렇게나 떨궜다. 검에 대한 존중이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 태도였다. 지켜보고 있던 생도들 중 몇이 대놓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의 손에 들린 검도 그러했다. 제대로 손질되지 않은 싸구려 롱소드. 검에 비해 그녀의 옷차림은 생도들이 보기에 과할 정도로 화려했다. 검과 여자는 잘못 끼워 맞춘 퍼즐처럼 어울리지 않았다.

에키는 한 손에 검을 쥐고, 드레스 자락을 잡았다. 오른손은 검과 드레스 자락을 동시에 쥐었다. 오른발을 뒤로 옮기면서 몸을 낮추고, 무릎을 살짝 굽혔다 편다. 발을 제자리로 되돌리며 몸을 세우고 허리를 똑바로 편 다음 드레스를 내려놓는다.

손에 쥔 검을 뺀다면 완벽한 레이디의 예절이었다. 지금까지 사관학교의 생도에게서는 볼 일이 없었던 인사였다.

사관학교의 관습이건 기사의 예법이건 남성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것 들이다. 레이디는 지켜야 할 대상이지 기사가 될 수 없으므로, 여생도는 생도가 되는 순간부터 레이디여서는 안 되었다.

그런데 검을 쥔 레이디라니, 레이디의 인사를 하는 사관생도라니. 아무도 상상해 보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인사는 지극히 낯설고, 거부감이 들었다. 생도들 사이에서 어색한 술렁거림이 퍼져나갔다.

에키는 생도들의 반응에 관심이 없었다. 사실 그녀는 반쯤 정신을 놓고 있는 상태였다. 유리엔의 스콰이어로 지명되는 일이 벌어질 줄 알았다면 일부러 앨리스를 긁지 않았을 것이다. 머릿속이 엉망진창이라 연기가 잘 되지 않았다.

그 상태로 검을 쥐고 전투를 준비하니 기세를 숨기기도 쉽지 않다. 적당히 조절해야 할 텐데, 머리가 복잡하니 한바탕 검을 휘두르고 싶었다. 그녀는 아슬아슬하게 그 욕구를 억누르고 있었다. 그나마 상대가 그녀의 기준에선 풋내 나는 어린애여서 투지가 솟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그리고 그녀를 마주하고 있는 앨리스는 그 분위기를 감지했다. 앨리스의 회색 눈이 가늘어졌다.

‘뭔가…… 달라.’

낮에 처음 만났을 때와는 무언가 다르다. 분명 방긋방긋 웃으며 궤변을 늘어놓던 여자였고, 고생도 철도 모르는 귀족 아가씨로 보였다.

그런데 지금의 에키네시아에게서는 억제된 난폭함 같은 것이 스며 나왔다. 겉모양은 온실 속의 화초처럼 곱고 연약한데, 식인 마물이 사람을 흉내 내고 있는 느낌이었다.

앨리스는 손잡이를 고쳐 쥐었다. 손 안에 긴장이 들어찼다.

이안 펠레트로가 두 결투자가 준비된 것을 확인하고 제 검을 뽑았다. 그들 사이에 이안의 검이 가로 놓여졌다. 이안은 다시 한 번 양측을 번갈아 확인하고는, 단숨에 검을 들어 올려 치웠다. 시작 신호였다.

미리 정한 대로 앨리스가 선공을 했다. 양보받은 예의상 그녀는 빗겨 찌르는 공격으로 시작했다. 목을 꿰뚫을 듯 파고들지만 그 옆을 스쳐지나가는 공격. 그러나 무척 빨랐다. 어지간하면 속임수인 걸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에키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앨리스의 칼이 목덜미를 스쳐지나가며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상대가 전혀 반응하지 않자 당황한 건 앨리스였다. 빠르게 검을 회수하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녀는 앨리스가 물러나 다시 자세를 잡을 때까지도 움직이지 않았다. 앨리스의 두 번째 공격이 들어올 때서야 그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체로 검술이라는 건 결국 기초의 응용이다. 막고, 찌르고, 베는 것. 제국식 검술이니 남동부식 검술이니 하는 검술들은 결과적으로 이 기초의 확장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그 확장이라는 건 아득하리만치 다양했고, 그 많은 검술 유파들에 개인의 특성, 버릇까지 맞물리면 수없이 많은 검술이 만들어졌다.

그래서 어느 정도 완성된 검사의 경우 검술만 보아도 누구인지 구분 될 만한 개성을 가지게 된다. 기사 지망생들에게는 상식이었다.

따라서 결투를 지켜보는 생도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에키네시아 로아즈의 검에서는 개성이 보이지 않았다. 의지도 투지도 색깔도 없었다.

특별한 기술도 쓰지 않는다. 오로지 기본기. 들어오는 검을 막는다. 빈틈이 보이면 찌른다. 공간이 비면 벤다.

그렇다고 교과서에 나올 만큼 깔끔한 자세도 아니었다. 검을 처음 잡은 초심자에게서나 볼 수 있는 마구잡이 형태였다. 우아하고 정제된 앨리스의 검과 비교하면 투박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적극적인 공세도 하지 않았다. 앨리스의 공격에 대한 임기응변 내지는 반사작용에 가까운 대응이 이어질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닿지 않는다. 앨리스의 검이 가는 길에는 항상 에키의 검이 있었다. 혹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대다수의 생도들은 왜 저 마구잡이 대응을 앨리스가 뚫지 못하는지 이상하게 여겼다. 그러나 개중에서 실력이 좋은 몇몇은 확실하게 알아차렸다.

언뜻 보기에는 빠르게 공격을 쏟아 붓는 앨리스가 유리해 보였지만 실상 압도하고 있는 건 에키네시아였다. 이건 거의 에키네시아가 앨리스를 가지고 노는 수준이었다.

그녀는 전혀 진지하게 대응하고 있지 않았다. 놀아달라 칭얼거리는 어린아이를 건성으로 안아주는 듯한, 그 정도 수준의 반응. 그럼에도 앨리스는 그녀를 이기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뭐 하자는 거야?’

그 점을 누구보다 명확하게 알아차린 건 당사자인 앨리스였다. 그녀의 얼굴이 점차 창백하게 질려갔다.

건성건성 움직이는 검에 그녀의 모든 공격이 막혔다. 그 치렁치렁한 옷자락에조차 검이 닿지 않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칼날을 쳐내고 그 반동으로 찔러 들어올 때면, 딱히 공격하려는 의지가 보이지 않는데도 그 날카로움만으로도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모든 공격을 받아내거나 흘려버리자 검들이 맞물려 그리는 궤적이 미리 합을 맞춘 검무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나풀거리는 드레스 자락과 레이스가 달린 소매, 리본의 끈들이 그런 인상을 더했다. 결투라기보다는 무도회의 왈츠와 같은.

결국 앨리스는 뒤로 물러났다. 빈틈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빠지는데도 에키네시아는 따라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제자리에 멈추며 검을 늘어뜨렸다.

앨리스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숨을 몰아쉬었다. 농락당하는 기분이었다. 공격해서 끝을 내지 않는다는 점이 더더욱. 검을 맞대고 있는데도, 상대를 해주지 않는다는 느낌.

그렇게 장난치듯 대응하는 여자는 심지어 굽 높은 여성용 구두까지 신고 있었다. 실력 차이가 심한 기사들과 대련할 때도 이 정도로 비참한 기분이 들진 않았다.

앨리스는 이를 악물며 물었다.

“당신은…… 왜 공격하지 않습니까?”

“……아.”

내내 무표정하던 에키의 얼굴에 표정이 돌아왔다. 내심 낭패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 그녀의 검술에도 특징과 개성이 있다. 타인이 흉내 내기 어려운 그녀만의 기술도 물론 있었다. 그런 특징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고, 드러내지 않아도 충분하기 때문에 숨겼을 뿐이다.

하지만 공격을 하지 않고 대응하기만 한 건 의도가 아니라 실수였다.

에키네시아는 마검의 주인이었고, 이성을 잃으면 그 검에 깃들어 있는 살의에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그녀는 혼란한 상태로 사람을 상대하게 될 때는 아예 공격을 하지 않는 습관이 있었다.

‘차라리 빨리 끝냈어야 하는데.’

생각이 계속 다른 곳에 가 있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사과를 하면 더 모욕을 주게 되겠지. 결투 중에 딴생각이라니. 에키는 입을 다물고 검을 움직였다.

좁은 첫 걸음, 넓은 두 번째 걸음. 두 걸음 만에 앨리스의 코앞에 칼날이 들이밀어졌다.

앨리스가 당황하여 검을 들어 막았다. 같은 높이에서 맞부딪힌 검, 오랜 훈련에 따라 앨리스는 검이 맞닿는 순간 정면을 향해 검을 밀었다. 상대의 검을 타고 미끄러진 그녀의 칼날이 에키의 얼굴을 노리고 찔러 들어갔다.

그 순간 에키의 대응은 간단했다. 손목을 위로 올렸다. 실리는 힘을 거스르지 않고 받아들이며 방향만 바꾸었다.

그 결과 에키의 검을 타고 있던 앨리스의 검은 균형을 잃고 위로 붕떴다. 에키의 검은 앨리스의 검을 떨쳐낸 반동을 이용해 반 바퀴 회전했다.

그 칼날은 앨리스의 관자놀이를 향해 휘둘러졌다. 그리고 손가락 반 마디 정도의 간격을 남기고 정확하게 멈췄다. 검의 바람에 앨리스의 짧은 금발이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낮은 술렁임이 생도들 사이에서 퍼져나갔다. 에키네시아에게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검격이 나왔다. 검술 교본에도 실려 있는, 단순하고 흔한 기술이었다. 그리고 그 첫 공격으로 결투는 끝났다.

“……졌습니다.”

앨리스가 토해내듯 말했다. 에키는 검을 거두고 인사를 했다. 아까와 같은 레이디의 인사. 앨리스에게는 그것이 조롱처럼 느껴졌다.

‘이건…… 결투가 아니었어. 저 여자는 전혀 집중하지 않았다.’

속이 들끓었다. 그래도 결투는 결투. 승패는 나왔다. 앨리스는 검을 갈무리하고 반듯하게 허리를 숙였다. 목소리가 떨리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제 패배를…… 인정합니다. 당신에게 더 이상 참견하지 않겠습니다.”

“……저야말로 실례가 많았어요, 윈터벨 양.”

에키는 상당한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러나 앨리스는 그 사과를 진심으로 듣지 못하는 듯했다. 허리를 펴는 그녀의 눈매가 싸늘했다. 이안이 분위기를 환기하듯 박수를 쳤다.

“수고했어, 둘다. 아무도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네. 참, 첫 순위전 이전의 결투이므로 이 결투는 순위에 반영되지 않아.”

이안의 말이 끝나자마자 앨리스는 휙 몸을 돌려 연무장을 빠져나가 버렸다. 결투가 끝난 걸 확인한 생도들도 웅성거리며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꽤 하긴 하는데, 입학 첫날에 스콰이어로 지명될 정도는 아니지 않아? 저게 뭐가 잘하는 거냐, 상대인 금발 애가 못한 거지. 대체 무슨 수로 스콰이어가 된 걸까? 별거 아니잖아. 그래도 마지막 공격은 좋았는데. 그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어. 고작 저런 걸로 스콰이어라면 나도 스콰이어다.

생도들은 그런 대화를 주고받으며 하나 둘 떠나갔다. 에키는 아까 내팽개친 검집을 주웠다. 이안이 머쓱하게 웃더니 그녀를 향해 말을 걸었다.

“너, 대단하더라.”

“……뭐가요?”

“진짜 실력을 볼 줄 모르는 애들 말은 신경 쓰지 마. 뛰어난 검이었어. 순위전이 기대되는 걸.”

뭔 얘긴가 했더니. 그런 말들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에키는 대충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그럼 내일 보자, 에키네시아 생도. 9시야, 잊지 마.”

“네.”

이안이 부드럽게 말하고는 돌아섰다. 에키는 문득 떠오른 것이 있어 멀어지는 그를 불렀다.

“저, 선배님!”

“응?”

“제가 왜 유리엔…… 단장님의 스콰이어가 된 건지 아세요?”

하마터면 유리엔이라고 부를 뻔했다. 속으로 계속 그렇게 불러댄 탓이었다.

이안이 고개를 기울였다. 유리엔보다는 훨씬 짙어 남색에 가깝게 보이는 푸른 눈동자가 에키를 가만히 훑었다. 관찰하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

“내가 3학년이 될 때까지, 단장님의 임시 스콰이어직을 수행한 건 총 세 번이야. 아, 지금도 그분의 임시 스콰이어고, 모실 때마다 참 편했어. 왜 편했을 것 같아?”

“……글쎄요.”

“예측하기 쉬운 분이셨거든. 규칙적인 생활, 합리적이면서도 기사도에 어긋나지 않는 판단, 법도에 대한 존중. 그야말로 성검의 주인다운 분이지. 성검 랑기오사가 무엇으로 만들어진 기오사인지는 알지?”

“네.”

마검 바르데르기오사가 인간의 악의와 살의를 재료로 만들어졌듯, 성검 랑기오사는 인간의 사명감과 정의로 만들어진 기오사였다. 에키가 끄덕이자 이안이 말을 이었다.

“그분은 충동이나 즉흥을 따라 움직이지 않아. 납득하기 어려운 결정을 내리시는 일도 없어. 그런데 이번 결정은, 글쎄, 이해하기 어렵지. 정말로, 나야말로 너한테 묻고 싶은데.”

이안이 눈을 휘며 웃었다. 묘하게 서늘한 웃음이었다. 그가 상냥하게 물었다.

“왜 단장님이 널 스콰이어로 지명했을까? 혹시 그분과 무슨 인연이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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