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10화
“……뭐? 마검?”
니콜이 픽 웃더니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녀는 긴장이 풀린 목소리로 대꾸했다.
“난 또 뭐라고. 동화책을 졸업할 나이는 한참 지나지 않았니, 에키?”
“문양이 새겨져 있는 투명한 칼날에, 손잡이는 검은색의 재질을 알 수 없는 금속, 길이는 이 정도.”
에키가 손을 들어 올려 그녀가 일어섰을 때 가슴쯤까지 오는 높이를 표시해 보였다. 니콜의 표정이 약간 변했다.
나타났다 하면 대학살을 일으키는 마검 바르데르기오사는 기오사 시리즈 중에서도 꽤 유명한 편이었다. 그러나 유명세와는 별개로 어떤 모습인지는 그리 알려져 있지 않았다. 마탑 7현자의 수제자인 니콜이라면 몰라도 에키네시아 같은 보통의 귀족영애는 모르는 게 정상이었다.
“……그런 검이 그 꾸러미 안에 있었다고?”
“응, 분명히 마검이었어. 마검 바르데르기오사.”
“그게 바르데르기오사인 걸 네가 어떻게 알아?”
예상한 질문이었다. 에키는 준비해 뒀던 변명을 댔다.
“사실 내가 기오사 시리즈에 관심이 좀 많았거든. 예전에 책에서 본 삽화하고 비슷해서.”
“……모조품일 거야. 기오사 모조품은 많으니까.”
“글쎄, 직접 봐. 생각이 달라질 테니까.”
“뭐?”
에키가 천천히 오른손의 장갑을 벗었다. 실크 장갑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손을 뻗었다.
그 손에 있는 검은 문양을 본 니콜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그 문양에서, 조금 전 에키가 묘사한 것과 완전히 동일한 검이 떠오르자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에키는 손 위에 떠오른 검의 자루를 잡았다. 그리고 가로로 눕혀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니콜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 검을 들여다보더니 입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그녀의 눈에 빛이 잠깐 서렸다가 사라졌다. 탐지마법의 일종인 모양이었다.
그 상태로 검을 살핀 그녀가 소스라치게 놀라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순식간에 테이블에서 멀어지며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가리켰다.
“바, 바, 바르데르기오사……!”
“언니라면 바로 알아볼 거라 생각했어. 마법사니까.”
에키는 쓴웃음을 짓고는 마검의 손잡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것을 본 니콜이 평소의 그녀라고는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다가오더니 마검을 쥐려는 에키의 손목을 잡아챘다.
“미쳤니? 마검에 손을 대려고?”
“손은 이미 댔어, 언니.”
“맙소사, 이, 이건, 당장에 마탑에 알리고, 봉인을, 아니, 창천기사단에…….”
“안 돼, 방금 봤잖아.”
“무, 무, 뭐, 뭘?”
에키는 쉽사리 니콜의 손에서 벗어나 마검을 쥐었다. 마검이 녹아들 듯 그녀의 손 안으로 사라졌다. 니콜은 멍하니 입을 벌린 채 검이 사라진 자리를 보다가, 에키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에키는 무언의 질문을 알아들었다.
“맞아, 이건 날 주인으로 인식하고 있어.”
“어, 어떻게? 너, 그럼, 지금…….”
니콜이 패닉에 빠져 횡설수설했다. 마검이 마검이라 불린 이유는 주인을 조종하여 학살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눈앞의 에키는 너무나 멀쩡해 보였다. 평소와는 좀 다르긴 했지만 살육에 미친 악마로는 보이지 않았다. 에키가 어깨를 으쓱였다.
“왜 제정신이냐고? 글쎄. 어쨌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중요하지 않다니, 마검을 쥐었는데 멀쩡하다는 게……!”
“언니, 대체 왜 마검이 우리 집 주방에, 저런 허술한 포장으로 있었을 것 같아?”
니콜의 눈이 흔들렸다. 에키는 장갑을 도로 끼며 말을 덧붙였다.
“만약에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마검을 먼저 쥐었다면? 난 지금 마검에 물들지 않았지만, 만약 내가 조종당했다면? 그럼 어떻게 되었을까?”
“……로아즈 저택은 지금 시체만 남아 있겠지.”
“로아즈뿐이겠어?”
에키가 서늘하게 웃었다. 니콜이 외알 안경을 빼고 눈가를 주물렀다. 이어 옷깃으로 안경의 얼룩을 닦았다. 에키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기다렸다. 평정을 되찾은 니콜이 안경을 쓰며 말했다.
“누가, 무슨 의도로, 어떻게 로아즈에 마검을 가져다 놓았는가. 넌 지금 그게 제일 중요하다는 거지?”
“맞아.”
“틀렸어. 지금 그것보다 중요한 건 네가 어떻게 마검을 쥐고도 아무렇지도 않은지야. 당장 제대로 조사를 해야 해. 넌 지금 시한폭탄이라고. 그 마검을 어떻게든 처리하고 나서…….”
“이유는 내가 알아. 그리고 마검을 처리할 방법도 생각해 뒀어.”
“……에키.”
니콜은 심란한 듯 한 차례 더 눈가를 주물렀다. 그녀가 무겁게 말했다.
“뭘 숨기고 있는 거니?”
“……미안해, 말할 수 없어. 내게 마검이 있다는 걸 언니에게 알린 것도 조사를 부탁하기 위해서야. 그게 아니면 이것도 말 안 했어.”
“조사? 마검의 출처?”
“응. 난 따로 할 일이 있어서.”
“할 일이라니?”
“마검을 처리해야지.”
“……그러니까, 네가 마검을 처리할 동안 나보고 마검의 출처를 조사해 달라고? 그래서 온 거야?”
“맞아. 내가 떠나 있는 동안 우리 가족들도 부탁할 겸.”
“떠나? 어디로 가려고?”
“아젠카.”
니콜이 신음 같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녀는 지친 태도로 의자에 기대며 외알 안경을 아무렇게나 벗어서 내팽개쳤다. 탁한 녹안이 늪처럼 가라앉아 에키를 노려보았다.
“너, 지금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고 있긴 해?”
“잘 알아. 그래서 언니한테 말하는 거야. 언니는 믿을 수 있으니까.”
“……뜬금없이 낯간지러운 소리를 한다 싶더라니. 사람 함부로 믿는 거 아니야, 에키네시아 로아즈. 네가 마검의 주인인 게 밝혀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위험해지겠지, 여러모로.”
“위험? 구체적으로 말해 줄까? 넌 당장 격리될 거야. 지금 괜찮다고 해도 앞으로도 괜찮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잖아. 조종당하지 않는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실험을 할지도 몰라. 언제 터질지 모르니 그냥 죽이자고 하는 의견도 나올 거야. 물들지 않았다는 말을 사람들이 믿을 것 같아?”
“지금 언니는 믿어주고 있잖아.”
“나야 당연히, 아니, 너 설마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널 믿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니? 난 네가 그렇게까지 멍청할 줄은……!”
“물론 언니 외의 사람들에게는 숨겨야지. 부모님에게도 말 안 했어. 조사를 부탁할 만한 사람이 언니밖에 없어서 언니에게만 말하는 거야. 언니는 믿을 수 있으니까.”
“대체 그 신뢰는 어디서 나오는 거니?”
그녀가 기가 차다는 듯 물었다. 에키는 입을 다물었다.
‘언니가 죽음 앞에서도 달아나지 않는 걸 봤으니까. 있지, 죽음을 앞두면 사람의 바닥이 보여. 그리고 난 그걸 아주 많이 봤어. 언니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야.’
말할 수 없었다. 그녀가 경험한 시간들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 일이다. 그렇게 되기를 절실히 바랐고 후회하지도 않지만, 앞으로 누구와도 그 경험을 공유하거나 이해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니 조금, 외로워졌다.
할 수 없는 말들을 입안으로 삼키고, 에키는 다른 말을 했다.
“그럼, 언니를 믿지 말라고?”
“아니, 그건 아닌데……. 아니다. 믿지 마. 그냥 넌 아무도 안 믿는 게 낫겠어.”
니콜이 어두워진 얼굴로 중얼거리더니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잠깐만, 아젠카엔 뭐 하러 가려는 거니? 설마 창천기사단에 가서 내가 마검의 주인이에요, 라고 하려는 건 아니겠지?”
“아깐 마탑이나 창천기사단에 알리자며?”
“그건 네가 마검의 주인이 아닐 때 얘기고! 돌겠네, 마검을 떼놓을 방법이 있던가? 넌 그거 대체 어떻게 처리하겠다는 건데!”
마검의 소유권을 포기하는 건 간단했다. 하지만 그 점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다. 주인을 조종하는 검이니 그럴 수밖에.
다른 이유로 마검을 포기할 수 없는 에키는 마검을 버리는 게 쉽다고 설명하는 대신 뒷말에만 답했다.
“창천기사단의 기사가 될 거야.”
“……뭐?”
“정식 기사가 되어서 마검을 처리하려고.”
니콜은 적나라하게 일그러지는 표정을 숨기지도 않았다. 그녀는 제정신이냐는 심정이 그대로 묻어나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기사? 네가? 그것도, 창천의?”
“응. 아젠카 사관생도 선발시험이 매년 봄에 있잖아. 그거 치러 갈 거야. 생도로 시작해서 최대한 빠르게 기사가 되려고.”
사실 마스터인 걸 밝히면 바로 입단시험을 치를 수 있겠지만, 너무 심하게 의심스러운 짓이었다. 평범하던 스무 살짜리 귀족영애가 대뜸 마스터라니.
물론 사관생도가 되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일이지만, 적어도 바로 마스터라고 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사관생도로서 적당히 실적 쌓고 검술 늘어나는 모습을 보인 다음, 유리엔이랑 비슷한 스물세 살쯤에 마스터가 되는 게 그나마 눈에 덜 띄겠지. 천재라서 그런 거라고 납득할 수 있는 수준만 유지하고.’
에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도 못한 니콜은 뒷목을 잡았다.
“아니, 네가 무슨 수로 기사가 되겠다는 거야? 검을 잡아본 적도 없는 애가!”
이것도 예상하고 준비했던 질문이었다. 에키는 쓰게 웃었다.
“사실 남몰래 검을 연습한 적 있어.”
“얘가 이젠 헛소리까지 하네. 내가 널 모르니? 네 성격에 검술 훈련?”
“그리고 언니, 난 마검의 주인이야. 기오사 오너라고.”
기오사 오너. 극히 드문 예외를 제외하면, 최소한 마스터는 되어야 기오사 오너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오너는 당연히 뛰어난 검사다. 여기까지가 상식이었다.
상식에 따르면 기오사 오너인 에키네시아도 뛰어난 검사여야 했다. 하지만 니콜이 알던 에키와 뛰어난 검사라는 수식어는 도저히 연결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혼란스러워졌다.
“기오사 오너라니……. 일단 그건, 아무리 기오사 시리즈라지만 마검인데……?”
“그래, 마검이니까. 마검 덕분에 더 검에 능숙해졌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녀가 검의 달인이 된 건 따지고 보면 마검 때문이었으니까. 니콜은 그녀의 말을 다르게 이해했다.
“마검에 그런 능력이 있었어? 아, 저건 원래 소유주를 조종하는 검이었지. 비슷한 방식인가? 아니, 그럼 자아가 사라져야 하는데……. 대체…….”
“어쨌든 난 계속 마검을 들고 있을 생각이 없어. 그러니 내가 기사가 될 때까지, 언니가 마검의 출처를 조사하면서…… 우리 가족을 지켜줬으면 좋겠어. 부탁할 만한 사람이 언니뿐이야.”
로아즈 백작은 정치나 권모술수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수도의 정치판에 끼어들지 않고 영지에서 살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백작부인도 크게 다르지 않았고, 란셀리드는 열일곱 살로 아직 성년식조차 치르지 못한 소년이었다. 이런 문제에서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은 니콜 시즈튼뿐이다.
니콜이 낯을 굳히고 한동안 침묵했다. 초조하게 장갑 끄트머리를 만지작거리며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던 에키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미안해, 이런 부탁을 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