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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든 꽃-11화 (11/211)

검을 든 꽃 11화

그 말에 니콜의 표정이 약간 변했다. 에키는 눈을 내리깔았다. 니콜이 가만히 에키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다 마침내 한숨과 함께 말했다.

“……네가 뭘 숨기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진심인 건 알겠어. 말할 수 없다고 대놓고 말하니까 묻기도 뭐하고.”

“나중에……. 언젠가는 말할 수 있을지도 몰라.”

“됐어, 그건 마음대로 해. 네가 마검까지 보여주며 날 믿어주는데, 나도 널 믿어줘야 할 거 아니니.”

니콜은 툭 던지듯 말하고는, 아까 내팽개친 외알 안경을 다시 썼다.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말이지만 그 속에 담긴 마음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에키는 문득 먹먹해졌다. 정말로, 자신이 했던 고생들은 모두가 살아 있는 삶이라는 대가에 비하면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감정들이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목소리에 묻어났다.

“니콜 언니, 고마워……. 정말로, 고마워.”

“고마워할 일도 아니야. 조사도, 지키는 것도, 네가 부탁하지 않았어도 내가 먼저 나섰을 일이니까. 잊었니? 난 로아즈의 후원을 받은 마법사야. 내가 로아즈를 돕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니콜이 피식 웃더니 테이블 한쪽에 제멋대로 쌓여 있는 종이뭉치에서 빈 양피지와 깃펜을 끄집어냈다.

“일단 마검을 발견한 상황에 대해 더 자세히 말해 봐. 그 외에도 도움이 될 만한 단서 있으면 다 쥐어짜 보고. 아젠카로는 언제 떠날 거니?”

“준비가 되는 대로 최대한 빨리. 사관생도 시험이 곧이니까.”

“그런데 너, 부모님께는 뭐라고 말하려고? 마검 얘기는 안 할 거라며. 설마 가출하려는 건 아니겠지?”

에키는 니콜의 손에 들려 있던 깃펜과 양피지를 넘겨받았다. 그녀는 마검을 발견한 상황에 대해 꼼꼼히 기록하며 혼잣말처럼 되물었다.

“솔직하게 기사가 되겠다고 하면 부모님이 기겁하시겠지?”

“기겁만 하시겠어? 고이 키운 딸내미가 난데없이 기사가 되겠다는데. 백작님은 기절하실지도 몰라.”

“역시 그냥 여행을 간다고 해야겠어.”

“여행? 무슨 핑계로?”

“나, 슬슬 결혼 얘기가 나올 나이잖아. 성년이니까. 결혼 전에 꼭 여행 한 번은 해보고 싶었다고 하지 뭐. 아젠카로 여행 다녀와서 결혼하겠다고.”

“……그러고 정작 아젠카에 도착해서는 사관생도 시험을 치르고? 그게 가출이랑 뭐가 다르니?”

“기사가 되고 나면 집에 돌아올 거니까, 여행 맞지. 좀 긴 여행.”

니콜은 어처구니가 없는지 이마를 짚었다. 에키는 태연히 말을 덧붙였다.

“조사에 진척이 있거나, 무슨 일 생기면 아젠카로 연락해, 언니. 다치지 않게 조심하고. 위험할 거 같으면 혼자 파고들지 말고 꼭 연락해.”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지……. 어째 당연히 합격할 거란 전제로 말한다, 너? 떨어지면 어쩌려고?”

“그럴 일은 절대 없어.”

“아무리 너한테 마검이 있어도, 그건 숨겨야 하잖아. 평생 검술을 갈고닦은 천재들이 모여들 텐데 정말 할 수 있겠어?”

“내가 걔들보다 더 천재니까 괜찮아.”

니콜의 얼굴이 있는 대로 찡그려졌다. 에키는 자신의 재능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꽤 유쾌했다. 그녀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녀에게는 무척 오랜만인, 진심으로 유쾌한 웃음이었다.

* * *

그로부터 일주일 뒤, 에키네시아 로아즈는 한 달 일정의 여행을 떠났다. 여행 일정에는 기사의 성지 아젠카가 포함되어 있었다.

2막. 알 수 없는 것과 할 수 있는

아젠카의 사관생도는 매년 18세에서 25세 사이의 50명을 뽑는다. 생도로 있을 수 있는 기한은 3년이었다. 3년 안에 스콰이어(Squire : 기사의 종자)나 준기사가 되지 못하면 졸업하고 창천기사단을 떠나야 했다.

사관생도들은 사관학교의 기숙사에서 머물며, 스콰이어가 없는 정식 기사들이나 준기사들의 시중을 돌아가며 맡았다.

차석 신입생 앨리스 윈터벨은 기숙사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녀는 심기가 불편했다. 내심 수석으로 입학할 자신이 있었는데 차석이라니. 게다가 그녀를 제치고 수석으로 입학한 신입생에게는 괴상한 소문이 붙어 있었다.

‘드레스 차림이라니, 말도 안 돼.’

그녀는 시험장이 달라서 수석 입학생을 보지 못했다. 그래도 시험장에 드레스를 입고 올 정도로 사치스럽고 머리 빈 여자가, 자신을 제치고 수석으로 들어올 수 있을 리가 없다고 확신했다. 수석과 차석이 나란히 스무 살짜리 여자인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놈들이 낸 헛소문이겠지.

‘어차피 이제 곧 보게 될 테니까.’

기숙사는 2인 1실이었고, 합격통지와 함께 배정받은 그녀의 룸메이트는 소문의 그 수석 입학생이었다. 앨리스는 자신의 모든 짐을 커다란 가방 하나에 넣어 들고 미리 들었던 방을 찾았다.

‘101호……. 여기구나.’

사관학교의 시설은 좋은 편이었다. 앨리스는 숫자가 음각된 황동 명패가 달린 나무 문을 훑어보다가 노크를 했다. 혹시 룸메이트가 먼저 와 있으면 바로 들어가는 게 무례한 일이 되니까.

“네, 누구세요?”

“101호를 배정받은 앨리스 윈터벨입니다.”

“아, 들어와요. 열려 있어요.”

앨리스는 문을 열었다. 그리고 열자마자 굳어버렸다.

상자, 상자, 상자들. 그리고 열려 있는 수많은 가방들. 나란히 걸린 드레스들과, 쌓여 있는 보석함과, 색색의 실크 스카프, 침대 위에 늘어 놓은 화려한 모자들.

어수선한 그 한 가운데에서 분홍 머리의 여자가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팔랑팔랑한 치마에, 레이스 장갑, 생화가 달린 모자까지 쓰고서.

“……이게, 대체, 무슨…….”

앨리스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에, 그녀가 입구를 돌아보더니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 저도 막 와서요. 정리 중인데 좀 어수선하죠? 금방 치울게요. 침대는 제가 먼저 골랐는데, 괜찮나요?”

“당신은…… 누굽니까?”

앨리스는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물었다. 저 사람은 룸메이트의 자매라든가, 하녀치곤 화려하지만 그래도 하녀라든가, 아니면 하여간 뭔가 방을 잘못 찾은 사람이 아닐까. 그녀의 룸메이트이자 올해의 수석이 아니라.

그러나 그 여자는 앨리스의 희망을 무참히 부수며 손을 내밀었다.

“에키네시아 로아즈예요, 앞으로 잘 부탁해요.”

* * *

앨리스 윈터벨이 짐을 정리하는 데에는 30분이면 충분했다. 그에 비해 에키네시아 로아즈는 오전부터 시작한 짐 정리를 점심시간이 다가올 때까지도 끝내지 못했다.

‘더럽게 많네. 왜 이렇게 많이 넣은 거야?’

왕복 약 한 달의 여행 기간을 잡고 나서 그녀의 짐을 챙긴 건 노라였다. 노라는 에키가 한 달간 매일 다른 옷을 입을 수 있도록 짐을 챙겼다.

그 결과물이 이것이었다. 혼자서 정리하자니 끝이 보이지 않았다. 계절이 바뀌면 짐이 더 늘어날 거라 생각하니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백작 부부는 이 많은 짐을 든 아끼는 딸을 혼자 보내진 않았다. 가문의 기사가 두 명 호위로 붙었었고, 노라도 따라왔었다.

에키는 아젠카까지는 얌전히 그들과 함께 움직였다. 그리고 밤중에 여관을 빠져나가 선발시험 지원서를 냈고, 기사들을 따돌리고 외출해서 예선을 쳤으며, 결과가 발표될 때까지 돌아가는 날짜를 차일피일 미뤘다.

그 다음은 간단했다. ‘어쩌지, 사관생도가 되어버렸네. 이렇게 되었으니 아젠카에서 열심히 지낼게. 부모님께 잘 말씀드려 주렴’이라는 말과 함께 노라와 기사들을 보내버렸다.

그들은 처음에는 전혀 납득하지 못했다. 사고 내지는 착오일 거라며 에키를 설득했다.

하지만 사관학교 입구에 내걸린 합격자 명단을 본 후에는 그런 말을 하지 못했다. 아슬아슬한 합격도 아니고 수석 자리에 에키의 이름이 있었으니까. 그들은 귀신에 홀린 듯한 낯으로 돌아갔다.

사실 에키는 수석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무난하게 상위권 정도만 하려 했지만, 사관생도들의 평균적인 수준이 그녀의 예상보다 낮았다.

통나무를 베는 예선과, 응시생끼리 대련을 하는 1차 시험까지는 다른 응시생을 살펴볼 수 있어서 적당히 조절을 했었다. 문제는 창천기사단의 준기사와 대련을 하는 2차 시험에서 일어났다.

에키의 몸 자체는 회귀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다지 단련되어 있지 않았다. 약한 육체를 기술과 마나로 커버해야 하는데, 창천의 준기사와 대련하는 와중에 마나를 몰래 쓰다간 걸릴 확률이 높았다.

그래서 기술로 때우다가 조절에 약간 실패해 버렸다. 2차 시험이 개별적으로 치러지는 바람에 다른 응시생이 대련하는 것을 보지 못한 탓도 있었다.

‘조만간 집에서 전보가 날아오겠네.’

엄청나게 화를 내시겠지. 걱정도 많이 하시겠고. 납득하기 어려우실 테고.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최대한 빨리 기사가 되어 마검을 치워버리고 돌아가는 수밖에.

“……저기, 로아즈 양.”

보석함을 정리해 넣던 에키가 고개를 돌렸다. 앨리스 윈터벨이 큰 결심을 한 듯한 얼굴로 서 있었다.

앨리스는 깔끔하게 자른 옅은 금발의 미인이었다. 키가 꽤 컸다. 에키도 작은 편은 아니었는데 올려다봐야 할 정도였다. 약간 고지식해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에키는 고지식한 사람을 싫어하지 않았다.

“네, 윈터벨 양.”

“……이 짐들은 다 뭡니까?”

앨리스의 회색 눈동자가 에키의 짐을 한 차례 훑었다. 아직 열지 못한 가방들이 쌓여 있었다. 그것을 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지진이 난 것처럼 떨렸다.

“제 옷이랑 장신구들이에요.”

“이게 전부 말입니까?”

“네, 왜 그러세요?”

앨리스의 얼굴에 경멸이 스쳐지나갔다. 그녀가 무언가를 눌러 참듯 이를 악물고 말했다.

“……기사가 되는 것이 목표인 사관생도에게, 옷이 이렇게 많이 필요할 일은 없을 텐데요.”

“전 필요해서요.”

“필요하다니요? 생도들에게는 생도복도 지급되잖습니까.”

“그런 후줄근한 걸 입을 생각은 없어요. 사관생도는 기본적으로 자율 복장이잖아요?”

“……그럼 검을 다룰 때에도 이런 걸 입겠다는 소립니까?”

“네. 뭐가 문제죠?”

태평한 에키의 대답에 앨리스는 더 이상 참지 못했다. 그녀가 왈칵 목소리를 높였다.

“여기가 무도회장입니까? 아니면 티파티? 이곳이 신성한 아젠카의 사관학교라는 자각이 있긴 한 겁니까, 당신은?”

“사관학교의 규정에 드레스를 입지 말라는 내용은 없어요, 윈터벨 양.”

“그런 바보 같은 규정이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당연한 일이니까!”

“그게 왜 당연하죠?”

“기사답지 못하니까요!”

앨리스는 분노로 옅게 볼을 붉히고 있었다. 실제 나이야 동갑이라지만 과거로 회귀한 에키에게 앨리스는 한참 어리게 느껴졌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기사답지 못하다고 화를 내는 그녀가 귀엽고 풋풋해 보였다.

하지만 귀여운 것과 별개로, 룸메이트가 매번 지적을 해대면 여러모로 피곤해질 것이다. 어느 정도 기를 눌러둘 필요가 있겠지. 에키는 웃는 얼굴로 물었다.

“윈터벨 양이 생각하는 기사다운 건 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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