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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든 꽃-9화 (9/211)

검을 든 꽃 9화

[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렇게 무섭게 웃어?]

“너 버릴 생각.”

[……어떻게 버릴 건데, 무정한 주인님아?]

“기사가 될 거야.”

[뜬금없이 웬 기사?]

“창천의 매가 되어서, 너 말고 다른 참한 기오사 들이려고.”

[야, 나만큼 참한 기오사가 어디 있다고! 날 봐, 주인이 자길 버리려는 계획을 짜는데도 얌전한데!]

“그게 싫으면 엄한 사람 죽이자고 칭얼대지나 마.”

[에이, 대부분의 문제는 죽이는 게 가장 빠르고 깔끔한 해결책이잖아. 너도 편하고, 나도 신나고, 서로에게 좋은 방법을 권유하는 것뿐인데? 주인아, 취향 존중 좀 해줘라.]

에키는 마검의 헛소리를 무시했다.

마검 문제는 어떻게 할지 결정했다. 이제 다른 문제가 남았다. 그녀는 서랍에 챙겨두었던 빈 꾸러미를 꺼냈다. 아까 노라에게서 받아낸 꾸러미였다.

“발. 너 자아가 깨어나기 전에 있었던 일은 모른댔지?”

[너라면 자고 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하겠냐?]

“그럼 네놈이 왜 우리 집 주방에 놓여 있었는지도 당연히 모르겠네.”

[몰라, 그런 건.]

에키는 포장지와 노끈을 꼼꼼히 살폈다.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고,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마법사가 아닌 그녀로서는 더 이상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마검을 가져다 놓은 게 좋은 의도는 절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로아즈 백작가에 원한이 있었던 걸까.

아젠카로 떠나기 전에 이 문제를 어떻게든 해야 했다. 가족들이 위험하게 둘 순 없다.

그렇다고 무언가 일이 발생할 때까지 집을 지키고만 있을 수도 없다. 금방 추적해서 알아내고 해결할 만한 문제도 아니었으며, 마검을 치워 버리는 것도 급했다.

‘내 대신 이걸 추적하고, 내가 떠나 있는 동안 가족들을 지켜줄 수 있는 사람.’

부탁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 다른 사람은 떠오르지도 않았다. 그녀와도, 그녀의 가족들과도 오랜 시간 알고 지냈던 사람. 가족이나 다름없이 신뢰하는 사람. 충분히 강하고 충분히 현명한 사람. 그리고 다른 소중한 사람들처럼, 그녀의 손에 죽었었던 사람.

‘니콜 언니…….’

그녀는 내일 저택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에키는 결심을 굳히고 꾸러미를 챙겨 넣었다.

“……바빠지겠네.”

[바빠져? 누굴 죽이려고?]

“닥치고 잠이나 자.”

에키가 인상을 쓴 채 마검을 쥐었다. 마검은 투덜거리며 그녀의 손 안으로 스며들 듯 사라졌다.

* * *

에키네시아는 다음날도 일찍 일어났다. 기오사를 모으기 위해 자는 시간도 아꼈던 그녀는 최소한의 수면을 취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리고 노라가 들어오기 전에 일어나지 않으면 손바닥의 문양을 감추기가 어려웠다.

물론 이런 사정을 설명할 순 없다. 어제도 일찍 일어났었는데 오늘까지 그랬다간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세 발 달린 닭을 보듯 쳐다볼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새벽에 몰래 나가서 가볍게 몸을 풀고 들어와서는, 늦은 아침까지 침대에서 늦잠을 자는 척을 했다.

은근히 고역이었다. 고행하는 수도사 못지않은 세월을 보냈더니 가만히 누워 쉬는 게 어색했다. 자꾸만 불안하고 무언가 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래도 오랜만에 악몽을 안 꿨어. 앞으로는 거의 안 꾸겠지.’

에키는 침대 속에 파묻혀 노닥거리며 그런 생각을 했다. 꿈도 꾸지 않고 잘 잤다. 기분 좋은 숙면이었다.

편히 잠들었듯, 쉬는 것에도 곧 적응할 것이다. 이제 그녀에게는 쉴 자격이 있었다. 쉬어도 된다. 에키는 폭신한 베갯잇에 뺨을 비비적대며 설핏 웃었다. 그러다 기다렸던 노크 소리가 들리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아가씨, 슬슬 일어나셔야지요.”

“나 일어났어, 노라.”

“어머.”

에키가 문을 열어주자 노라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녀는 세숫물을 챙기며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어제도 일찍 일어나시더니.”

“앞으로는 좀 일찍 일어나 보려고. 니콜 언니는 언제쯤 도착한대?”

“이미 오셨어요. 방에서 짐을 풀고 계셔요.”

“벌써? 깨우지 그랬어.”

“니콜 님이 깨우지 말라고 하셨어요.”

알 만했다. 니콜은 에키가 가장 편하게 대하는 사람이었다. 또래의 귀족영애들과 대화할 때처럼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없으니까.

그런 만큼 짜증도 많이 냈었다. 그걸 잘 아는 니콜은 보나마나 ‘깨우지 마, 걔 아침에 깨우면 신경질 내는 거 알잖아’ 하면서 노라를 말렸을 것이다.

세숫물을 치운 노라가 간단한 아침 거리를 차려주었다. 에키는 아침을 먹고 옷을 갈아입으며 내내 니콜에게 어떤 식으로, 어디까지 말을 할지를 고민했다.

‘니콜 언니라면…… 그냥, 사실대로 말해도 괜찮겠지만. 그래도 다 말할 수는 없으니까.’

니콜 시즈튼은 로아즈 백작가의 후원을 받는 마법사였다. 귀족들이 재능이 뛰어난 자들을 후원하는 건 흔한 일이지만 그녀의 경우는 조금 특이했다.

니콜은 마법의 재능이 너무 미미해서 후원자를 찾지 못하고 있던 고아였었다. 대부분의 귀족들이 이 수준의 재능이면 쓸모가 없다며 그녀의 후원을 거절했다. 유일하게, 로아즈 백작 부부만이 니콜의 사정을 딱하게 여겨 거두어 주었다.

니콜은 로아즈의 후원으로 기숙사제 마법학교를 다니며 방학마다로 아즈 저택으로 돌아와 에키와 란셀의 놀이상대가 되어주곤 했다.

니콜의 마법 실력은 형편없어서 마법사라고 불리는 것조차 무리였다. 그러나 로아즈 백작가에서는 그것을 탓한 적이 없었다. 그녀가 최선을 다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백작 부부는 마법사가 되지 못해도 상관없다며 니콜에게 시즈튼이라는 작은 마을을 영지로 주기도 했다.

상황이 달라진 건 니콜이 마법학교를 졸업할 무렵이었다. 최고의 마법사들이 모여 있는 마탑 소속의 현자가, 니콜이 기존의 방식으로는 규정하기 어려운 재능을 가졌다는 걸 알아차렸다.

이후 니콜은 그 현자의 수제자이자 후계자가 되어 마탑에 들어갔고, 스물두 살쯤부터 탁월한 마법사로 이름을 날렸다.

이제는 그럭저럭 괜찮은 수준의 귀족에 불과한 로아즈 백작가보다 일곱 명밖에 없는 현자의 후계자인 니콜이 더 대단해졌다. 하지만 니콜은 여전히 로아즈 백작 부부가 준 시즈튼이라는 성을 썼고, 휴가 때면 자주 로아즈 백작가에서 머물렀다.

“다 되었어요, 아가씨.”

“고마워, 노라.”

노라가 마지막으로 에키의 옷자락을 정돈했다. 에키는 노라를 보내고 혼자서 니콜의 방으로 향했다.

복도를 걸으며 그녀는 회귀 이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바뀌기 전의 과거에도, 니콜은 같은 날짜에 로아즈 백작가에 도착했다. 다만 지금과 달리 과거의 니콜이 본 건 에키에 의해 몰살당한 로아즈 저택의 폐허였을 것이다.

그것을 보고 니콜이 어떤 반응을 했을지 에키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그때쯤 근처의 다른 마을을 학살하고 있었다.

그리고 니콜은 홀로 로아즈를 몰살시킨 악마의 흔적을 추적해 그녀를 찾아왔었다.

‘언니는…… 나를 못 알아봤었지.’

가족만큼 가까웠던 그녀도 못 알아 보는 게 당연했다. 고작 며칠 만에 에키는 그런 몰골이 되어 버렸었다.

니콜은 울어서 한껏 부은 얼굴과 증오로 불타는 눈으로 마검의 악마를 노려봤었다. 그녀는 충분히 달아날 수 있는데도 달아나지 않았다. 로아즈 백작가의 복수를 위해 악마에게 악착같이 덤벼들었다.

에키는 언제나 시큰둥하던 그녀가 로아즈를 진심으로 소중하게 여겼다는 걸 그때서야 깨달았다.

마검에 물든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에키네시아는 그때 처음으로 부상을 당했다. 니콜 시즈튼은 뛰어난 마법사였고, 마검은 아직 숙주의 몸에 익숙하지 않았으므로. 그래도 치명상은 아니었다. 그 상처를 낸 대가로 니콜은 그녀의 손에 죽었다.

‘나를 못 알아봐서 다행이었어. 알아봤다면 더 힘들었겠지. 언니도, 나도.’

란셀리드와 부모님, 로아즈 저택의 사람들은 그녀를 알아봤었다. 마검을 쥔 직후였으니까. 그래서 에키는 지금도 그 새벽을 떠올리는 것이 힘들었다.

어느새 니콜의 방 앞이었다. 그녀는 노크를 하지 않고 머뭇거렸다.

[안 들어가고 뭐 해?]

머릿속에서 마검이 종알거렸다. 에키는 신경질적으로 오른손을 움켜쥐었다. 호흡을 고르고 조심스럽게 노크했다. 문 너머에서 사람이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문이 열렸다.

“……에키?”

니콜은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어깨 어림에서 짧게 자른 빨간 머리, 탁한 녹색 눈동자, 약간 도드라진 광대뼈와 눈 밑의 기미. 벌건 증오와 고통 대신 약한 피로와 의아함이 담긴 얼굴. 그리운 얼굴이 기억하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눈앞에 나타났다.

에키는 눈물이 핑 돌려는 것을 얼른 삼키고 웃었다.

“……오랜만이야, 언니.”

“어, 뭐.”

“들어가도 돼?”

“그래.”

니콜이 비켜섰다. 방 안은 어수선했다. 마법사인 니콜은 자기 짐을 하인에게 맡기지 않는데, 정리정돈엔 젬병이라 방 꼴이 엉망이 되곤 했다. 에키는 아무렇지도 않게 지저분하게 쌓인 종이뭉치를 밀어내며 의자에 앉았다.

“짐은 다 풀었어? 이번엔 언제까지 머물 예정이야?”

그녀가 웃으며 물었다. 니콜이 얼룩이 묻은 외알 안경을 추어올리며 에키를 유심히 바라보더니 눈살을 팍 찡그렸다.

“너 에키 맞지?”

“나 맞아. 왜? 뭐가 이상해?”

니콜은 다른 의자에 쌓여 있던 책들을 치우고 앉으며 슬쩍 에키를 살폈다. 예전의 에키네시아라면 얼룩이 묻은 외알 안경부터 지적을 시작해서 방 안을 보면서는 대놓고 어이가 없다는 티를 냈을 것이다. 앉기는커녕 더럽다며 방에 발도 들이지 않았겠지.

“내가 아는 에키는 이렇게 나한테 방긋방긋 웃을 애가 아닌데 말이지.”

에키는 니콜의 말을 듣고서야 자신이 ‘평소’와 달리 굴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안경의 얼룩도, 방 안의 어수선함도 개의치 않았다. 그런 사소한 것들에 신경 쓰지 않게 된 지 오래였다. 죽었던 사람이 살아 숨 쉬고 있으니 아예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언니 보니까 좋아서 그래.”

“헛소릴 하는 걸 보니 너, 뭐 부탁할 거 있지? 본론만 말해, 바쁘니까.”

니콜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에키는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기억 속에 있던 니콜과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 달라진 건 에키 자신이었다.

“헛소리 아니야. 나 솔직히 언니 많이 좋아해.”

“미쳤니, 징그럽게 왜 이래?”

“마법학교 시절에 많이 힘들었을 건데 그런 티 안 내고 장학금 받아오는 거 멋지다고 생각했었어. 후원자의 딸인 내가 껄끄러웠을 텐데 아무렇지도 않게 대해줘서 사실은 고마웠고. 그러면서 못마땅한 척 맨날 지적만 해대서 미안해.”

“……너 뭐 잘못 먹었어?”

“그냥, 한 번도 말 안 한 것 같아서.”

니콜이 소름이 돋는지 팔뚝을 문질러댔다. 에키는 마냥 웃는 얼굴이었다. 체면과 자존심으로 과거엔 인정하지 못했던 심정을 말하고 나니 후련했다.

과거의 에키는 니콜의 귀족적이지 않은 부분들을 싫어했다. 평민 출신에 가문의 후원을 받는 마법사라고 내심 그녀를 제 아래로 보았다. 그래서 니콜이 저택에 머물 때를 기다리면서도, 니콜을 좋아한다는 티를 내지 않았다.

바보 같은 짓이었다. 죽으면 다시는 만날 수 없고, 죽음이 언제 찾아 올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게다가 그 죽음 앞에서 사람이 내 보이는 건 신분 따위가 아니라 성품이었다. 그런데 그깟 신분이, 그가 얄팍한 자존심이, 뭐가 그리 중요하다고 솔직해지질 못했을까.

니콜은 살갑게 구는 에키에게 적응이 안 되는지 몹시 어색해 보였다. 그녀는 괜히 헛기침을 하고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더니 손부채질까지 했다. 그러곤 애써 태연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대체 무슨 부탁을 하려고 이런 민망한 소리까지 해?”

“물론 부탁할 게 있긴 하지만, 방금 한 말도 다 진심인걸.”

“어우, 됐어, 됐으니까 엉뚱한 말 그만하고, 부탁이나 말해.”

에키는 순순히 빈 꾸러미를 꺼내 니콜의 앞에 내려놓았다. 니콜이 의아한 기색으로 꾸러미를 보더니 그것을 집어 들었다. 안이 빈 것을 확인한 그녀가 인상을 썼다.

“이게 뭐니?”

“오늘 새벽에 우리 집 주방에서 발견된 꾸러미야.”

“비어 있잖아. 안에 뭐가 있었는데?”

“언니. 지금부터 할 말은 언니 혼자만 알고 있어야 돼. 비밀을 지켜 줄 수 있어?”

“뭐가 그리 심각해? 알았으니 말해 봐.”

에키는 주위의 기척을 확인했다. 니콜의 방 근처에 있는 건 그녀와 니콜뿐이었다. 그녀는 잠시 심호흡을 하고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그 안에 마검이 들어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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