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13화
이안이 친절하게 웃었다. 약간 날카로운 인상과 달리 대하기 편하고 사교적인 성격이었다. 대표가 된 이유를 알 만했다. 에키는 옅게 한숨을 쉬었다.
“그럼 이제 그, 영입 경쟁이 심해질 이유란 걸 말해 주실 수 있나요?”
“음.”
이안이 헛기침을 했다. 주위에서 생도들이 은근히 그들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다들 오가는 공용식당에서 한눈에 띌 정도로 특이한 신입생과 생도 대표가 나란히 앉아 있는 탓이다.
그 시선 속에서 그가 다시 한 번 에키를 찬찬히 살펴보더니, 폭탄이나 다름없는 말을 던졌다.
“1학년 에키네시아 로아즈, 스콰이어 지명이다.”
순식간에 식당 안에서 잡음이 사라졌다. 소름끼치는 정적이 잠시 머문 후에, 사방에서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스콰이어? 신입생이 스콰이어라고?”
“……지금 저게 무슨 소리야?”
“이안! 야! 너 지금 농담하는 거지?”
“선배님, 어떻게 된 겁니까?”
개중 몇몇은 아예 이안에게로 다가와 캐묻기 시작했다. 이안은 예상했다는 듯 어색하게 웃었다.
“본관 게시판에 곧 공고가 붙을 거야.”
“공고가 붙는다고? 미친, 정말 스콰이어 지명이야?”
“에이, 임시 지명이겠지. 설마.”
“정말입니까, 선배님? 새 스콰이어는 2년 만인 거 아닙니까?”
좀 전보다 배는 서슬 퍼런 시선이 에키에게 몰려들었다. 에키는 어이가 없어 멍하니 입을 벌렸다.
한 해에 입학한 50명의 사관생도 중에 단 한 명도 스콰이어가 나오지 않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기사가 스콰이어를 두는 것은 권장 사항일 뿐 의무가 아니었으며, 심부름이나 보조는 어차피 생도들이 돌아가면서 맡아주었다. 이런 상황에서 스콰이어를 지명한다는 건 결국 개인 제자를 들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에키는 처음부터 스콰이어가 될 생각이 없었다. 정식 기사와 깊은 관계를 맺게 되는 스콰이어는 그녀로서는 되도록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그녀는 생도로 지내며 창천에 눈도장을 찍고, 적당히 공을 세운 다음 마스터가 되어 바로 정식 기사가 되는 것이 목표였으니까.
그런데 입학 첫날에 스콰이어라니. 그녀는 저도 모르게 이를 갈며 물었다.
“대체 누구예요?”
어느 미친놈이, 난데없이 날 스콰이어로 지명한 건데? 선발시험 때부터 입학한 오늘까지 통성명한 기사조차 하나도 없는데! 설마 기오사 오너 중에 날 알아차린 사람이 있나? 아냐, 그랬으면 죽이려 들거나 체포했겠지. 그럼 대체 누구야?
삽시간에 온갖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그녀의 물음에 생도들의 시선이 이안에게 쏠렸다. 이안은 그 주목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넘겼다. 그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유리엔 드 하르덴 키리에 경이시다.”
조금 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묵직한 정적이 깔렸다.
여기서 튀어나오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이름이었다. 기오사 오너, 성검 랑기오사의 주인, 창천기사단장. 스물세 살에 마스터, 스물네 살에 전 단장을 실력으로 꺾고 단장이 된 후로 4년이 흐른 지금까지, 그는 임시 스콰이어조차 지명한 적이 없었다.
한동안 지속된 정적을 한 생도가 떨리는 목소리로 깼다.
“이안, 농담이지?”
“공고 확인해 보든가.”
어깨를 으쓱인 이안이 에키를 돌아보았다. 에키는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얼어붙어 있었다. 그가 양피지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 그녀의 앞에 내려놓으며 담담히 말했다.
“발령장이다. 수습 기간은 한 달, 정식 배치는 그 후. 수습 기간 동안 내가 네게 스콰이어 예비 교육을 시행하게 될 거야. 내일 오전 9시까지 본관 동쪽 제4연무장으로 오도록, 이상. 질문 있니?”
“…….”
그녀는 제 앞에 놓인 두루마리를 내려다보았다. 돌돌 말린 고급 양피지를 봉한 붉은 밀랍에는 창천의 매 문장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머리가 하얗게 비는 기분이었다.
“없나 보네, 그럼.”
그녀가 말이 없자 이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로 떠나려던 그가 깜박 잊었다는 듯 말을 덧붙였다.
“아, 너 오늘 해 지는 시각에 결투한댔지? 여자 기숙사 뒤면 제7연무장? 앨리스 생도에게 들었어. 입회인 수락했으니 그때 보겠네. 식사 맛있게 하렴.”
그 말에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에키는 반사적으로 두루마리를 움켜쥐고 벌떡 일어났다.
그녀가 순식간에 식당 밖으로 사라지고 나자 식당은 폭발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소란스러워졌다. 오너, 스콰이어, 신입생, 창천기사단장, 결투 등의 단어가 어지럽게 공간을 채웠다. 좁은 사관학교에서 소문은 들불 번지듯 퍼져나갔다.
에키는 거의 나는 듯한 속도로 방으로 돌아갔다. 다행히 앨리스는 방에 없었다. 그녀는 등 뒤로 문을 닫고 잠근 다음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떨리는 손으로 양피지 두루마리의 밀랍을 떼어냈다.
짙푸른 잉크에 반듯한 글씨체로 쓰인 발령장이 눈에 들어왔다.
-발령장.
사관학교 1학년, 에키네시아 로아즈.
위 생도를 기사 유리엔 드 하르덴 키리에의 스콰이어로 임명함.
1629년 4월 18일.
몇 번을 되풀이해 읽어도 내용은 바뀌지 않았다. 선명하게 찍혀 있는 붉은 인장도 분명히 창천의 문장이었다. 에키는 발령장을 아무렇게나 내던져 버렸다.
[랑기오사의 주인인 유리엔 맞지? 걔 기억 있나? 너 알아본 것 같아? 근데 알고 있는 거면 널 죽이려 드는 게 정상 아니야? 스콰이어라니, 주인아, 넌 어떻게 생각하냐?]
‘유리엔? 유리엔이라고?’
마검이 떠드는 말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허공을 노려보았다. 그녀가 아는 유리엔의 모습들이 뇌리를 점령했다.
하얀 검을 겨누던 남자. 그녀의 눈물을 보고 놀라던 얼굴. 기회를 주겠다던 목소리. 철문의 틈 너머로 지켜보던 푸른 눈. 아젠카를 뒤덮은 시체의 악취 속에서 그녀를 보던 눈.
그녀가 그에게 가진 감정은 간단하게 표현하기 어려웠다. 그 감정들은 어쩌면 사랑으로 발전할 수도 있었다. 그에게 깨어나면 하고 싶은 말을 모으던 때엔 설레기도 했었다. 분명히 그녀의 마음은 발긋하게 물들어가는 중이었다.
그러나 마음이 여물기에는, 그녀가 저지른 짓이 너무나 참혹했다. 그녀는 차마 그를 사랑할 수 없었다.
몰살당한 아젠카에서 금이 간 것처럼 보이던 그의 눈을 마주하던 기억이, 그가 숨을 거두던 순간이, 날카로운 죄책감과 욱신거리는 비통함이 되어 유리엔에 대한 다른 감정을 압도했다. 그녀의 감정은 그때 피기도 전에 부서졌다.
마검에 물들어 그녀가 죽인 사람은 수없이 많았으며 그중에는 소중한 사람도 여럿이었다. 에키네시아는 그들에게 죄책감을 가지면서도 한편으로는 항변할 말이 있었다. 원해서 저지른 짓이 아니라고. 그건 다 마검 때문이었다고.
하지만 유리엔에게는 그럴 수 없었다. 그가 믿어준 건 마검에 물든 껍데기가 아니라 그 안에 있던 에키네시아였으니까. 그리고 그녀는 그의 기대를 배반했다.
‘마검이 아니라 내가 그 믿음을 부순 거지. 내가…… 그가 준 기회를 망쳤어. 이겨내지 못했으니까…….’
에키는 무릎에 고개를 파묻었다. 대체 왜 그가 자신을 스콰이어로 지명했을까.
그냥 입학 성적이 수석이라서? 2차 시험 때 준기사를 상대로 너무 과했나? 그 준기사가 무언가 말을 전했을까?
아니면 정말로, 기억이 있는 걸까. 나를 알아본 걸까. 하지만 어떻게? 회귀한 후 그와 마주친 적은 없는데? 그럴 리가 없어. 날 알아봤다면 기오사 오너들과 함께 나를 죽이러 오지, 스콰이어 지명 따윌 할 리가.
한 번 봐주었다가 끔찍한 파멸을 맞이한 그다. 두 번째 기회가 온다면 망설임 없이 그녀를 베려 들 것이다. 에키는 그렇게 확신했다. 기억이 남아 있다면, 유리엔이 그녀를 증오하지 않을 리가 없으니까. 그래서 그녀는 그를 만나고 싶으면서도 만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스콰이어란다. 계속 그의 곁에 머물러야 하는.
어질어질했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오랜 시간 생각했다. 중간에 몇 차례 마검이 떠들어 댔지만 에키가 반응하지 않자 제풀에 지쳐 입을 다물었다.
해가 저물며 창에서 노을이 흘러들었다. 에키는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구석에 세워둔 롱소드를 집어 들었다. 그녀의 화려한 짐들 중에서 유일하게 투박한 물건이었다. 아젠카 시내에서 대충 구입한 저렴한 검이라 질이 좋지 않았다.
드레스에는 검을 찰 수 없었다. 그녀는 검집에 든 검을 한 손에 쥐고 곧바로 기숙사 뒤의 제7연무장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마주치는 생도마다 그녀의 차림새에 움찔 놀라고, 이어서 제 주위의 다른 생도와 무언가를 속닥거렸다. 스콰이어라는 단어가 몇 차례나 들렸다.
연무장 주위에 몰린 인파는 굉장했다.
사관학교는 수업을 해주진 않아도 훈련을 위한 지원만은 확실하게 해 주는 곳이었다. 연무장도 크기와 종류, 용도별로 여럿이 있었다. 제7연무장은 자기 전이나 일어난 직후에 잠깐 몸을 푸는 생도들을 위한 공간으로, 허수아비 모형이 몇 개 설치되어 있고 산울타리로 둘러싸인 작은 연무장이었다.
결투를 할 만한 공간은 충분했지만 관람을 할 만한 자리는 없었다. 그래서 생도들은 산울타리 밖이나 허수아비 모형 근처에 다닥다닥 몰려 있었다. 학교에 있는 생도 대부분이 여기에 있는 게 아닐까 의심되는 숫자였다.
입학 첫날 수석과 차석 사이의 결투라는 것만 해도 호기심을 끌 텐데 그중 하나가 기사단장의 스콰이어로 지명되기까지 했다. 결투에는 관심이 없던 생도까지도 모조리 몰려나올 수밖에 없었다.
입회인인 생도 대표가 입을 다물고 있었으면 몰라도, 수많은 생도가 모여 있는 공용식당에서 얘기해 버렸으니 필연적인 결과였다.
사관학교를 반나절 만에 점령해 버린 소문의 주인공이 다가오자 생도들이 주춤주춤 비켜섰다.
에키는 무표정하게 연무장에 발을 들였다. 앨리스 윈터벨은 이미 와 있었다. 그녀도 스콰이어 지명 이야기를 들었는지 표정이 괴상했다.
“어서 와, 에키네시아 생도.”
이안 펠레트로가 사람 좋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에키는 대답 없이 고개만 숙여 보였다. 그녀는 앨리스의 맞은편에 섰다.
“뭐, 시간 끌 이유도 없으니…… 바로 시작할까? 선공은 결투 신청자인 앨리스 생도가 하는 걸로.”
“예, 감사합니다.”
“네.”
앨리스와 에키네시아가 동의했다. 그들의 가운데에 선 이안이 가볍게 손바닥을 맞부딪혀 소리를 냈다. 연무장 주위에 빼곡한 생도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신력 1629년 4월 18일 늦은 오후, 입회인 이안 펠레트로의 주관하에 생도 에키네시아 로아즈, 생도 앨리스 윈터벨이 검의 대화를 시작합니다. 승자에겐 자비와 관용이, 패자에겐 승복과 겸허를, 검에는 명예와 정의가 깃들게 하소서. 아르 세밧티엠.”
기도문과 유사한 결투 선언이었다. 창천기사단의 기원이 신검 카이로스기오사를 신의 증거로 받들던 사도들이었던 터라 창천의 문화에는 이런 종교적인 면이 꽤 남아 있었다.
아르 세밧티엠, ‘신의 영광 있으라’라는 뜻의 고어 역시 신관들이 주로 사용하는 표현이었다.
선언이 떨어지자 앨리스가 허리에 찬 검을 뽑아 들었다. 검의 매끈한 은색 몸체는 거울처럼 반질반질했다. 한눈에 보아도 정성 들여 관리하고 꾸준히 길들인 명검이었다.
앨리스는 그 검을 상체 앞에 세워 들었다. 칼날을 곧게 세우고, 손잡이와 칼날 사이의 가드를 입술에 닿을 듯 말 듯 가까이했다가 됐다. 그 후에 칼끝을 오른쪽으로 늘어뜨렸다. 절도 있는 제국식 기사의 예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