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12화
“기사도를 지키는 겁니다. 명예를 알고, 검소하며, 약자를 존중하고, 무를 숭상하는, 테레사 폰 프랑 알마리 경처럼 말입니다.”
테레사의 이름을 말하는 앨리스의 눈은 동경하듯 반짝였다. 그리고 에키는 예상치 못한 순간 나온 이름에 흠칫 놀라고 말았다. 자신이 죽였던 기오사 오너의 이름이다.
그녀는 놀란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더 뻔뻔하게 대꾸했다.
“기사도에도 치장을 해선 안 된다는 말은 없잖아요.”
“너무 당연해서 아무도 말하지 않은 겁니다.”
“그러니까, 대체 왜 당연하다는 거죠?”
“사치스러운 허영이잖습니까!”
“제가 빚을 내서 옷을 산 것도 아니니, 사치스럽다는 말은 맞지 않는 걸요. 이건 다 제가 원래 쓰던 물건들이에요. 기사다운 옷을 일부러 사는 게 더 사치스러운 일 아닐까요?”
“더 살 필요가 있습니까? 생도복을 입으면 됩니다.”
“그럼 저는 윈터벨 양이 보기에 거슬리니까, 멀쩡한 제 옷들이 있는데도 생도복만 입으란 소린가요?”
에키의 말은 궤변에 가까웠지만, 앨리스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녀에겐 말할 필요조차 없이 당연한 사실을 계속 반박당하니 설명하기가 어려운 모양이었다.
앨리스의 꽉 깨문 입술이 분한 듯 바르르 떨렸다. 어물거리던 그녀는 결국 보다 실리적인 이유를 끄집어냈다.
“……애, 애초에 그런 불편한 차림으로 검을 제대로 쓸 수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전 안 불편한데요?”
사실 불편하다. 귀족으로 나고 자라 익숙할 뿐이지, 치렁치렁한 옷자락과 부풀린 패티코트, 꽉 조인 코르셋이 불편하지 않을 리가 없다. 옷차림 따위에 구애받지 않는 실력이 아니었다면 다른 방법을 강구했을지도 모른다.
당연히 앨리스는 에키의 말을 믿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릴……!”
“제 입학 성적은 윈터벨 양도 아실 텐데요. 안 믿기면 이 상태로 대련이라도 해 보시겠어요?”
앨리스가 이를 악물더니 에키를 노려보았다.
“지금, 너 정도는 드레스를 입고도 문제 없다, 그런 뜻입니까?”
“어머, 그렇게까지 무례한 생각을 하진 않았어요. 그냥 윈터벨 양을 이길 자신이 있을 뿐이에요.”
[네 말이나 쟤 말이나, 결국 같은 뜻 아니야?]
마검이 머릿속에서 종알거렸다. 에키는 웃는 얼굴로 생각했다. 나도 아니까 좀 닥쳐, 망할 마검아.
그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재수 없게 굴었으니 앨리스가 폭발한 건 예정된 수순이었다. 앨리스는 모욕감으로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품에서 장갑을 꺼내 던졌다.
“정식으로 결투를 신청하겠습니다, 에키네시아 로아즈. 제가 승리하면 방금의 모욕을 사과하고 다시는 그런 사치스러운 옷을 입지 마십시오.”
“받아들이죠, 앨리스 윈터벨. 제가 이긴다면 더 이상 저에게 참견하지 마세요.”
“좋습니다. 장소와 시간을 정하십시오. 입회인은 누구로 하겠습니까?”
결투는 신청받은 쪽이 시간과 장소를 정하고, 양측이 모두 동의하는 입회인을 두는 것이 예의였다. 당장이라도 검을 뽑을 듯한 얼굴을 하고서도 결투의 규칙을 지키는 앨리스는 인상 그대로 고지식했다.
에키는 회귀 이전에도 기사 흉내조차 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런 정식 결투 자체가 처음이었다. 기오사를 모으던 시절에는 불법과 범죄의 경계선에서 지냈었으니까.
‘용병들은 결투 신청과 동시에 주먹을 날리는 게 보통이었는데 말이지. 뒷골목 쪽 애들은 그냥 뒤돌아섰을 때 찔러버리고. 역시 기사 지망생은 다르네.’
그녀는 내심 신선한 기분을 느끼며 대답했다.
“오늘 해 지는 시각에 기숙사 뒤의 연무장에서. 입회인은…… 아젠카에 딱히 아는 사람이 없으니, 윈터벨 양이 추천해 주세요.”
“저 역시 마찬가지이니, 생도 대표에게 부탁하도록 하겠습니다. 동의합니까?”
“좋아요.”
“알겠습니다. 그럼.”
앨리스는 경멸 어린 시선을 던지고는 휙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버렸다. 에키는 가만히 그녀가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다가 열어놨던 가방에 다시 손을 댔다.
“편하게 지내려면 미리 한바탕 하는 게 나을 거 같아서 건드리긴 했는데……. 결투하고 나서 반응이 어떨지 모르겠네.”
[어? 안 죽일 거야? 결투잖아, 합법적으로 죽일 수 있는 기회잖아! 야, 나 피 본 지 너무 오래됐다고. 죽이자, 응? 응? 쟤 살아 있으면 너 계속 귀찮게 할걸!]
“넌 제발 좀 닥쳐.”
에키는 마검의 말을 무시하고 짐 정리를 계속했다.
결국 그녀가 정리를 중단한 건 점심시간이 끝날 때가 다 되어서였다. 그것도 정리가 끝나서가 아니라 배가 고파서 멈췄다. 기오사를 모으던 시절에는 식사를 거르는 것이 예사였지만, 지금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사관생도에게는 숙식이 기본적으로 제공된다. 식사는 사관학교 본관에 있는 공용식당에서 할 수 있었다. 생도 대부분이 귀족이라 메뉴도 다양하고 질이 좋은 편이었다.
기숙사를 나와 본관의 공용식당으로 가는 내내 에키는 따가운 시선을 받았다. 그녀는 그런 시선에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예상한 일이었으니까.
땀에 젖은 훈련복 차림, 또는 기본적으로 제공되는 검푸른 생도복, 가끔 다른 것을 입더라도 단정하고 움직이기 편한 차림인 생도들 사이에서 에키네시아는 눈에 확 띄었다.
오늘 그녀는 연한 하늘색의 안감 위에 반투명한 천을 덧댄 가벼운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생화 장식 모자는 햇빛을 가리는 용도에 가까웠고 화장도 열었다.
모자에는 망사가 약간 달려 있어서 얼굴을 어느 정도 가려주었다. 아무리 기오사 오너들이 머무는 곳과 사관학교는 거리가 있다지만, 그래도 그들의 근처로 들어가는 첫날인 만큼 긴장이 되어서 일부러 모자까지 썼다.
그래도 귀족영애들 사이에서는 평범한 나들이용 차림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곳은 아젠카의 사관학교, 여생도의 수가 꽤 되는데도 치마를 입은 생도조차 단 한 명도 없는 곳이었다. 시선을 받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식사를 하는 와중에도 계속 주목을 받는 건 꽤 거슬렸다. 생도들이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그녀를 흘깃거리며 수군거렸다. 미쳤냐는 소리가 간간이 오갔다. 저들 딴엔 안 들리게 하려고 한껏 낮춘 목소리였지만 에키에게는 다 들렸다.
‘내가 뿌린 씨앗이지, 뭐.’
그녀는 내심 한숨을 쉬며 스튜를 떠먹었다. 그녀 주위에는 아무도 앉지 않았다. 스물세 살에 마스터가 되는 걸 기준으로 하면 3년은 이렇게 보내야 했다.
별로 유쾌하지 않은 상상이었다. 기껏 과거를 지우고 다시 시작했는데 또 고행하듯 살고 싶지는 않았다.
‘……1년쯤 줄일까. 스물두 살 마스터 정도는 이해할 만하지 않을까?’
갈색 머리카락의 남자가 불쑥 나타난 건 그때였다.
“네가 에키네시아 로아즈니? 들은 그대로라 쉽게 찾았는데.”
남자가 서글서글하게 웃었다.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그의 팔에는 검은 바탕에 푸른 실로 수를 놓은 완장이 달려 있었다. 150명의 사관생도를 대표하는 생도 대표의 상징이었다.
앨리스가 아마 결투 입회인 이야기를 했겠지. 결투 때문에 왔나? 그나저나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얼굴인데. 누구였지? 에키는 떨떠름한 기색을 감추며 대답했다.
“……네, 제가 에키네시아 로아즈예요.”
“난 이안 펠레트로야. 3학년이고, 생도 대표를 맡고 있지.”
“반갑습니다, 선배님.”
에키가 스푼을 내려놓고 고개를 숙이자 이안이 손을 내저었다.
“뭘, 편하게 대해. 식사를 방해하게 돼서 미안해.”
“괜찮아요. 무슨 일이시죠?”
결투 이야기를 하리라는 예상과 달리 이안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품평하는 듯한 눈으로 그녀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에키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자, 그가 실수했다는 듯 손을 들어 보였다.
“아, 미안. 그냥 좀 궁금해서. 너, 클럽은 정했니?”
“……클럽이요?”
“음, 역시 모르고 있었구나. 어쩐지 그럴 것 같더라.”
사관학교를 목표로 몇 년씩 준비하는 대부분의 생도들에 비하면 에키는 사관학교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았다. 그녀가 전혀 모르는 기색이자 이안이 선선히 설명해 주었다.
“대부분 생도들은 클럽에 대해서 미리 알고 오지만, 너처럼 가끔 모르고 오는 애들도 있긴 해. 사관학교에 수업이나 시험이 따로 없는 건 알고 있지?”
“네.”
“시험은 없지만, 순위는 있어. 개인적으로 도전해서 순위를 바꾸는 건 정식으로 결투를 신청하기만 하면 언제든 가능하고, 3개월마다 한 번씩 생도 전체가 순위전을 치러서 새로 순위를 매기지.”
“네, 그건 알고 있어요.”
순위는 사관학교의 핵심이라 에키도 아는 이야기였다.
생도들은 스콰이어가 없는 정식 기사들이나 준기사들의 시중을 돌아가며 맡는다. 이런 임시 스콰이어는 특별히 기사들이 따로 지명하지 않는 한 사관학교 내부의 순위에 의해 결정되었다.
시중이라 해도 시녀나 하인과는 의미가 달랐다. 무기와 갑옷, 말을 관리하고, 대련이나 훈련을 돕고, 전투를 보조하기도 한다. 운이 좋으면 그 과정에서 검술에 조언을 얻거나 기사와 대련을 할 수 있기도 했다.
대부분의 기사 지망생들은 이런 종자 생활을 통해 경험과 실력을 쌓아 기사가 된다. 어떤 기사는 종자를 그냥 심부름꾼으로 취급하지만, 가르쳐야 할 후배로 대하는 기사가 더 많았다.
그러니 누가 누구를 보조할 것인가를 놓고 생도 간의 경쟁이 치열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럴 때마다 희망자끼리 싸울 수는 없으니 만들어진 것이 생도 간의 순위였다. 당연히 생도들은 순위 경쟁에 목숨을 걸었다.
“순위전을 대비하기 위해 모두 열심이지. 하지만 아무래도 혼자서는 실력을 키우기가 쉽지 않잖아? 대련을 하려 해도 상대가 있어야 하니까.”
“네, 그렇죠.”
“그래서 생도들끼리 모여서 함께 훈련하고, 가끔 여럿이서 스승을 구해 검을 배우기도 해. 그렇게 모이던 생도 모임이 굳어진 게 클럽이야. 보통은 입학하기 전부터 어느 클럽에 들어갈지를 결정하고 오지.”
“……그거 필수인가요?”
에키가 난감하게 되물었다. 지금 그녀의 상황에서 모임에 들어가는 건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얻을 건 없고, 단체 행동이니 귀찮은 건 늘어나겠지.
게다가 그녀는 순위전에서 지나치게 높은 순위를 유지하는 건 피할 생각이었다. 순위가 높으면 기오사 오너들과 마주칠 확률도 높아지니까. 그녀는 회귀 전의 기억이 있을지도 모를 그들과는 되도록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이안이 고개를 저었다.
“클럽에 소속되는 게 의무는 아냐. 여러모로 손해를 보게 되겠지만 말이지. 클럽이 없으면 다른 생도와 친해지기 어렵거든. 수업도 교관도 없는 사관학교에서 조언을 구할 선배조차 없으면 뒤쳐지기 쉬워. 어떤 클럽이 있는지 들어라도 보지 그러니?”
“감사하지만 괜찮아요.”
에키가 딱 잘라 말하자 이안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는 턱을 괸 손으로 입가를 문지르더니 약간 목소리를 낮췄다.
“보통 신입생, 특히 너처럼 수석일 경우에는 클럽들에서 영입 경쟁이 치열해. 그런데 올해는 그 경쟁이 더 치열해질 거 같거든. 갈등이 심해질까 봐 대표로서 걱정될 정도로.”
수석 신입생이 드레스를 나풀거리고 다니는 이상한 계집애라 경쟁이 덜해지는 게 아니라? 의아해진 에키가 더 묻기도 전에 이안이 말을 이었다.
“그럴 이유가 있어. 그 이유 때문에 내가 일부러 널 찾아온 거기도 하고.”
“대체 무슨 이유죠?”
“어쨌든, 정말 아무 클럽에도 안 들어갈 거니? 적어도 어느 클럽이든 들어가면 다른 클럽에서 귀찮게 하진 않을 거야. 어디에도 안 들어가면 모든 클럽에서 너를 건드릴지도 몰라.”
잠깐 고민해 봤지만, 결론은 같았다. 단체 행동을 할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확고하게 말했다.
“전 어디에도 들어가지 않을 거예요.”
“……그래, 네 생각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혹시 클럽들의 영입 경쟁이 과해지면 언제든 날 찾아오렴. 대표로서 중재해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